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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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부르심에 응답하라 - 반영억라파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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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숙 [moon6388] 쪽지 캡슐

2017-05-07 ㅣ No.111888

부활 4주일 (요한 10,1-10) 성소주일

 

     부르심에 응답하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은 성소 주일입니다. 우리를 신앙에로 이끌어 주신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해 생각하고 특별히 성직자, 수도자의 봉사직에 부름 받는 사람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고 후원하는 날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것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각자의 성소에 충실 할 수 있는 은총을 기원합니다.

 

한자성어 중에 염화미소라는 말이 있습니다. 꽃을 집어 들고 웃음을 띠다 란 뜻으로 ‘말도 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에로 전하는 일’을 이르는 말입니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는데 그들 앞에서 연꽃 한 송이를 집어 들어 말없이 약간 비틀어보였는데 가섭이란 제자만이 그 뜻을 깨닫고 빙긋이 웃었답니다. 다시 말하면 말하지 않아도 서로 이심전심으로 통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서로 통했으면 좋겠습니다. 더더욱 주님과도 소통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10,3).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10,27-28)고 하셨는데 진정 나는 그분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은 나를 알고 계신데 나는 그분의 목소리를 못 알아듣고 있으니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목소리, 그분의 말씀을 잘 알아들으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분의 목소리에 익숙해야 하고 그분의 행동에 익숙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내 목소리를 줄이고 침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언어는 침묵(토마스커킹신부)이기 때문입니다.

 

묵시록 3장20절의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려면 먼저 고요해야 합니다. 내 마음이 내적으로 외적으로 정돈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문을 두드리고 아무리 얘기를 하려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주 한적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식사를 할 겨를도 없이 바쁘신 가운데에서도 이른 새벽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셨습니다. 조용한 곳에 가셔서 하느님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세상살이에 바쁘고 지치고 힘이 들지만 그럴수록 한적한 곳을 찾아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가는 길이 그분 마음에 드는 길인지 알게 되고, 살게 되며 마침내 그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루 잠시 잠깐이라도 성경을 읽으면서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침묵 속에서 그 말씀대로 살 것을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감각적으로 들으려고 애쓰지 말고 먼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펴십시오. 사실 성경은 읽는 것이 아니라 그분은 말씀하시고 나는 듣는 것입니다. 그분의 음성을 듣고 싶으면 먼저 믿음으로 성경을 받아들이십시오. 삶의 위로와 희망, 지혜, 문제의 답, 그리고 구원이 거기에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십시오. 놀라운 힘과 능력의 손길, 열매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삶의 여정에는 많은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읽어줄 수 있는 폭 넓은 마음이 요구됩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알아들어야 하고 부자간에, 부부간에, 이웃 간에도 서로 통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알고 여러분도 저를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의 마음을 알고 존중하고 사랑하며 서로를 지켜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성소주일에 주님의 음성을 듣고 성직자, 수도자의 길에 나설 수 있는 젊은이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성소의 못자리라고 하였던 우리 본당의 잃었던 권위가 회복되기를 희망합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쓰일 성직자, 수도자가 여러분의 가정에서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시작해도 앞으로 10년 후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시작하면 결코 늦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으로 자녀를 봉헌하고 손자손녀를 봉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소의 동기는 아주 다양합니다. 별것 아닌 것을 통해서도 부르심을 주십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에도 신부님들께는 쌀밥을 대접하고 밥상에 김이 올라가고 달걀이 놓여 있었기에 그것을 보고 신부가 되고 싶은 꿈을 키운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시골 공소에서 지냈는데 어른들로부터 주일공소예절에 나오는 것으로 칭찬을 듣게 되어 더 열심히 하게 되었고 너는 나중에 신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공소회장님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함께 어울리던 회장님의 아들도 신부가 되었고, 한명은 수녀가 되었으며 하나는 결혼을 하여 자녀에게 성소의 꿈을 키워주고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젊은이들에게 특별성소의 꿈을 키워줄 수 있는 칭찬과 권고를 게을리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결혼성소도 좋고, 수도자, 성직자의 성소가 다 중요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녀에로 부르심 받는 것이 은총입니다. 특별 성소인 성직자, 수도자의 부름도 가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만큼 가정 안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 각 가정이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사는 은총을 입기를 기도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담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지난 몇 년간 그리스도인 성소의 두 가지 측면, 곧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자 “자신에서 벗어나라”는 부르심과 하느님의 부르심이 생겨나고 자라며 표현되는 특별한 자리인 교회 공동체의 중요성에 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 저는 제54차 성소 주일을 맞이하여 그리스도인의 부르심의 선교적 차원에 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느님의 목소리에 이끌려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이들은 복음화와 사랑의 봉사를 통하여 자기 형제자매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자 하는 주체할 수 없는 갈망을 자신 안에서 바로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선교사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제자인 우리는 개인적 위로를 위하여 하느님 사랑의 선물을 받은 것이 아니고, 또한 우리 자신이나 사익만을 추구하고자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하느님께 사랑받는다는 것을 느끼는 기쁨으로 어루만져져 변화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만 이러한 경험을 해서는 안 됩니다. “제자 공동체의 생활을 가득 채우는 복음의 기쁨은 선교의 기쁨”(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21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교를 위한 노력은 그리스도인 삶에 장식품으로 부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 그 자체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관계를 맺게 되면 주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이며 그분 사랑을 보여 주는 증거자로 이 세상에 파견됩니다.

 

우리가 때때로 우리 안에 있는 수많은 나약함을 체험하고 때로는 좌절을 느낄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고개를 들어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무능하다는 생각에 짓눌리거나 비관주의에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비관주의는 우리를 지치고 단조로운 삶의 소극적 방관자로 만들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몸소 우리의 더러운 입술을 깨끗이 해 주러 오셔서 우리가 선교에 맞갖은 사람이 되도록 해 주십니다.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 그때에 나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내가 아뢰었다”(이사 6,7-8).

 

선교하는 모든 제자는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좋은 일을 시작하도록 명령하시는 하느님의 이러한 목소리를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듣습니다(사도 10,38 참조).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성사의 힘으로 크리스토포로와 같은 이, 곧 모든 형제자매에게 그리스도를 전달하는 이가 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프란치스코, 2016년 1월 30일 희년 알현 교리 교육 참조). 특히 이는 특별하게 봉헌 생활에 부름 받은 이들과 사제들의 경우에 해당되며, 이들은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라고 기꺼이 응답한 이들입니다. 이들은 새로운 선교 열정으로 성당이라는 성역을 벗어나 인류를 위하여 하느님의 온유함이 넘치게 하도록 부르심을 받습니다(프란치스코, 2016년 3월 24일 성유 축성 미사 강론 참조). 교회는 믿을 만하고 흔들림 없는 사제를 필요로 합니다. 이들은 참된 보화를 발견하여 기쁨에 넘쳐 모든 이에게 가서 이 보화를 알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습니다(마태 13,44 참조).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선교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하면 분명 많은 질문들이 나오게 됩니다. 복음의 선교사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누가 우리에게 선포하는 힘과 용기를 줍니까? 선교에 힘을 실어 주는 복음의 논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복음서에 나오는 다음 세 가지 장면을 생각하면서 이러한 질문들의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나자렛의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시작하신 장면(루카 4,16-30 참조),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시는 장면(루카 24,13-35 참조), 끝으로 씨앗의 비유에 관한 이야기(마르 4,26-27 참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시고 파견되신다. 선교하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나자렛의 회당에서 그 사명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이는 우리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곧,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우리 형제자매에게 가서 말씀을 선포하고 그들을 위한 구원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길에 함께하십니다. 인간적인 마음에서 솟아나는 의문과 현실에서 나타나는 도전 앞에서 우리는 당황하고 무기력하고 희망이 없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단지 비현실적인 이상이나 적어도 우리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현실로 여겨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함께 걸어가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 우리는 확신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루카 24,13-15 참조). 이 복음서 장면에서, 우리는 말씀 전례와 빵을 쪼개는 전례에 앞서는 참된 길의 전례를 발견합니다. 이 길의 전례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내딛는 모든 발걸음에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이 두 제자들은 십자가의 치욕적 사건에 상처받아 낙심한 채 집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 안에는 깨어진 희망과 실현되지 못한 꿈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 안에서 복음의 기쁨이 있던 자리를 슬픔이 꿰차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단죄하지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걸어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벽을 쌓는 대신에 돌파구를 마련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낙담에 서서히 변화를 가져오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이 타오르게 하시며, 말씀을 하시고 빵을 떼어 주시자 그들의 눈이 열립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단독으로 선교의 사명을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치고 오해를 받는 가운데에서도 다음과 같은 것을 깨닫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그와 함께 걸으시고 이야기하시고 숨 쉬시고 함께 일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선교 활동 한가운데에서 자신과 함께 살아가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복음의 기쁨?, 266항).

 

예수님께서는 씨앗이 자라도록 하십니다. 끝으로, 복음에서 선포 방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때로 아무리 좋은 의도를 지니고 있어도 우리는 권력에 대한 욕심이나 개종의 강요나 편협한 광신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권력과 성공의 우상과 제도에 대한 과도한 염려와, 봉사의 정신보다는 승리주의에서 발생하는 불안을 거부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씨앗은 아무리 작고 보이지 않고 때로는 하찮아 보여도 하느님의 지치시지 않는 활동으로 조용히 계속해서 자랍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26-27). 그래서 이는 우리가 자신감을 가져야 하는 첫째 이유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기대를 뛰어넘어 당신의 관대하심으로 계속해서 우리를 놀라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적 계산을 뛰어넘어 우리의 노력이 결실을 맺도록 하십니다.

 

복음에서 얻은 이러한 자신감으로 우리는 선교의 기본이 되는 성령의 조용한 활동에 열려 있을 수 있습니다. 지속적인 관상 기도 없이는 성소나 그리스도인의 선교를 촉진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느님과 만나게 되는 특별한 자리인 성체 조배 안에서 주님과 인격적 관계를 돈독히 하여 성장하여야 합니다.

 

저는 진심으로 주님과 이러한 깊은 우정을 맺기를 권유하며 무엇보다도 먼저 사제직과 봉헌 생활에 대한 새 성소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간청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복음에 봉사하는 삶을 사는 사목자들의 안내를 받아야 합니다. 저는 본당 공동체와 단체 그리고 교회에 있는 많은 기도 단체에게 낙담하지 말고 주님께서 당신의 추수할 밭에 일꾼을 보내 주시기를 계속해서 기도하기를 부탁드립니다. 주님께서 복음에 매료되고 형제자매들과 가까이 지내며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의 징표로서 살아가는 사제를 보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또한 오늘날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는 열정을 다시 얻을 수 있으며 특히 젊은이들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을 선택하도록 그들에게 힘을 실어 줄 수가 있습니다. 신앙을 무기력한 것이나 단지 이행하여야 하는 의무로 축소하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지만, 우리 젊은이들은 지속적으로 끌어당기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분의 말씀과 행동에 자극을 받으며 그분께서 온전한 인간으로 살아가시면서 자신을 사랑으로 기꺼이 내어 주시며 실현하신 그 이상을 소중히 여기고자 합니다.

 

우리 구세주의 어머니이신 거룩하신 성모님께서는 이 이상을 받아들이시고 당신의 젊음과 열정을 하느님의 손에 맡기시는 용기를 지니고 계셨습니다. 성모님의 전구를 통하여 우리가 성모님처럼 열린 마음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제가 있지 않습니까?”라고 기꺼이 응답하며 기쁘게 길을 떠나(루카 1,39 참조) 온 세상에 하느님을 선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티칸에서
2016년 11월 27일
대림 제1주일

 

프란치스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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