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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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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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 [estherlove] 쪽지 캡슐

2010-09-23 ㅣ No.58743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25 주간 목요일 -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

 

며칠 전에 가까운 동기 사제관에서 밤에 무서운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자정이 다 되어 혼자 집으로 돌아오려니 왠지 무서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차 뒤에 누가 앉아있는 것 같고 창문 밖에서 누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습니다. 텔레비전 볼 때는 안 무서운 척 했지만 저도 모르게 팔찌 묵주를 빼어 들어 성호를 그었습니다.

그러면서 한 사제로서 창피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한 선배가 사제가 되면 귀신을 만나도 절대 무서워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해 주며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어느 날 밤에 사제관으로 공소 회장님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빨리 병자성사를 해 주어야 한다고 하며 차를 태워 산으로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그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다 귀신을 보고 정신이 이상해진다는 소문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혼자 당당히 들어갔고 누워있는 할아버지에게 병자성사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오려고 하는데 물방울 같은 것이 얼굴에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손으로 닦아보니 피였습니다. 신부님은 위쪽을 올려다보니 한 소복을 입은 여자가 천정에 붙어서 자신의 혀를 질근질근 씹으면서 뻘겋게 된 눈으로 신부님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이야기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 선배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사제가 되려면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병자성사를 주기 위해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저희 집은 매우 시골이었습니다. 밤에 집에 가려면 자전거를 타고도 20분가량은 불이 없는 어두운 시골길을 달려야했습니다.

복사단을 하면서 새벽과 밤에 오가야 할 경우가 많았는데 그 시골길은 혼자 다니기에는 너무 무서웠습니다. 무서움을 이기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써봤습니다. 소리를 크게 질러보기도하고 노래를 크게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저녁도 노래를 부르면서 오는데 검은 마귀같이 생긴 것이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순간 주춤 했지만 용기를 내어 더 가보니 나무에 걸려 흩날리는 검은 비닐봉지였습니다.

어느 순간 저는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아, 두려움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구나!’

 

오늘 헤로데는 예수님을 자신이 죽인 세례자 요한이 살아난 사람이라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두려워합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서 두려움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 많으신 분이지만 헤로데는 자신이 지은 죄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무서운 심판관으로 여깁니다.

누구든지 죄를 지으면 우리 안에 있는 ‘내적 법원’, 즉 ‘양심’에서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판단내립니다. 이 법정을 피해 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자신에게 죄인으로 찍히고 나면 ‘벌’을 기다리게 됩니다. 사실 이 벌을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마치 한 반에서 시험을 잘 못 보아 선생님이 모든 학생들을 때리려고 할 때 자기 순서를 기다리는 그 마음입니다.

유다처럼 그 벌을 못 기다리고 자신 스스로 그 벌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살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죄를 지으면 모든 사람이나 상황이 자신에게 벌로 다가올까 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를 지으면 위축되고 두려워지고 사람을 만나기 싫어집니다. 벌을 받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모든 것까지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또 사람을 무서워하게 되는 이유는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대리만족으로 사람으로부터는 미움을 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을 대할 때 조심스러움을 넘어서서 두려운 마음으로 대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사랑엔 두려움이 없습니다.”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유지되고 그러면 사람이든 귀신이든 두려워 할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벌하기 위해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모든 죄도 용서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부모님도 자녀들을 혼내는 이유가 다 자녀가 다시 잘 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었더라도 다시 잘 하겠다는 결심만 있다면 그것으로 오케이입니다.

어제 식사하는데 한 엄마가 자신의 아이를 막 나무라서 아이는 더 크게 울었습니다. 그런데 울면서도 다시 엄마의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는 것입니다. 야단맞았지만, 그래서 울고 싶지만 결국 돌아갈 곳은 엄마 품 밖에 없었나봅니다. 엄마는 야단친 것이 미안했는지 다시 아이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습니다. 참 인상 깊은 장면이었습니다.

만약 아이가 엄마가 미워서 도망가 버렸다면 엄마는 더 화가 났을 것입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이깁니다. 부모님이 자녀가 잘못했어도 그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부모님께 예전처럼 달려들기를 원하는 것처럼 하느님도 가끔은 매를 들 때고 있지만 두려움 없이 당신께 달려들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다시 하느님께 얼굴을 파묻으면 세상의 두려움은 다시 사라집니다. 두려움은 마치 아기가 부모가 곁에 없을 때 느끼는 감정처럼, 나를 지켜 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다고 느낄 때부터 시작됩니다.

 

좋은 두려움, 나쁜 두려움

며칠 전 텔레비전 프로에서 한 아나운서가 실제 있었던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매우 무서웠습니다. 무서운 이야기 좋아하시면 읽으시고 아니면 건너뛰고 읽으셔도 내용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담력이 있으시다면 먼저 포털 사이트에서 ‘저주받은 러시아 터널 교통사고 CCTV’를 처 보십시오. 그리고 사고 장면들을 한 번 봐 보십시오. 차들은 무언가를 피하려는 듯이 하다가 계속 사고가 납니다. 이 터널은 설명할 수 없는 사고들이 즐비하게 일어납니다. 특별히 밤에만 그런 사고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노면이 마치 얼음판인 듯 차들이 미끄러집니다. 그래서 러시아 사람들도 웬만하면 밤에는 이 터널을 통과하려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한국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밤에 그 터널을 통과해야만 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 사실들도 익히 들어 알고 있어서 겁을 집어먹었지만 일단 터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터널 안에는 자기의 차밖에 없었는데, 중간쯤 가다가 시동이 스르르 꺼지더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터널 안의 불이 하나씩 꺼져서 결국엔 암흑 속에 있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차 주위에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쿵쿵쿵쿵 무언가로 차를 마구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너무 놀라서 운전자는 차 문을 잠갔습니다. 계속 두드리는 소리가 나다가 갑자기 멈추더니 불도 켜지고 시동도 걸려서 간신히 집에 올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차를 보니 유리창에 사람 손바닥이 마구 찍혀있더라는 것입니다. 너무 놀라서 세차장으로 가서 차의 세차를 부탁하였습니다. 차를 세차하는 사람이 한참을 닦다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어? 이상한데요? 이 자국들은 밖에서 찍힌 게 아닌데요?”

 

작년 생각이 납니다. 동료 신부와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무서운 장면들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오랜만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인적인 없는 산길을 차를 몰고 혼자 오는데 누군가 뒤에 타고 있는 느낌이 계속 들었기 때문입니다.

조금 지나니 제 자신에게 화가 났습니다. 예수님은 풍랑이 일어 배가 잠기려 할 때 벌벌 떠는 제자들을 보고, “왜 두려워하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믿음이 없어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는다면 당연히 부모와 함께 있는 아이처럼 두려울 것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사랑엔 두려움이 없다고 하십니다. 즉, 두려움은 사랑의 반대말이기도 합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잘못을 하면 이젠 부모가 자신을 보호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두려운 존재로 변합니다. 자신에게 벌을 내릴까 무섭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마찬가지로 죄를 짓고 하느님이 두려워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두려워한다는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이미 양심의 심판을 받았기에 무엇이나 다 두려워하게 되어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가 예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였기에 예수님까지도 되살아난 세례자 요한으로 보고 자기에게 보복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 두려움 자체로 이미 죗값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두려움은 믿음과 사랑과 희망이 부족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항상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우리가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그러나 두려움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났을 때 마리아도 두려워합니다. 이 두려움은 유일하게 인간이 가져야 하는 두려움입니다.

성모님은 그 천사가 마귀가 아닐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겸손하셔서 하느님의 천사가 자신에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마귀가 자신을 교만하게 만들까봐, 그러니까 교만의 죄를 지을까봐 두려워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가져야하는 유일한 두려움은 죄를 지어 하느님과 멀어질까봐 갖게 되는 두려움인 것입니다.

 

개가 마구 짖는 것은 두려워서 짖는 것입니다. 깍두기 아저씨들도 용감한 것 같지만 사실 두려워하는 사람이 더 폭력적이 됩니다. 정말 두려움 없으셨던 분은 예수님과 성모님입니다. 그 고통스런 죽음을 당당히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또 두 분의 모범을 따르는 우리의 순교자들도 두려움 없으신 분들입니다.

우리 또한 죄를 짓게 될까봐 갖게 되는 두려움 외에는 절대 아무 것도 두려워하며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 하느님 당신은 나의 모든 것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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