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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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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9주간 수요일] 산 이들의 하느님 (마르12,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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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1-06-02 ㅣ No.147278

 

2021년 6월 2일 수요일

 

[연중 제9주간 수요일산 이들의 하느님 (마르12,18-27)

 

 

1독서<두 사람의 기도가 영광스러운 하느님 앞에 다다랐다.> (토빗3,1-11.16-17)

그 무렵 나 토빗은 마음이 몹시 괴로워 탄식하며 울었다그리고 탄식 속에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2 “주님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당신께서 하신 일은 모두 의롭고 당신의 길은 다 자비와 진리입니다당신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주님저를 기억하시고 저를 살펴보아 주소서저의 죄로저와 제 조상들이 알지 못하고 저지른 잘못으로 저를 벌하지 마소서그들은 당신께 죄를 짓고

당신의 계명들을 따르지 않았습니다그래서 당신께서는 저희를 약탈과 유배와 죽음에 넘기시고 당신께서 저희를 흩으신 모든 민족들에게 이야깃거리와 조롱거리와 우셋거리로 넘기셨습니다.

저의 죄에 따라 저를 다루실 적에 내리신 당신의 그 많은 판결들은 다 참되십니다저희는 당신의 계명들을 지키지 않고 당신 앞에서 참되게 걷지 않았습니다.

이제 당신께서 좋으실 대로 저를 다루시고 명령을 내리시어 제 목숨을 앗아 가게 하소서그리하여 제가 이 땅에서 벗어나 흙이 되게 하소서저에게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습니다제가 당치 않은 모욕의 말을 들어야 하고 슬픔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주님명령을 내리시어 제가 이 곤궁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제가 이곳에서 벗어나 영원한 곳으로 들게 하소서주님저에게서 당신의 얼굴을 돌리지 마소서살아서 많은 곤궁을 겪고 모욕의 말을 듣는 것보다 죽는 것이 저에게는 더 낫습니다.”

바로 그날메디아의 엑바타나에 사는 라구엘의 딸 사라도 자기 아버지의 여종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서 모욕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사라는 일곱 남자에게 시집을 갔지만신부와 관련된 관습에 따라 신랑이 사라와 한 몸이 되기도 전에스모대오스라는 악귀가 그 남편들을 죽여 버렸다그래서 그 여종이 사라에게 이렇게 말하였던 것이다. “당신 남편들을 죽이는 자는 바로 당신이에요당신은 이미 일곱 남자에게 시집을 갔지만 그들 가운데에서 누구의 이름도 받지 못했어요.

그런데 당신 남편들이 죽었으면 죽었지 우리는 왜 때려요남편들이나 따라가시지그래야 우리가 당신의 아들이나 딸을 영영 보지 않게 되죠.”

10 그날 사라는 마음에 슬픔이 가득하여 울면서자기 아버지 집의 위층 방으로 올라가 목을 매려고 하였다그러나 생각을 다시 하고서는 이렇게 혼잣말을 하였다. “사람들이 당신에게는 사랑하는 외동딸밖에 없었는데 그 애가 불행을 못 이겨 목을 매고 말았구려.’ 하면서내 아버지를 모욕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만일 그렇게 되면 늙으신 아버지께서 나 때문에 슬퍼하시며 저승으로 내려가시게 되겠지목을 매는 것보다는평생 모욕하는 말을 듣지 않도록 죽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 낫겠다.”

11 그러면서 사라는 창 쪽으로 양팔을 벌리고 기도하였다.

16 바로 그때에 그 두 사람의 기도가 영광스러운 하느님 앞에 다다랐다.

17 그래서 라파엘이 두 사람을 고쳐 주도록 파견되었다.

 

화답송 시편 25(24),2-3.4-5ㄱㄴ.6과 7ㄴㄷ.8-9(◎ 1)

◎ 주님당신께 제 영혼 들어 올리나이다.

○ 저의 하느님당신께 저를 맡기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원수들이 저를 보고 좋아라 날뛰지 못하게 하소서당신께 바라는 이는 아무도 수치를 당하지 않으나터무니없이 배신하는 자들은 망신을 당하리이다

○ 주님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

○ 주님예로부터 베풀어 오신당신의 자비와 자애 기억하소서주님당신의 자애에 따라당신의 어지심으로 저를 기억하소서

○ 주님은 어질고 바르시니죄인들에게도 길을 가르치신다가련한 이 올바른 길 걷게 하시고가난한 이 당신 길 알게 하신다

 

복음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마르12,18-27)

그때에 18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19 “스승님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만 두고 죽으면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0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21 그래서 둘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지만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죽었고셋째도 그러하였습니다.

22 이렇게 일곱이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였습니다맨 마지막으로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23 그러면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2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25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26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사악의 하느님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2017년 6월 7일 연중 제9주간 수요일

 

연중 제9주간 수요일 제1독서 (토빗3,1-11ㄱ.16-17ㄱ) 

토비트의 1인칭 ('나 토빗') 설화는 그의 깊은 절망감을 표현하는 기도로 끝난다.

토빗기 3장 2절에서 토비트는 자선 행위를 실천했다는 사실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를 찬양하기 시작한다.

 

그런 다음 토빗기 3장 3-5절에서 토비트는 하느님께 자신을 기억하시고 살펴보아

주시기를 청하면서, 자신의 죄와 백성의 잘못에 따라 자신을 벌하지 말아 달라고

청한다. 이어서 토빗기 3장 6절에서 토비트는 하느님께 자기 목숨을 앗아가게 하여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청한다.

 

그는 죽으면 '흙'이 되고 '영원한 곳'(죽은 이들이 모이는 '셰올')으로 들게 될 것을

기대한다.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이 어떠하든, 여기서는 영원한 삶이 어둠에 깔려 있다.

토비트는 현재의 이 비참한 삶보다는 차라리 죽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경건하고 의로운 토비트는 모든 계명에 충실했고, 죽은 이들을 묻는 데 특별한 용기를

내었다. 그렇지만 토비트는 재산과 시력을 잃었고, 자신의 아내에게 새끼 염소를

훔치지도 않았는데 훔쳤다고 아내를 비난했다.

 

이런 체험을 한 토비트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습니다"(토빗3,6)는 결론에 이른다.

 

한편, 토빗기 3장 7절에서 15절에 나오는 '사라의 곤경'이야기는 '토비트의 곤경'

이야기와 병행한다. 사라는 의롭고 무죄한 사람이다. 그녀는 일곱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서 큰 고통을 받고 있다. 그녀는 여종들에게서 모욕하는 말을 듣고도 이것을

감당해야 한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도밖에 없다.

 

사라가 곤경을 겪은 날이 토비트가 곤경을 겪은 때("바로 그 날")와 정확히 일치한다.

토비트서 1인칭 설화는 중단되고, 설화자가 사라의 이야기를 3인칭('그')로 말한다.

토빗기 3장 7절에서 우리는 사라가 누구이며(라구엘의 딸), 언제 살았고(토비트가

살던 때), 어디에서 살았는지(메디아의 엑바타나) 알게 된다.

 

그녀가 겪은 곤경은 토빗기 3장 8절에 요약되어 있다. "사라는 일곱 남자에게 시집을

갔지만, 신부와 관련된 관습에 따라 신랑이 사라와 한 몸이 되기도 전에,

아스모대오스라는 악귀가 그 남편들을 죽여 버렸다."

 

사라의 고통은 세 가지 형태의 말, 곧 하녀들과의 대화(토빗3,8ㄴ-9), 독백(토빗3,10)

그리고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토빗3,11-15)로 표현된다. 대화에서 하녀들은 남편들을

죽인 것이 바로 사라인데, 남편들의 죽음에 대한 화풀이를 자신들에게 한다며

사라를 모욕하는 말을 한다.

 

독백에서 사라는 자살하려고 생각하지만, 자살을 하면 아버지의 고통이 더 커질 수 있기

때문에 생각을 바꾼다. 토비트처럼 사라 역시 결국은 "죽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 낫겠다."(토빗3,10)라고 판단한다.

 

기도를 하면서 사라는 하느님을 찬미하며(토빗3,11ㄴ-12) 죽게 해 주실 것을 청하고

(토빗3,12), 자신의 깨끗함을 선언하면서 고통을 묘사한다(토빗3,14-15).

 

그러나 그의 마지막 기도는 하느님께 둘 중 하나를 선택하시게 한다. "주님, 제 목숨을

거두는 것이 당신의 뜻이 아니라면 저를 모욕하는 저 말이라도 들어 보소서." 

 

사라의 기도에 따르면, 사라에게는 죽는 것보다 더 나은 길이 있음을 시사한다.

토비트서의 나머지 부분에서 다루는 주제가 바로 그 더 나은 길이다.

 

이제 토빗기 3장 16절-17절에서 '하느님의 결정'이 두 이야기를 한데 묶으며,

하느님께서 토비트와 사라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 도구는 천사

라파엘인데, 라파엘이라는 이름은 '하느님  께서 치유해 주셨다' 라는 뜻이다.

 

모든 이를 하나로 연결하는 등장 인물이 토비트의 아들 토비아이다. 라파엘 천사와 토

비아를 통해 토비트는 시력을 되찾게 되고, 사라는 살아있는 남편을 맞아들이게 된다.

 

두 이야기의 줄거리를 연결하는 고리는 '같은 때에' 고통받는 두 의인이 바치는 기도이다




(녹) 연중 제9주간 수요일 - 6월06일

 

 연중 제9주간 수요일 복음 (마르12,18-27)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25)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26ㄴ)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27ㄱ)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에서 원문에 있는 '알르'(all')의 기본형 '알라'(alla; but) 번역이 생략되어 있다.

'알라'(alla)는 주로 절이나 문장들 사이에서 정도의 차이나 대조를 나타낼 때 '그러나'의 뜻으로 쓰이는 접속사인데, 여기서는 '오히려'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부활한 사람이 장가 시집을 가기는 커녕 '오히려' 하늘의 천사들과 같게 된다 이 말씀은 모세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여 부활과 내세를 부인하는 사두가이들의 잘못된 견해를 완전히 뒤집는 말씀이며, 이런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알라'(alla)라는 접속사를 사용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혼인하고 자녀를 낳으며, 나중에는 결국 죽는  현세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혼인하지도 않고 영원히 죽지 않는 하늘 나라도 창조하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사람이 천사와 같은 '지위'의 존재가 됨을 지적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부활 후 인간은 혼인의 문제에 있어서 성적(性的)이고 생식적인 문제에 있어서 이 땅의 현세적 존재와는 전혀 다른 존재, 즉 영원 불사 불멸의 존재가 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천사들과 같아진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천사'를 언급함으로써 천사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두가이들의 잘못된 성경관을 지적하고 계신다.

 

그들은 모세오경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만족 때문에 성경을 왜곡하여 부활 뿐만 아니라 천사들의 존재를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말씀들(창세19,1.15; 28,12; 32,1)을 의도적으로 비켜갔다.

 

한편, 마르코 복음 12장 26절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서 '되살아난다'에 해당하는 '에게이론타이'(egeirontai; rise; rising) '일으키다', '다시 살리다'라는 뜻을 갖는 '에게이로'(egeiro)의 직설법현재 수동태이다.


부활 논쟁에 있어서의 부활 시점은 미래인데, 여기서 '에게이로'(egeiro) 현재 시제가 사용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진리'로서의 '부활' 교리 문제를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또한 이 동사가 수동태로 쓰였다고 하는 것은 부활이 죽은 이의 능력이나 자연 발생적 사건이 아니라 외부의 어떤 능력, 즉 하느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을 암시한다.

 

모세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여 부활과 내세를 부인하는 사두가이들이 모세오경을 통해 문제를 제기했던 것(마르12,19)과 같이, 예수님께서도 모세오경 중에서 답변을 이끌어내셔서 그들을 반박하신다.

그것이 바로 탈출기 3장 1~6절의 말씀인데,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직접 당신 자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신 말씀이다.

원문 성경은 동사를 생략하고 있지만,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22장 32절에는 '~이다'라는 뜻의 '에이미'(eimi) 동사 현재형이 사용된 것을 볼 때,여기서도 그 뜻이 분명하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 자신을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으로 계시하시면서 동사를 현재형으로 사용하신 것 그들의 하느님 되심이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현재의 사실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모세가 이 말씀을 들었을 떄는 이미 그 조상인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 죽은 지

오랜 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현재형으로 말씀하신 것은 하느님께서 죽은 그들을 부활시켜 거느리고 계신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그들이 이미 부활하여 하느님과 함께 현존하고 있으며, 하느님의 영광에 동참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나 이사악, 야곱이 육체적 죽음으로 그들의 모든 것이 끝났다면, 그들의 죽음과 더불어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도 끝난 것이다.

그러나 모세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언제나 현재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으로 불리는 것은 아브라함과 아사악과 야곱이 살아 있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2018년 6월 6일 (녹) 연중 제9주간 수요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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