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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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지내지 못하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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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연 [fisherpeter] 쪽지 캡슐

2024-03-23 ㅣ No.170825

 

어제 밤늦은 시간에 안양성당 교우들께서 아마도 본당에서 시국미사를 하고 거리로 나오는 영상이었습니다. 플랜카드를 보니 이번주 월요일이었습니다. 플랜카드 오른쪽에 계신 신부님이 마침 마산교구 신부님이었습니다. 지난주 토요일이었습니다. 이 신부님 본당에서 고해성사를 봤던 것입니다. 옆옆 본당이라 미사 시간을 착오로 잘못 알아 가니 막 미사가 끝나고 신부님이 성전 입구에서 교우님들과 인사를 하시고 계셨는데 고해성사를 부탁드렸습니다. 이날 저는 원주 배론성지에 피정하러 새벽 한 시에 도착해서 혼자 숙소에 들어가 새벽에 옆에 있는 봉쇄수녀원에서 새벽미사를 시작으로 원주교구 순례팀들과 합류해서 피정을 하고 오전에는 최양업 신부님 묘소 참배와 함께 나눔을 한 후 피정을 마치고 마산에 내려왔습니다. 여건만 되면 원주에서 고해를 보려고 같이 피정을 하신 신부님께 부탁을 드리려고 했는데 그냥 마산에 내려와서 옆옆 본당에서 봤습니다. 

 

가톨릭으로 개종 후에 본 고해성사 중에서 가장 가슴 아픈 고해였습니다. 사실 고해를 보기 전 이틀 전에는 많이 울었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금까지 만 오십이년을 살면서 말로 저도 모르게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말을 내뱉었습니다. 물론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는 않지만 그날 저녁에 제가 그런 말을 저도 모르게 했다는 그 사실에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고 또 제가 하느님을 믿으면서 그런 말을 해서 너무나도 괴로워 울었던 것입니다. 제가 얼마나 한이 가슴에 맺혔으면 그랬겠습니까? 

 

그동안 신앙으로 인해 받은 고통이 너무 컸고 그로 인해 제 생명까지 위험할 정도가 됐다고 하니 분노가 극에 달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런 말이 저도 모르게 나왔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어려서부터 입에 십원짜리 욕도 거의 하지 않고 살아왔는데 흔히들 남자들이 하는 욕 같지도 않은 욕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이 인용은 몇 번을 했어도 아직까지 한 번도 그런 표현도 제 입으로 내뱉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분노에서 그런 말이 나왔지만 제가 제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기에 눈에 눈물이 흘렀던 것입니다. 자그마치 10년이라는 세월을 저를 괴롭히는 신자가 있었기에 그랬던 것입니다. 

 

2주 전에는 한 사람에게는 제가 나이가 많아 알고도 있었지만 언젠가는 반성하고 회개할 날이 있을 거란 마음으로 지금까지 참았지만 그날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정중히 말씀드렸습니다. 왜 있지도 않는 사실로 저를 모해하시는지 하니 마치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가 하고 무척이나 놀라워했습니다. 순간 당황하더니 사과를 하며 나중에는 문자로 정중하게 사죄를 했습니다. 마침 그날 저희 본당에서 주일 미사 후 피정을 하는 시간이라 또 신부님께서 고해실에 계셔서 그분이 고해하러 들어가시는 것을 봤습니다. 차라리 저는 뒷담화를 한다면 그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뒷담화와 사람을 음해하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음해는 살인과 같은 것입니다. 뒷담화는 인간이 사는 세상 어디서나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세상에 하다 못해 대통령도 욕하는 세상이지 않습니까? 

 

저는 지금까지 세상에서나 신앙 안에서 남한테 욕 먹을 행동을 하며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동네에서도 그렇고 학교에서도 친구들도 저한테는 함부로 하지 못할 정도로 모범으로 살았으며 심지어는 선생님도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학교 생활도 전설적인 인물이라고 할 정도로 예의 바르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면 저는 부모님께서도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비록 하느님을 믿지는 않으셨지만 예수님 말씀처럼 복음의 삶을 사셨던 분이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그런 모습을 자연스럽게 배웠기에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와 저만 고향이 경상도이고 형님 누나 어머니는 다 전라도가 고향입니다. 아버지께서 전라도에서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셨고 오랜 세월을 전라도에서 사셨다가 고향인 진주로 이사를 오게 됐을 때 전라도 마을 분들이 울지 않으신 분이 없다고 어머니께서 늘 생전에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세상을 반듯하게 사셨는지 이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부모님 밑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어려서도 애가 애 같지도 않다고 동네 어른들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제 자랑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학교면 학교 세상 어디를 가도 저를 다 좋아하는데 유독 본당에서는 물론 저를 몹시 아껴주시는 분들도 있지만 미운 오리새끼 취급을 받으며 신앙생활을 지금까지 해왔으니 몸에 병이 안 날 수가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즘 조국 전 서울대 교수가 한 말처럼 잃을 게 없으니 무서울 게 없다는 말처럼 저의 몸 건강 상태가 단순히 심각한 상태에 이르게 됐다고 해서 분노를 품고 그걸 발산할 수단으로 불쌍한 영혼이라는 제목으로, 시리즈로 교회의 문제점을 토로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저는 그것보다는 개종 후 지금까지 가톨릭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제 상식으로는 도저히 하느님을 믿는다고는 하면서 조금도 하느님을 믿는 사람과 같은 행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한편으로는 이해 불가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불쌍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불쌍하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건 바로 이것입니다. 단순히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품위까지는 바라지 않습니다. 어디 가서 하느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최소한의 마지노선은 지켜야 하지 않아야 하는가 입니다. 최소한의 그 마지노선마저도 붕괴된다면 그건 한 개인의 신앙은 말할 것도 없고 나아가 신앙공동체에 빨간 불이 들어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누구와 공동체를 비판하려고 하는 의도가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이 정도는 신앙인으로서 지켜야 할 태도가 아닌가 하는 그런 면을 조명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 면을 제가 오늘 제목으로 단 것을 다시 언급하며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왜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지내지 못하는가요?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것의 최종 종착역은 영혼 구원이겠지만 그 영혼 구원은 형제간의 서로 사랑도 하지 못한다면 절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개신교는 연옥 교리가 없습니다. 우리 가톨릭은 연옥 교리가 있습니다. 연옥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는 다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서로 사랑하는 훈련을 하지 못하면 하느님 나라에 갈 수가 없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연옥에서 단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가는 것을 포기하면 모를까 포기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서부터 사랑하는 훈련을 많이 해서 하느님 나라를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지 왜 우리는 굳이 연옥을 거쳐서 하느님 나라에 가려고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보실 때 어떤 게 더 현명한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천주교 신자들은 무의식 중에 또는 은연중에 연옥을 당연히 거쳐서 천국에 가려고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걸 이해를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런 생각보다는 이왕이면 안 거치고 갈 수 있다면 그 방법을 선택하는 게 더 현명한 방법일 텐데 그 방법은 바로 다른 게 아니고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려고 성당이라는 하느님의 집에서 훈련을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고 성당에 다니는데 오히려 정반대의 행동을 한다면 이 얼마나 불쌍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그런 길을 가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단지 그런 사람이 없기를 호소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불쌍한 영혼이라는 타이틀로 우리 모두 한번 저를 포함해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자는 취지로 글을 써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왕 하느님을 믿기 위해서 천주교에서 영세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이제라도 서로 사랑하며 지낼 수 있는 형제자매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하느님 보시기에 얼마나 흡족하시겠습니까? 우리 모두 노력해보면 어떻겠습니까?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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