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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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자비는 판단을 마지막까지 미루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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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 [estherlove] 쪽지 캡슐

2010-10-23 ㅣ No.59459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30 주일 - 자비는 판단을 마지막까지 미루는 것


 

고등학교 때 공부 잘 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모의고사를 보면 전국 5등 안에 드는 수재였습니다. 선생님들도 그 친구 앞에서는 쩔쩔 맬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한문 선생님이 시험 문제를 풀어주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일어나더니 선생님께서 풀어주신 문제가 틀렸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V자 눈썹이기 때문에 그냥 말해도 대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에 화가 난 선생님이 마대 자루로 사정없이 10대씩이나 때렸습니다. 얼마나 화가 나셨는지 마대가 두 자루 정도 부러진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은 아무리 그래도 학생이 선생님께 그렇게 대들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의 답은 선생님이 틀렸었습니다.

선생님은 학생이 대들려는 의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판단하여 학생을 때린 것입니다. 저는 그 때 우리의 판단이란 것이 얼마나 허점이 많고 오류가 많은지 잘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듯이, 소우주와 같이 복잡하고, 강물과 같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사람을 판단해버린다는 것은 돌을 던져 날아가는 새를 맞추려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마대자루가 나와서 생각난 것인데, 사람의 관계란 일방이 있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마대로 사람을 때리면 맞는 사람만 아픈 것이 아니라, 마대에게도 그 때리는 사람에게도 충격이 가서 마대가 부러지기도 하고 손에 물집이 잡히기도 합니다. 손바닥으로 누구를 때렸을 때 그 사람만 아픈 것이 아니라 내 손바닥도 동시에 아픕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는 세리를 심판합니다. 만약 세리를 심판하지 않았다면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겠지만 세리를 심판함으로써 자신도 자신이 한 그 심판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 사람이 세리를 때렸기 때문에 자신도 부러지게 된 것입니다. 심판하지 않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지만 심판하는 사람은 자신이 한 그 심판 때문에 심판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실 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심판할 때 사용한 잣대로 우리를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 7,1-2)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어 무학 대사를 만났을 때 장난삼아 ‘대사님은 꼭 돼지 같소.’ 하였습니다. 무학 대사는 ‘임금님은 꼭 부처님 같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성계가 놀라 그 연유를 물으니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는 법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결국 이성계는 자신이 한 말 때문에 돼지로 심판 받게 된 것입니다.

 

개신교 사람들은 성모님의 여러 교리 중, 평생동정으로 사셨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요셉과 함께 살면서 동정을 지킬 수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혹은 사제나 수도자들이 독신으로 사는 것도 비판거리가 됩니다. 혼자 정결하게 사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인지, 또 혼인하여 많은 후손을 낳으라고 했는데 왜 자녀를 낳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성모님이 평생 동정일 수도, 사제나 수도자가 동정으로 사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당신이 그렇게 못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판단하는 거죠’입니다. 교회의 역사 안에서, 서양은 물론이고 우리 순교자들 중에서도 결혼해 함께 살면서 평생 동정을 지키며 사신 분들도 여럿 있습니다. 사람을 판단하면서 그 말 때문에 동시에 자신도 다른 사람들에게 판단되어짐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다빈치 코드와 같은 소설들엔 예수님과 마리아 막달레나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갖은 애를 씁니다. 예수님도 사람이었기 때문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애정의 관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런 유의 소설이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다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도 그런 생각에 동의하고 공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써 이 세대가 사랑이 순결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잊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냅니다.

 

모든 죄는 교만과 육체의 욕망과 재물의 탐욕으로부터 옵니다. 이 셋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재물에 욕심을 내는 사람이 겸손할 수 없고 교만한 사람이 가난할 수 없으며 육체적 욕망을 찾는 사람이 겸손할 수 없습니다. 교만하여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동시에 돈도 밝히고 음란하기까지 한 사람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도 이 세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나쁜 경향은 원죄의 결과로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게 되고 죽기까지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정도는 모두 교만하고 음란하고 욕심쟁이입니다. 따라서 누가 다른 사람을 교만하거나 음란하거나 욕심쟁이라고 판단한다면 자신까지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도 원죄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고 자신도 어느 정도는 그렇기 때문입니다.

 

행복의 방정식을 알 것입니다.

‘행복 = 1 / 욕망’ 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100만원인데 버는 것이 만원이면 나는 1/100, 즉, 1%만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만원만 있으면 만족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1/1, 즉 100%만큼 행복한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세상에선 아무것도 필요 없고 다만 하느님만 있다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1/0, 즉 무한대만큼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1로 정해져 있습니다. 진정 내가 행복해지려면 이 세상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줄여야합니다. 거지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만족한다면 행복할 수 있지만, 부자도 더 가지려고만 한다면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부족하게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심판의 방정식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심판 = 1 /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 입니다. 만약 내가 사람을 판단할 때 100으로, 그러니까 매우 엄하게 판단한다면 나 또한 1/100 으로 판단 받아 1점으로 심판받게 됩니다. 혹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가 나를 판단하는 잣대와 같아서 1로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면 나는 하느님께 100점으로 심판받게 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항상 높여주고 판단하지 않는다면 분모가 0이 되고 마찬가지로 나의 심판 땐 내가 무한대의 가치로 하느님께 심판받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욕망이나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잣대나 모두 교만하면 커지고 겸손하면 작아지는 숫자입니다. 내가 겸손하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에 만족하고 개인적인 욕망은 갖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욕망이 거의 0에 가까워지는데 그 때는 행복이 무한대로 커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것은 유일한 심판관이신 하느님의 자리에 앉는 것이니 그만큼 교만하다는 말인데 극도로 겸손해져서 다른 사람을 높일 줄만 아는 사람이라면 잣대가 거의 0에 가까워지는 동시에 하느님으로부터는 내가 무한대로 큰 사람으로 심판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다투어 서로 남을 존경하는 일에 뒤지지 마십시오.”(바오로 12,10)

 

이것이 나 또한 존경받고 높아지는 일입니다.

문득 손톱을 보았는데 손톱에 때가 끼어있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아침에 바빠서 머리를 감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머리를 감으면 머리만 깨끗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깨끗하게 하는 손 또한 깨끗하여 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갯벌에서 놀아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진흙을 묻히며 놀기도 하는데 상대에게 진흙을 묻히려면 먼저 내 손이나 몸에 묻히고 상대를 더럽힙니다.

오늘 바리사이는 세리를 더럽혔기 때문에 결국 자신이 먼저 더러워져야 했던 것입니다. 세리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상대를 높였기 때문에 자신도 높여진 것입니다.

내가 상대를 깨끗하게 하면 나도 깨끗하여지고 내가 상대를 더럽히면 나도 더러워집니다. 내가 상대를 낮추면 나도 낮아지고 내가 상대를 높이면 나도 높아지는 것입니다. 상대를 높이려면 판단을 하지 말아야합니다. 상대를 판단하면서 그만큼 나는 높아지고 상대를 깎아내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비가 심판을 이긴다는 말은 자비로운 사람은 남을 심판하지 않기에 자신도 심판받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 내가 천사의 말을 한다해도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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