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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요한 6: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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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06-19 ㅣ No.121267

 

 

 

공동번역성서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 그리스도

 

(요한 6:16~21)

16 그 날 저녁때 제자들은 호숫가로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호수 저편에 있는 가파르나움으로 저어 갔다. 예수께서는 어둠이 이미 짙어졌는데도 그들에게 돌아오지 않으셨다. 18 거센 바람이 불고 바다 물결은 사나와졌다. 19 그런데 그들이 배를 저어 십여 리쯤 갔을 때 예수깨서 물 위를 걸어서 배 있는 쪽으로 다가 오셨다. 이 광경을 본 제자들은 겁에 질렸다. 20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 하시자 21 제자들은 예수를 배 안에 모셔 들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배는 어느새 그들의 목적지에 가 닿았다.

  [펌] 물위를 걸으신 예수님

저녁 무렵에 배를 타고 떠난 제자들이 풍랑 속에서 새벽 세시가 넘도록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셨고 제자들은 그렇게 물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몹시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얼른 주님을 자신들의 배로 영접을 했습니다. 그 러자 그 배가 즉시 가려던 땅에 도달을 했다고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는 이러한 그림을 통하여 주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우리가 금방 세상의 풍랑 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에만 초점을 두고 바라봅니다. 어떻게 해서 그 풍랑이 이는 바다 속에 빠지지 않고 그 풍랑이 이는 바다를 밟고 서게 되는지에 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감사가 없는 것이고 감사가 없는 삶에서 여전한 불순종이 쏟아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어떠한 방법으로 우리를 그 저주와 풍랑의 바다 위로 끌어올려 방주처럼 물위를 걷게 하시나요? 풍랑이 이는 바다는 우리의 죄로 말미암게 되는 하느님의 심판과 저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모든 죄인은 자신의 인생을 통해 그 저주의 바다 속에서 헤매다가 영원히 그 저주의 바다 속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건 죄인들의 필연적인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라는 구원받은 죄인들은 어떻게 그 죄로 말미암은 저주의 바다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지요?

하느님은 공의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죄를 그냥 무작정 용서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물위에 뜨게 된 것입니까? 너무 쉬운 질문인가요?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빠져 죽어야 할 저주의 바다 속에 우리 주님께서 대신 빠져 죽으심으로 우리가 그 저주의 바다 위를 걷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이 예수님의 익사(溺死)로 연결이 되는지 보세요.

50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 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 (루가12:50)

주님께서 당신이 지실 십자가를 가리켜 받을 세례라고 표현을 하십니다. 여기서 세례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단어는 밥티조입 니다. ‘밥티조물에 잠기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침례교에서는 침례를 줄때 물에 푹 넣었다가 빼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세례의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사건을 가리켜 받을 세례라고 표현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빠져 죽어야 할 저주의 물, 풍랑 속으로 푹 빠져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그 풍랑 속에서 죽으셨습니다. 바로 저주의 물을 맞고 죽는 방주의 모습입니다. 방주는 저주의 물에 맞아 죽고 그 안에 들어있는 노아의 여덟 식구가 살아난 것을 기억하시지요? 그렇게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물위를 걸어, 가려 던 땅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 이야기가 요나서에 명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가리키고 있는, 당신께서 행하신 모든 표적들을 가리켜 요나의 표적이라 하시지요?

29 군중이 계속 모여 들고 있었다. 그 때 예수께서는 '이 세대가 왜 이렇게도 악할까!' 하고 탄식하시며 '이 세대가 기적을 구하지만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 줄 것이 없다. 30 니느웨 사람들에게 요나의 사건이 기적이 된 것처럼 이 세대 사람들에게 사람의 아들도 기적의 표가 될 것이다.(루가11:29-30)

여기 보시면 요나와 예수님은 같은 표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8 그 때에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 몇이 예수께 '선생님, 우리에게 기적을 보여 주셨으면 합니다' 하고 말하자 39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악하고 절개 없는 이 세대가 기적을 요구하지만 예언자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 줄 것이 없다. 40 요나가 큰 바다 괴물의 뱃속에서 삼 주야를 지냈던 것같이 사람의 아들도 땅 속에서 삼 주야를 보낼 것이다.(마태12; 38-40)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안다/요나의 표징을 예언하시다(마태복음 12장 33~42)

예수님은 자신도 요나가 큰바다괴물.스올(음부)이라고 표현을 한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밤낮을 머무르며 지옥을 경험한 것처럼 당신께서도 사흘 밤낮을 땅 속에서 지옥을 경험하게 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나가 풍랑 속에서 겪은 일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예수님의 지옥 경험 사건과 부활 사건을 잘 이해할 수 있겠지요?

요나서 111절 이하를 보면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르싯으로 가려고 얻어 타고 가던 배가 폭풍을 만나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죽을 판입니다. 그 때 요나는 자신을 바다 속으로 던지라고 합니다. 선원들이 요나를 바다속으로 던지자 바다가 이내 잔잔해 졌습니다. 예수를 상징하는 요나가 물속에 빠지는 것입니다. 요나가 물속에 빠짐으로 선원들이 살아납니다. 그게 바로 요나의 표적이고 그 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빠져 죽어야 할 풍랑 속에 빠져 죽으신 것입니다. 요나가 물에 빠져 물고기 뱃속인 스올로 들어감으로 해서 죽어야 할 이방 선원들이 폭풍 속에서 살아난 것처럼 주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그 저주의 풍랑 속에 빠져 죽으심으로 우리는 물위에 둥둥 떠서, 다른 말로 물위를 걸어서 우리가 가고자 하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가 우리 인생의 배로 주님을 영접하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닌 예수님의 익사(溺死)로 말미암은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여 우리 생명의 은인이신 예수님이 이끄시는 대로 살기를 마다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에 대한 감사에서 우리의 자발적인 순종이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풍랑이 잔잔해 진다고 하고 홍수도 피할 수 있다고 하는데 내 삶에 일어나는 이 풍랑은 무엇인가?’요한복음의 표현대로 하면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배를 띄운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게 되는가?’ 이런 질문이 들지 않으세요 물론 궁극적으로 우리 성도들에게서 그 풍랑은 모두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 곳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있습니다. 풍랑이 이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이 풍랑이 이는 세상에서 풍랑이 사라진 하늘나라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발휘해야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그 나라가 아직 우리 눈에 가시적으로 닥치진 않았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모든 풍랑이 사라진 하느님 나라의 백성처럼 희망으로 그 풍랑을 이겨내며 살아야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한 희망과 확신을 믿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걸 보고 싶으신 것입니다. 내 아들이, 내 딸이 정말 믿음이 있는 자인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풍랑 속에서 정말 그 풍랑을 밟고 일어서는지 지켜보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관심은 오직 하나, 내 자녀들의 믿음입니다. 왜요? 그 믿음이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인데 얼토당토한 사람들이 자기 들이 믿음이 있다고 헛소리들을 해 대니까 하느님께서 믿음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하고 세상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그리고 당신의 자녀들을 확인하시기 위해 당신의 자녀들의 삶속에 그 믿음을 발휘할 수 있는 사건들을, 폭풍들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1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 2 옛 사람들도 이 믿음으로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3 우리는 믿음이 있으므로 이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 곧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는 것을 압니다. (히브11:1-3)

17 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을 보여 주십니다.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성서에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사람은 살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로마1:17)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실체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살아나서 또 그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에 눈에 보이는 평정과 평안이 아닌 폭풍과 같은 시련이 몰아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발휘하라고. 하느님의 요구는 그 속에서 폭풍이 가라앉은 하늘을 살아내는 믿음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환경은 몰아치는 폭풍 같은 것이지만 하느님께서 다 두려워 말라하고 말씀하셨기에, 그리고 그 약속의 땅에 반드시 나를 데리고 들어가신다고 약속하셨기에 그 까짓 거하면서 믿음으로 물위를 걷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에게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믿음이 있는가를 확인하시기 위해 하느님은 우리의 삶 속에 이러한 풍랑들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발 한발 믿음을 발휘하며 가다보면 언젠가 이 가시적인 모든 풍랑들이 다 사라지고 우리는 영원한 행복과 안식과 기쁨만 있는 그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

1 그 뒤에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묵시21:1)

보세요. 그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이제 저주의 바다, 심판의 폭풍이 없습니다. 그게 예수믿는 우리의 실존입니다. 그 땅을 바라보며 이 땅의 풍랑을 잘 이겨내십시오. 그게 믿음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주신 믿음이 없는 자들은 폭풍이 이는 바다에서 절대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5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난이 많은 것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위로도 많습니다. 6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며 또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여러분이 우리가 겪는 것과 똑같은 환난을 당할 때에 그것을 견디어 냄으로써 위로를 맛 볼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7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같이 당하고 있으니 그의 위로도 같이 받을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여러분을 믿는 우리의 마음이 든든합니다. 8 형제 여러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알리려고 합니다. 그 환난은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견디어 낼 수 없을이만큼 심해서 마침내 우리는 살 희망조차 잃게 되었습니다. 9그러나 이렇게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생각이 들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지 않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느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고후 1:5-9)

보시다시피 성도의 삶에 닥치는 풍랑은 다른 이들을 위로하기 위한 방편으로 주어지기도 하고 우리를 하느님만 의지하는 자로 만드시기 위한 하느님의 도구로도 쓰인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믿음이 있기에 우리는 폭풍 속에서도 그 폭풍에 허우적대지 않고 믿음으로 그 폭풍을 밟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그러한 이들은 다시 풍랑의 바다가 있지 않은 영원한 평화의 나라로 이제 곧 들어가게 될것입니다. 그러나 그렇 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실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을 받지 못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눈에 보이는 것들을 하느님께 구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관철시켜 이 땅에서의 풍랑을 없애달라고 조르는 가짜 믿음을 가진 자들은 결국 다시는 헤어날 수 없는 무서운 불바다 속으로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8 그러나 비겁한 자와 믿음이 없는 자와 흉측스러운 자와 살인자와 간음한 자와 마술장이와 우상숭배자와 모든 거짓말장이들이 차지할 곳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바다뿐이다. 이것이 둘째 죽음이다.' (묵시21:8)

인생의 풍랑은 영원한 불바다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한 하느님의 배려일 때가 훨씬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인생의 풍랑을 잘 견뎌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이러한 풍랑은 여지없이 우리에게 덮쳐옵니다. 원수같은 인간들이 나를 공격하기도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기도하고 억울한 미움을 받기도 합니다. 그 때 우린 그 풍랑을 피해서 도망 다니면 안 됩니다. 그 풍랑 속에서 믿음을 발휘해야 합니다. 이겨내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삶을 바라보면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빠져 나갈 길이 없다하고 외치고 계신 이들이 있을것입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가 스스로 자신의 행복을 찾아 갈 수 있는 길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만이 길입니다. 주님 이외에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만일에 돈이 우리의 행복의 길이 된다면 주님은 내가 곧 길이라고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돈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어야지요. 명예가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면 주님은 명예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소원성취가 행복의 길이 된다면 주님은 너희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곧 길이다라 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 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오직 주님만이 생명에 이르는 길이요,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면 이 세상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성도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모두가 낭떠러지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지금 낭떠러지로 밀고 계신 것 같은 느낌이 드십니까? , 우린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라는 유일한 길을 찾아 올라오라고, 오직 그 길로만 들어서라고 주님은 우릴 낭떠러지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라는 길을 찾으십시오. 우리가 예수라는 유일한 길을 찾아 올바로 생명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세상이 제시한 수많은 다른 길들을 하느님께서 제거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다른 길로 접어들지 않고 예수라는 길을 올곧게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생에 낭떠러지와 같은 사건들이, 풍랑들이 간혹 경험이 되거든 , 하느님께서 예수라는 길만을 붙들라고 이렇게 낭떠러지 같은 상황들을 내게 허락하시는구나.’하고 감사하십시오. 성도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전부 합력하여 우리의 거룩을 이루는 하느님의 도구들인 것입니다. 좌절하지 마세요. 이겨내십시오.

왜 여러분의 삶 속에 그렇게 고통스러운 홍수와 풍랑이 일고 있는지 이제 아시겠지요? 예수를 붙드세요. 세상에서 이름 떨치고, 세상에서 자랑스러운 자가 되려하지 마세요. 눈에 보이는 행복, 잔잔한 바다만을 소원하시면 안됩니다. 그러다 보면 정작 붙들어야 할 예수를 놓치는 수가 있습니다.

15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옳은 체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마음보를 다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떠받들리는 것이 하느님께는 가증스럽게 보이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루가16:15)

 

그러므로 풍랑 속에서도 믿음을 발휘하고 계신 여러분은 지금 잘 가고 계신 것입니다. 힘내십시오. 우리 인생의 배의 방향키를 잡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좇아가세요. 풍랑 속에서도 우리를 도우시는 우리 주님을 의지하세요.

정말 주님은 우리 인생의 풍랑 속에서 우리를 지키고 계신가를 성경을 통해 확인하고 마치겠습니다. 제자들은 분명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다가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45 그 뒤에 곧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건너편 베싸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 동안 혼자서 군중을 돌려 보내셨다. (마르6;45)

 

여기 보시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앞서 가게 하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조금 이상하지요? 구약 성경에 보면 원래 하느님은 백성들 앞서 행하시며 그들을 위해 싸우시는 분으로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주님께서 뒤로 가시고 백성들을 앞서게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의 행보를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48 제자들은 마침 역풍을 만나 배를 젓느라고 몹시 애를 쓰고 있었다. 이것을 보신 예수께서는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 쪽으로 오시다가 그들 곁을 지나쳐 가시려고 하였다. 그것은 새벽 네시쯤이었다 (마르6:48)

 

우리가 이 요한복음을 창세기의 창조사건과 출애굽기의 출애굽 사건과 비교하고 대조하며 풀어가고 있지요?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도 광야의 만나 사건으로 풀어서 해석을 해 보았고 이 물위를 걷는 사건도 요르단 동쪽에서 서쪽으로 들어가는 홍해를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출애굽 때의 홍해 渡河 사건으로 돌아가서 이 그림을 한 번 찾아보는 것은 어떠세요? 구약에도 오늘 본문의 내용과 똑같은 내용의 그림이 있습니다.

14 야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워 주실 터이니 모두들 진정하여라.' 15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나에게 부르짖기만 하느냐?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진하라고 명령하여라. 19 이스라엘을 앞서 인도하던 하느님의 천사가 뒤로 돌아 가 호위하자 그들 앞에 서 있던 구름기둥도 뒤로 돌아 가 20 에집트의 진과 이스라엘의 진 사이에 섰다. 그러자 구름 때문에 캄캄해져서 서로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밤을 새웠다. (출애14:14-15, 19-20)

 

홍해를 건너기 바로 전에 앞서 행하며 이스라엘을 이끄시던 야훼의 사자,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뒤로 물러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앞세우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지금 요르단 동쪽에서 요르단 서쪽으로 건너가고 있는 제자들 뒤로 물러가셔서 그들을 지켜보시는 주님과 동일 한 그림이 나오지요? 그런데 지금 읽은 출애굽기에 보면 하느님께서 뒤로 물러가신 이유가 나옵니다. 야훼께서 하느님의 백성들을 좇는 자들과 싸우시기 위함이랍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오세요. 그렇다면 지금 주님은 제자들을 앞서 보내시고 제자들을 위해 싸우신다는 말이 됩니다.

그 싸움이 어떤 싸움이었지요? 하느님이 저주의 바다인 홍해에 빠져 죽으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살려내시는 싸움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세상의 공격에, 세상의 폭풍 속에 우리 주님이 빠져 죽으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살려내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조금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밤이 맞도록 폭풍과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주님이 그들을 위해 싸우고 계시는 현실이 왜 이렇게 보여 집니까? 분명 우리는 출애굽기의 홍해를 건넌 사건을 통해 주님이 뒤로 물러가시고 백성들이 앞서 홍해를 건너는 사건이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싸우시는 장면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제자들이 건너는 바다 는 잔잔한 순풍의 바다여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거의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지금 무엇과 싸우고 계신 것입니까? 적어도 제자들이 당하고 있는 폭풍의 바다와 싸우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문제와 싸우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싸움은 우리의 삶의 문제나 해결해 주는 그런 유치한 싸움이 아닙니다. 그럼 어떤 싸움인가?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오늘 사건 앞서 일어났던 어떤 사건으로 돌아가 봐야 합니다. 풍랑의 바다 이전에 제자들이 또 한 번의 풍랑이 이는 바다를 건넌 적이 있었습니다.

  물위를 걸으신 예수

35 그 날 저녁이 되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편으로 건너 가자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예수께서 타고 계신 배를 저어가자 다른 배들도 함께 따라 갔다. 37 그런데 마침 거센 바람이 일더니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뱃고물을 베개삼아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선생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돌보시지 않습니까? 하고 부르짖었다. 39 예수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를 향하여 고요하고 잠잠해져라! 하고 호령하시자 바람은 그치고 바다는 아주 잔잔해졌다. 40 그렇게 하시고 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왜 그렇게들 겁이 많으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책망하셨다. 41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대체 이분이 누구인데 바람과 바다까지 복종할까? 하며 서로 수군거렸다. (마르4:35~41)

잘 보시면 이때는 제자들이 풍랑이 이는 바다를 심히 두려워하며 건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어찌하여 너희 들이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는 질책을 듣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제 두 번째 풍랑 속에서의 제자들이 풍랑과 사투를 벌이면서도 풍랑을 두려워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이 나타나시자 주님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19 그런데 그들이 배를 저어 십여 리쯤 갔을 때 예수깨서 물 위를 걸어서 배 있는 쪽으로 다가 오셨다. 이 광경을 본 제자들은 겁에 질렸다. 20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 하시자 (요한6:19-20)

 

그 말은 제자들은 이미 풍랑 정도에는 두려움을 가지지 않을 만큼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자라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까 주님은 폭풍이 이는 바다를 꾸짖으시는 일로 단순히 제자들에게 당신의 능력을 자랑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불신앙과 싸우고 계셨 던 것입니다. 주님은 폭풍이 이는 바다에서 폭풍과 싸우신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불신앙과 제자들의 죄와 제자들의 불의함과 제자들 의 미성숙함과 싸우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홍해 바다에서 하느님의 싸움의 대상은 애굽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셔서 홍해를 건너게 하시는 그 사건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에게 당신을 계시하시고 당신의 백성들로 성숙시켜 가시는 것입니다. 역시 당신의 백성들의 불신앙과 불순종과 미성숙함과 싸우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 제자들은 폭풍이 이는 바다에서 사투를 벌이면서도 폭풍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성숙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성경은 제자들이 자기들에게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두려워했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건 단순히 주님이 유령인가 하여 놀란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은 제자들이 이러한 풍랑 속에 주님이 함께 계셨다는 것을 전혀 기대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자기들이 풍랑 속에서 싸우는 중에도 주님이 함께 계셨다는 것에 놀란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열심히 싸워서 폭풍을 견디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 폭풍 속에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본문 20절에 나오는 두려워하다라는 단어는 프호베오입니다. 그 단어는 단순히 무서워하다라는 뜻이 아니라 경외하다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무서워 떤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함께 한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풍랑 속에서의 사투가 주님의 무관심 속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주님이 함께 하시면서 자기들의 믿음의 성숙을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고 즉시 기쁘게 영접을 한 것입니다. 조금 지나친 비약 같으세요?

20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 하시자 21제자들은 예수를 배 안에 모셔 들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배는 어느새 그들의 목적지에 가 닿았다. (요한6:20-21)

 

20절에서 쓰인나다라는 단어는에고 에이미나는 하느님이다라는 뜻이라 했지요? 제자들은 그 말을 듣자 이 모든 풍랑의 사건들이 자신들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작정과 계획 속에 들어 있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쁘게 주님을 배로 모셨고 그 배가 가려던 땅에 이르렀다, 다른 말로 그 사건이 목적하던 바가 이루어졌다는 어구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의 다섯 번째 기적인 주님께서 물위를 걸으시는 사건은 크게 구속사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 성도들의 구원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것과 동시에 현실의 눈을 통해 보게 되면 하느님의 구속 사건이 우리 속에서 어떻게 진행이 되고 있는지에 관한 친절한 해설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바대로 참 행복은 세상의 빵이나 세상의 힘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주님이 조금만 도와주시면 우리가 이 땅에서 우리의 힘과 자원을 보태어 이루어 낼 수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참 행복은 영생, 즉 구원이 주어졌을 때 비로소 오게 되는 것이고 그 것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하시고 영생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길은 폭풍을 잠재우고 탄탄대로를 허락하시는 방법이 아닌 폭풍 속에서 함께 하시며 우리의 믿음을 키워 가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약속한 땅으로 이끄신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뒤에서 우리를 위해 함께 싸우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때때로 폭풍 속에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때 마치 우리 주님이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닌가 하고 당혹해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침 삼킬 동안도 우리를 놓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제자들이 풍랑 속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계시는 우리 주님의 불꽃같은 눈을 기억 하세요. 우리 뒤에서 우리와 함께 싸우시는 우리 주님의 눈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이 함께 싸 워 주시니까요.

 

5 돈을 위해서 살지 말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겠고 버리지도 않겠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6 그래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내 편을 들어 도와주시니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랴! 누가 감히 나에게 손을 대랴!' (히브13:5-6)

그렇지요? 주님은 단 한 순간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세요. 그리고 우리를 위해 싸워 주십니다. 절대 잊지 마세요. 우리 주님께서 싸우시는 대상은 사탄도 아니고 마귀도 아니고 귀신도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싸움 대상은 바로 우리의 죄입니다. 사탄과 마귀와 귀신은 하느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의 속성과 상태를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존재들이지 결코 하느님의 전쟁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사탄과 마귀들은 하느님의 피조물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입김 한 번으로 다 소멸되어지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왜 그들을 이렇게 놔두시지요? 그들을 존재케 하셔서 당신의 백성들이 그들에게 고통을 당하게 놔두십니까? 우리의 믿음을 성숙시키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은 이 역사를 통해 하느님 백성들의 불순종과 불신앙과 싸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것들을 하나하나 죽여 가심으로 결국에는 우리를 순종의 자녀로 참 신앙의 자녀로 완성해 내시는 것입니다. 혹시 지금 상황이 하느님이 우리에게 등을 돌리신 것처럼 느껴지십니까? 아닙니다.

하느님은 지금 우리들 뒤에서 죄와 싸우고 계신 것입니다. 그 인생의 풍랑 속에서 우리 죄와 불순종을 조금 씩 조금 씩 허물어 내고 계신 것입니다. 두려워 마세요. 좌절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모든 일들은 전부 하느님이 우리의 죄와 싸우시는 은혜의 자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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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하세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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