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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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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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 [estherlove] 쪽지 캡슐

2010-10-14 ㅣ No.59238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28 주간 금요일 - 숨겨진 것은 드러나게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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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 빨래를 내기 위해 빨래방에 갔더니 한 수녀님이 열심히 일을 하시고 계셨습니다. 제가 인기척을 내자 수녀님은 깜짝 놀라셨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 놀라세요?”라고 했더니, “죄가 많아서요.”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웃으시며, “항상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고 믿어야 하는데 정말 주님께서 나타나셔도 이렇게 놀라면 큰일이겠죠?”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은근히 잘 놀라지 않는 제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점심을 많이 먹어서 저녁을 먹지 않고 혼자 열심히 걷는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캄캄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묵주를 돌리며 열심히 운동장을 뱅글뱅글 돌고 있었는데 갑자기 소리가 나 뒤를 돌아보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한 명이 제 뒤에 바짝 붙어서 걷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소리는 지르지 않았지만 깜짝 놀라 움찔 하였습니다.

분명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도 저는 혼자였던 것입니다. 만약 그 분과 함께라고 생각했다면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주교님이 성당 십자가 밑에 홀로 서서 “주님! 주님!”이라고 외치고 있을 때 갑자기 십자가에서 “그래, 나다!”라는 대답이 들려오자 놀라서 기절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생각났습니다. 마치 제가 이 이야기의 주교님처럼 느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저도 바리사이들과 같이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기도를 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사실 평상시에 감추어진 위선도 이런 특별한 상황이 되면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군대 훈련소에 처음 들어가서 만나는 사람들은 참 다양했습니다. 잘 나가던 부잣집 아들들로부터 시작하여 술집에서 일하던 사람, 많은 일류대학 석학들... 아무튼 처음엔 밖에서 잘 안 나가던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자신들을 자랑합니다.

한 번은 초코파이 한 상자가 어떤 친구에게 소포로 왔는데 모든 내무반 아이들이 서로 초코파이를 먹으려다가 아무도 못 먹게 다 부서지고 터져 버렸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고상한 척을 하더라도 100원짜리 초코파이 하나에 무너져버리는 인생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조심하라고 하는 바리사이의 누룩은 그들의 위선을 가리킵니다. 밀가루에 누룩이 섞여 있으면 평소엔 잘 모르지만 불이 일단 가열되면 크게 부풀어 오르게 됩니다. 이렇게 평상시 모습과 어려울 때 모습이 변하는 사람이 위선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리사이들과 같은 위선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믿음이 생기면서, 세례를 받으면서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과거엔 혼자 있을 때 맘대로 하던 것을 이젠 혼자 있어도 맘대로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길거리에 휴지를 함부로 버릴 수 없게 되고, ‘아무도 못 봤지?’하며 몰래 하던 행동들을 이젠 편안하게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눈이 매 순간 나를 바라보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을 속이며 그냥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것들도 그럴 수 없으니 어떤 때는 이런 것이 좀 불편하게도 느껴집니다. 감시를 당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내 안에 나의 감시자를 데리고 다니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바뀌는 것이 있습니다. 외롭지 않고 두렵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굳이 하느님의 시선을 무시하며 믿지 않으려하고 내 맘대로 행동할 때는 정말 혼자였습니다. 다시 말해 죄를 지을 땐 스스로 혼자가 되어 외롭고 두렵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시선이 나를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돌보아주는 관심의 시선임을 차차 깨닫게 될 때는 혼자 있어도 외로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항상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부모가 옆에 있다는 것을 아는 아이들은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마련해 주시는 주님이 항상 함께 계시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세상 어떤 것도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신 것처럼, 훌륭한 신앙인도 아주 작은 것에서까지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태산도 티끌이 모여서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살아가면서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걱정하며 살고 있다면 우리도 위선자나 다름없습니다. 언젠가 어려운 일이 닥치면 우리의 불신앙이 그대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잡초는 뽑아도 뽑아도 또 생겨납니다. 우리에게 아주 작은 두려움이나 걱정이 일 때 그 때 그 때 뽑아버립시다. 그래야 순교자들처럼 결정적인 순간이 오더라도 당당한 신앙인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잡초들이 건물 하나를 다 집어삼킬 수도 있습니다.

집 주위의 잡초를 뽑듯이 작은 것에서 주님의 시선을 느끼며 계명을 지키며 살아야합니다. 작은 일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큰일에도 충실할 수 없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주님의 시선을 느끼며 삽시다. 그래야 정작 어려울 때 그 분을 부르기가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

바티칸 대성전 앞엔 멋진 광장이 있습니다. 그 광장을 팔로 감싸듯 안고 있는 회랑이 있는데 기둥이 네 개씩 계속 이어져있습니다. 네 개의 기둥은 각기 두 개씩 나뉘어져있는데 그 가운데로 큰 차도 지나갈 수 있는 길이 나 있습니다.

처음 베르니니가 이 주랑을 설계할 때, 그 가운데로 황제나 귀족들의 마차가 다니도록 설계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회랑을 마차로 지날 때면 앞에 보이지 않고 온통 기둥들만 보이기 때문에 약간은 주눅이 든다고 합니다. 교황을 알현하러 오는 귀족들이나 황제들은 베드로광장 한 복판이 아닌, 이 좁은 회랑을 통과해오면서 교황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며 은근히 낮아지고 주눅이 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높은 사람은 만날 때는 왠지 주눅이 들지만 나보다 낮은 사람을 만날 때는 편한 마음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보다 낮은 사람은 나에게 해를 끼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회랑도 돈 많은 귀족이나 한 나라의 임금도 교황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줄 알도록 하기 위한 의도에서 그렇게 설계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권력이 높은 사람들이라도 그 사이에서 자신을 보호하고자하는 이런 방법들이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개가 공격적으로 짖고 사나워지는 것은 두렵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상대가 안 될 것 같으면 벌렁 드러누워 상대에게 자신의 배를 보여줍니다.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공격적으로 변하기도 하고, 아예 비굴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상대를 공격하기도 하고, 아니면 아주 낮아지는 편을 택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둘 다 상대를 사랑해서 하는 행동이 아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하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반대로 사셨습니다. 자신에게 아무 해도 끼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당신을 낮추시고, 당신을 죽일 수 있는 힘 있는 사람들은 강하게 나무라셨습니다. 물론 그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두려운 존재였기 때문에 권력을 등에 업고 공격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사랑과 두려움’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상대를 위해 자신을 잊고 모든 것을 주는 것인데, 두려움은 자신의 것을 하나라도 잃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는 것을 우리는 ‘죄’라 합니다. 죄의 뿌리는, 교만, 육체, 탐욕입니다. 두려움은 자신 안에 있는 교만, 육체, 탐욕을 잃게 될까봐 걱정하는 마음입니다. 즉, 교만하여 내 자신의 명예나 자존심에 손상을 입을까봐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고, 내 육체를 아프게 하거나 다치게 할까봐 걱정하는 것이며, 내가 가진 재물이나 인기를 잃게 될까봐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두려움은 죄이고 사랑의 반대인 것입니다.

내가 사람을 두려워한다면 아직도, 내 자신만 위해 살기 때문에 사랑이 부족한 것이라고 판단하면 됩니다. 사랑은 예수님께서 모범으로 보여주신 대로 모욕당하고, 고통당하고, 모든 것을 잃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예수님께서 무엇을 청하고 싶으냐고 했을 때, 당신을 닮고 싶으니, 당신이 당하신 ‘멸시와 고통’을 달라고 청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사람이 두려울 리가 없습니다. 혹시 내가 사람을 두려워하고 있다면,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놓으신 하느님이 함께 계심을 믿지 못하고, 내 스스로 내 자신을 지켜나가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감정이 생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내 자신을 버리는 것이 사랑입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더 이상 무엇을 잃을 두려움이 없습니다.

 
 
 
< 아무 것도 너를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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