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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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노신부님복음묵상(귀향(歸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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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7-06-27 ㅣ No.112890

 

스테파노신부님복음묵상

"귀향(歸鄕)"

 인간이란 존재 참 특별합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아

한없이 높이 위로

올라갈 수 있지만,

어떤 틀에 갇혀 있을 때,

지속적으로 자신을

성찰하지 않을 때,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아틀랜타 총영사 시노즈카

다카시의 ‘위안부는 사례 받은

매춘부’라는 발언을 들으면서,

졸속으로 처리된 지난 정부의

위안부 합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한 인간이 얼마나 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피해 당사자들인 우리 할머님들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바가 무엇일까요?

그까짓 알량한 피해보상금이

절대 아닐 것입니다.

 그분들이 가장 원하시는 바는

 진정성 있는 사과입니다.

그 사과는 공식적이어야 하고,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솔직해야 하고

인간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그런 비인간적인 행위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맹세가 뒤따라야 합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이미

지난 정부에서 한일양국이

정식으로 합의했는데 재협상이

무슨 말이냐?”고 말들을 합니다.

한 마디로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피해 당사자들이 아직도 엄연히

우리 가운데 생존해계시는데,

그분들의 목소리가 조금도

반영되지 않은 합의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습니까?

 혼이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졸속으로 도출해낸 합의는

재검토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우리 할머님들의 참혹했던

지난 세월을 소재로 한

 ‘귀향(歸鄕)’을 관람하러

 한 영화관에 들어갔었습니다.

 놀랍게도 당시

총 관객 숫자는 1명,

 저 혼자뿐이었습니다.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영화였습니다.

때로 너무 가슴이 아파 시선을

허공으로 향해야했습니다.

자신의 딸들조차 지켜내지

못했던 약소국 국민으로서의

비애와 서러움, 부끄러움과

노가 밀물처럼 밀려왔습니다.

요즘 잘 나가는 좀비 영화도 좋고

할리우드 영화도 좋지만,

더 많은 국민들이 이 영화를 보셨으면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 안 보신 분들을 위해 늦게라도

다시보기를 적극 추천합니다.

위안부 문제는 대한민국

역사이기에 ‘귀향’이라는 영화는

국가 주도로 제작되었어야함에도

불구하고 국민성금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시는 할머님들의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졌기에 실화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1943년, 천진난만한 열네 살

소녀가 영문도 모른 채

일본군 손에 체포되어

가족의 품을 떠납니다.

가족들을 향한 설명도 양해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만류하는 부모의 머리와

어깨 위로 무자비한 개머리판

폭력이 가해졌습니다.

끌려가면서 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딸을 바라보던

부모는 울부짖다 혼절합니다.

 군용트럭에서 군함으로,

군함에서 열차로, 그렇게

우리 꽃 같은 딸들은 중국으로,

동남아시아로, 남태평양 섬으로

짐짝처럼 실려 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꽃 같은 청춘과

순결이 처참하게 짓밟혔습니다.

 이윽고 지옥 같은

전쟁이 끝났습니다.

야속한 것은 시간이 지나가면서

다들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의 딸들은 지독한 트라우마와

깊은 상처, 치욕스런 기억을 안고

죽음과도 같은 불면의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했지만,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고 떠들고 즐겼습니다.

그렇게 무심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렇게 무심한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 생존 피해자들도 몇 분

남지 않았습니다.

 더 세월이 흐르기 전에

 일단락 짓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지난 정부에서 졸속 처리된

한일 양국의 합의는 전면적으로

재검토되고 수정될 필요가 있습니다.

 더 이상 인간의 탈을 쓰고 있지만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

아무리 말해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들, 끝끝내 자신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갈등하는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아주 명쾌한

대처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마태오복음 7장 6절)

 이 세상에서 거룩한 것은

어떤 것들입니까?

거룩함의 극치이신

하느님이 계십니다.

그분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또한 거룩하십니다.

그분을 기억하는 성찬례가 거룩합니다.

그분이 제정하신 거룩한 교회 전례와

성사가 거룩합니다.

또한 거룩한 것은 그분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입니다.

그분이 유언처럼 남겨주신

사랑의 가르침 역시 거룩합니다.

사랑, 일치 봉사, 우정, 친절, 환대,

배려, 용서가 거룩합니다.

 그런데 그런 거룩한 사랑의

가르침은 정상적인 인간에게만

통용되는 것입니다.

 끝까지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

끝까지 성찰하고 회심하지 않는 사람들,

끝까지 공동체의 평화와 일치를

파괴하는 이들은 이성을 상실한

사람들이기에, 즉 개나 돼지와 같기에

또 다른 방식의 대처가 필요합니다.

 위안부 문제의 진정한 해결을

위해서는 피해 당사자들을

향한 진심을 담은

사죄가 우선입니다.

자신들이 저지른 인류 최악의

범죄를 세상 앞에 솔직히

참회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다시는 그런 수치스런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요지의 자필

반성문과 범죄자들과 책임자들의

지장(指章)과 UN의

공증이 필요합니다.

 “당시 제가 당했던 일이 하도

기가 막히고 끔찍해 평생

가슴속에만 묻어두고 살아왔지만...

국민 모두가 과거를 잊은 채 일본에

매달리는 것을 보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습니다.

부디 제가 눈을 감기 전에

한을 꼭 좀 풀어 주세요.”

(故 김학순 할머님)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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