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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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금요일(백)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 독서,복음서 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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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군 [ahyin70u] 쪽지 캡슐

2021-06-10 ㅣ No.147486

지극히 거룩하시신 예수 성심 대축일

즉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이다. 이 대축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지내는데, 예수 성심이 성체성사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중세 때 시작하여 점차 보편화되었다. 1856년 비오 9세 교황 때 교회의 전례력에 도입되었으며,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해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 성화의 날을 지내고 있다. 이날은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또한 교회의 모든 사람이 사제직의 존귀함을 깨닫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날이기도 하다.

 

 

 

 

1독서<네 마음이 미어진다.>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1.1.3-4.8-9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에 나는 그를 사랑하여, 나의 그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3 내가 에프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네 팔로 안아 주었지만, 그들은 내가 자기들의 병을 고쳐 준 줄을 알지 못하였다.

4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었다,

8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혀 오른다.

9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나는 네 가운데에 있는 거룩한 이’, 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지 않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 호세아 예언자는, 주님께서는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르시어, 타오르는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으신다고 한다.

 

 

2독서<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3,8-12,14-19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8 모든 성도들 가운데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나에게 은총을 주시어,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풍요를 다른 민족들에게 전하고,

9 과거의 모든 시대에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던 그 신비의 계획이 어떠한 것인지 모든 사람에게 밝혀 주게 하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이제는 하늘에 있는 권세와 권력들에게도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의 매우 다양한 지혜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1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14 이 때문에, 나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15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종족이 아버지에게서 이름을 받습니다.

16 아버지께서 당신의 풍성한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17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어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18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저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19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독서 주해(해제.역주 김영남 신부님)

14-15

종족으로 번역된 파트리아는 부성이 아니라 가족.부족.족속등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어떤 구체적인 그룹이나 공동체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17

믿음을 통하여”: 에페소서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고 믿음을 통해 확신속에 (하느님께)다가갈 수 있으며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그들 마음속에 머무신다. 여기 16-17절에는 기도의 궁극적 대상인 아버지와 신앙인들을 굳세게 해주시는 과 신앙인들의 마음속에 머무시는 그리스도의 상호작용이 분명히 언급된다.

 

그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머무시는삶은 바로 앞에서 말한 영을 통하여 가능하게 되며 든든하게 되는 그리스도인들의 내적인 삶의 다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로마 8.9-10에서는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라는 표현을 병렬하면서 이 표현을 사용한다.

 

여기서 사랑이란 19절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이 선사하시고 성령에 의해 매개되는 사랑을 뜻한다. 그러나 이 사랑은 형제자매 사랑으로 이어진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안에서의 하느님 사랑에 뿌리내리고 살 때 이웃 형제자매들도 그리스도인답게사랑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실존이란 바로 이런 사랑에 바탕한 삶이다.

 

18

모든 성도들과 함께”:18-19절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개인주의적 삶에서 생기지 않고, 다른 모든 신앙의 형제자매와 연결되어 있는 공동체 관계 곧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 생겨난다.

 

저자는 이런 단어들을 열거함으로써 하느님의 지혜와 그분 길들의 접근할 수 없는 성격을 표현하는데 이는 지혜문학적 방법이다. 이 네 차원의 주체가 행사되지 않지만, 문맥상 하느님이 계시하신 구원의 신비임을 알 수 있다. 18-19절은 넒게 해석하자면 1고린2.9와 비슷한 내용이다. “눈으로 본 적도 없고 귀로 들은 적도 없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떠오른 적도 없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마련해 주셨도다

 

19

여기서 말하는 지식이란 철학에서 말하는 파악이상의 종교적이고 신비적인 것으로서 사랑의 체험을 통해 깨닫게 되는 인식을 말하며 모든 이성적 인식을 초월한다. 그렇다고 이론적 지식을 무시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런 지식의 관계를 말한다. 1.17의 청원기도도 신앙생활에서 올바로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밝혀준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궁극적으로 드러난 자기희생의 사랑이다.

 

 

 

 

 

복음<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31-37

31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32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33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34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35 이는 직접 본 사람이 증언하는 것이므로 그의 증언은 참되다. 그리고 그는 여러분이 믿도록 자기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36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37 또 다른 성경 구절은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하고 말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서 주해 (해제.역주 이영헌 신부님)

31

해방절 준비일을 가리킨다. 그 다음날이 안식일이니 금요일에 해당한다.

해방절과 안식일이 겹치기 때문에 중요한 축일이라는 뜻이다.

유다인들의 규정에 의하면 기둥에 처형된 자의 시체는 축복의 땅을 더럽히지 않도록 당일 저녁이 되기 전에 반드시 치우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특히 안식일과 관련짓는다. 아마도 안식일로 인해 시체 치우는 일이 뒤로 늦추어질 가능성을 시사한 듯 하다. 유다인들은 형집행을 빨리 마무리짓고자 한 것이다. 저자는 유다인들이 예수의 시체를 십자가상에서 되도록 빨리 치워 버림으로써 유다인들의 왕으로서 공포되지 않기를 원했다고 말하고자 한 듯하다. 로마인들은 시민들의 범법행위를 막기 위해 처형된 자의 시체를 온종일 기둥에 그대로 두었다.

 

특히 대제관들을 가리킨다.

 

33

죽음을 앞당기기 위한 일종의 처형방법이었다,

다리를 꺾는 일도 예수를 중심으로 묘사된다.

 

34

그리스도인들의 전설에 의하면,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군인의 이름은 론니노다. 이 이름은 그리스어 롱케에서 연유된 라틴어 음역인 듯하다. 그리고 공관복음에서 언급된 백부장과 동일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예수의 죽음을 눈으로 보고서 다리를 꺾지 않는 대신 창으로 찔러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옆구리보다는 심장을 찌른 것이 더욱 이치에 맞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옆구리의 상처는 부활한 예수의 중요한 표적으로서 언급된다.

 

다양하게 해석되는 구절이다. 예수의 죽음을 구원적 의미로 보면서 제2의 아담인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는 교회 또는 성체와 세례 성사의 상징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이에비해 예수의 죽음에 대한 사실 확인과 보증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여기서도 두 견해로 나뉜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가현설에 대한 반박적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다. 다른 하나는 예수의 분명한 죽음에 대한 사실적 확증으로만 해석하는 견해다. 이 견해는 예수의 역사적 수난 보도 차원에서 볼 때 가장 타당하다.

 

그러나 목격 증인의 증언에 대한 진실성과 증언의 목적이나 의도가 언급된 대목과 함께 고려할 때 상징적이고 신학적 의미가 배제될 수는 없다. 하지만 예수의 수난사는 어떤 기적 보도와는 거리가 멀고 피와 물이 나온 것은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결과를 묘사한다. 즉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분명히 죽었다는 확증이 당시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 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은 피와 물이 절반씩 섞여 구성되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자연적 사건 과정으로서 예수의 수난사 보도 가운데 언급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36

32-34절의 내용에 직결된 표현이다.

성경 말씀의 두 인용구가 내용상 연결되어 있다. 예수의 다리를 꺾지 않았다는 첫째 인용과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다는 둘째 인용의 두 행위가 23-24절에서처럼 성경 말씀에 따라 입증된다. 첫인용구의 출처는 명확하지 않다. 자구대로 인용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흡사한 대목은 고통받는 의인에 대한 하느님의 보호와 해방적 앞에 관한 언급이다. 고통받는 의인에 관한 시편이 예수의 십자가상 처형과 죽음 보도에서 모두 인용되므로 첫 대목도 나름대로 타당성은 있다.

 

아마도 저자 이전의 전승 단계에서는 그런 타당성이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맥락에 따르면 둘째 대목이 더욱 타당하다고 본다. 저자는 예수 죽음의 시간을 해방절과 관련시켜 언급했고 또한 예수를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선포하기 때문이다. 즉 십자가상에 처형된 예수를 최종적 해방절의 희생양으로 이해하고자 성경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바오로도 예수 그리스도를 해방절의 양으로서 희생되었다고 말한다.

 

37

즈가 12.10이 자구대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론적으로 인용된다. 즉 즈가리야의 신비적 인물을 십자가상 예수와 관련지으면서 바라보리라는 말에 역점을 두고 설명한다. “그들구인들이나 유다인들을 특징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을 지정한다. 따라서 십자가상 예수를 바라보리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믿는 자에게는 구원적 의미요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을 자초한다는 의미다.

 

물론 요한복음 전체 맥락에서는 첫째 의미가 우선적이다. 둘째 의미로 그들이란 표현에서는 예수를 배척하고 십자가상에 처형토록 한 유다인들이 배제될 수 없다. 특히 구원적 의미의 맥락에서 예수의 피와 물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예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은 예수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과 비교될 수 있다. 생수의 강은 예수가 영광스럽게 된 후 곧 십자가상에서 죽은 후 믿는 자들이 받게 되는 을 가리킨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따라서 생수의 강은 죽은 예수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영광스럽게 된 예수는 믿는 자들에게 을 내보낸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는 예수의 구원적 죽음에 대한 표징이요,“은 성령과 생명에 대한 상징이라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두 가지 의미는 서로 결속된다. 따라서 세례와 성체성사적 의미와 교회론적 의미와는 직접적 관련이 없다고 하겠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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