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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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여!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 최강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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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규 [vegabond] 쪽지 캡슐

2010-05-01 ㅣ No.55305


 
 
 

사제여!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중국 내륙 지방의 도시 스자좡은 높은 온도와 습도로 인해 긴 여름을 보내기가 쉽지 않은 도시로 꽤 유명하다고 한다. 아직 한 여름 무더위를 느끼기에는 이르다는 주변 친구들의 귀띔이 있는데도 한낮의 온도는 35도를 훌쩍 넘어서기가 일쑤인 것을 보면 긴 여름의 무더위로 유명한 곳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추위는 잘 타지 않는데 비해 유독 더위에 약한 나에게는 아주 적합한(?) 선교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몸뚱이를 좀 더 많이 움직이며 살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 어느 토요일 오전,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집 주변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이 곳, 저 곳을 돌아 마침내 도착한 곳은 허베이 사범대학의 운동장. 운동자에는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축구와 배드민턴을 즐기고 있었다.


    날렵한 몸매를 자랑하며 짧은 반바지를 입은 젊은 대학생들 몇몇은 운동장 트랙을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내가 그들 사이에 끼어서 달리기를 시작한지 30분이나 됐을까? 이미 꽤 높이 올라간 온도 때문에 내 몸은 그야말로 땀으로 범벅이 되고 숨은 헐떡이다 못해 아예 ‘끙끙’ 앓는 신음소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몹쓸 놈의 자존심이 뭔지, 금방 죽을 것 같았는데도 여전히 내 다리는 바르셀로나 평원을 달리던 황영조 선수의 그것처럼 멋진 각도로 앞을 향해 뻗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못가서 묘하게 시작된 그 경쟁의 현장을 나는 슬그머니 빠져나오고 말았다. 결코 체력이 딸려서 못 뛰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발목이 이상이 생겨서 못 뛰게 되었다는 인상을 주는 동작을 잊지 않으면서......


    물을 한 통 사서 마시면서 터벅터벅 걸어서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 내 시선을 사로잡는 한 가지가 있었다. 집 근처 양 꼬치 집에서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웃통을 벗어젖힌 채 시원한 맥주와 양 꼬치를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 맞다! 이렇게 땀을 많이 흘려서 갈증이 최고에 다다랐을 때는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을 능가하는 음료가 이 지구상에는 없다는 것이 대부분의 맥주 애호가들의 증언이다.


    때마침 점심때도 됐는데 집에 무슨 특별한 음식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나 역시 시원한 맥주 한 모금에 양 꼬치로 점심을 때우기로 결정하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리라고 해봐야 나무 그늘 밑에 책상과 의자 몇 개 놓고 그 주위를 노란 줄로 엮어 영역 표시를 해 놓은 것이 전부다. 내가 주문한 것은 맥주 한 병과 양 꼬치 열 개. 약간 누릿한 냄새가 특징인 양고기 꼬치가 막 목을 타고 식도를 넘어 가면서 남긴 약간의 기름기를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이 뒤이어 넘어가면서 깨끗이 씻어주는 그 짜릿한 청량감에 나는 혼자서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한 사내가 눈에 띄었다. 아직 어린 티를 채 벗지 못한 그는 나무 그늘 밑에 놓인 책상들 주위로 경계를 쳐 놓은 줄 바깥쪽에 서서 웃통을 벗어젖힌 채 맥주와 양 꼬치의 향연을 벌이고 있는 한 무리의 청년들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내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청년들의 수다에 정신이 빠져 있었다. 갑자기 줄 안의 세상에 앉아 있는 내 자리가 너무 불편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 친구와 양 꼬치를 나눠 먹지 않으면 더 이상 그 자리를 즐길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나는 종업원을 불러 양 꼬치 열 개를 더 주문했다. 그 친구를 불러 자리에 함께 앉아 나눠 먹는 것 보다는 비닐봉지에 든 꼬치를 건네주는 편이 그 친구 편에서는 훨씬 편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런 느낌이 이끄는 대로 양 꼬치가 든 비닐봉지를 들고 줄 밖으로 나가서 아무 말 없이 그 젊은 친구의 두 손 앞에 내밀었다.


    내 눈빛과 그의 눈빛이 교차하는 아주 짧은 순간, 그는 양 꼬치가 든 비닐봉투를 낚아채듯 거칠게 받아들고는 역시 아무 말 없이 길 건너 저편으로 금세 사라졌다. 그것은 너무나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웃통을 벗고 앉아 있던 젊은 무리들이나 종업원들조차도 알아채지 못했던 것 같다.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앉은 나는 그가 서 있던 노란 줄밖의 세상과 내가 나무 그늘 밑에 앉아서 양 꼬치를 먹고 있는 줄 안의 세상이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아니, 이것들은 서로 다른 것이라고 느껴졌다. 양 꼬치 하나의 값이라고 해봐야 여기 돈으로 일원, 한화로 이백 원이 채 안 되는 돈이지만 가난한 줄밖의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것조차도 없어서 이 세상에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 서서 침만 삼키고 서 있어야 했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보다 훨씬 복잡한 줄들로 경계가 나뉘어져 있다. 옛날 프랑스 혁명 이전에도 ‘성 안에 사는 사람, bourgeois’들과 ‘성 밖에 사는 사람’들은 성을 경계로 사는 곳이 나눠지면서 그들의 신분이 결정되곤 했는데, 이러한 신분의 구분은 오늘날에도 여러 가지 ‘보이지 않는 줄’에 의해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신분의 구분은 비단 빈부의 차이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성별, 학벌, 피부색, 지역 등의 차별에 심지어는 어떤 형태의 불공평한 차별을 극복하는데 힘을 쏟아야 할 종교까지도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또 하나의 차별의 줄을 긋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자로서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은 그들에게 최대의 봉사를 아끼지 말아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교회의 창시 때부터 지니고 있는 본래적 사명이었고 주님께서 우리들을 성직자와 수도자로서의 삶에 초대해 주신 이유이다. 그 본래적 사명의 첨병 역할을 하면서 살아가야만 하는 한 선교사제가 줄 안에 앉아서 양 꼬치에 맥주를 즐기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사제여! 너는 어디에 있는가?”


    이브 꽁가르 신부가 그의 저서 『봉사하는 교회, 가난한 교회가 되기 위하여』에서 내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인지를 소리치고 있었다. “사제여! 가난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며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가 아니고서는 결국 교회의 존재 이유(raison d'etre)를 찾기 힘들다”. 또한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금세기 최고의 휴머니스트라고 불리는 피에르 신부는 그의 저서 『단순한 기쁨』에서 오늘날 “인류와 교회가 겪고 있는 불행의 일부는, 부유한 신자들이 성직자들에게 자신들과 비슷한 생활조건을 보장해줌으로써 복음서의 어떤 글들이 절대로 자신들에게 설교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술수에서 비롯” 된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칼 라너는 “짐작컨대 교회는 자기의 의무인 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의 가난을 통하여 가난을 제거하는 투쟁에 있어서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스스로 가난해지려는 일에 있어서 무능하기 때문이다”라며 줄 속에 앉아 있는 내게 소리치고 있었다.


    사실 우리들의 스승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스스로가 가난하게 태어나시고 가난하게 살아가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가난한 삶을 단적으로 이렇게 표현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루가 9, 58) 주님은 안정과 정착의 삶을 포기하시고 가난한 나그네로 살아가신 것이다.


    또한 주님은 자신 만이 아니라 자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것을 요구하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마태 19,21)라고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은 수천 년의 시간을 뛰어 넘어 가난한 삶에 대한 감각이 점점 흐릿해져가는 한 부자 선교사제의 귀에 그렇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곳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어떤 형제, 자매들의 눈에는 결코 가난한 자로 보이기 어렵고, 가난한 이웃을 주님처럼 섬기겠다는 의식조차 희미해진 내가 줄 안에 앉아서 수고도 없이 양 꼬치에 시원한 맥주를 즐기면서 교회와 사제와 그 밖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으로서 ‘줄 밖에 서 있는 자들에 대한 배려’를 이야기 하는 것이 또 하나의 위선으로 비춰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긴다.


    하지만 내 삶의 한 치부를 드러내 보이는 듯한 몹시도 부끄러운 체험을 친구들과 나누면서 다시 한 번 ‘첫 마음’으로 돌아갈 것을 겸손한 마음으로 다짐해 본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눈빛이 교환되는 순간 아무 말 없이 내 손에 들린 양 꼬치를 낚아채듯 받아들고 사라졌던 그 청년이 이제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내게 묻고 있다. “사제여!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우리들 주변 사방에서 줄 밖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우리에게 소리친다. "신앙인들이여! 당신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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