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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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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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 [estherlove] 쪽지 캡슐

2010-10-30 ㅣ No.59600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30주간 토요일 - 겸손의 길


 

하루는 아우구스띠노 성인이 볼일이 있어서 한 제자를 불렀습니다. “이보게, 레이나.” 스승이 부르는데도 레이나는 대답이 없습니다. 옆방에 분명히 있는 것 같은데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해 불러보았지만 여전히 응답이 없습니다. 아우구스띠노는 슬며시 부아가 치밀었습니다. “이 녀석이...” 그는 옆방 문을 신경질적으로 열어젖혔습니다. 순간, 그는 “아차.” 하고 뉘우쳤습니다. 레이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하느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너무도 간절히 기도에 몰두하고 있다 보니 스승의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그는 제자에게 간청했습니다.

“너의 발로 내 목을 밟고 서서 ‘교만한 아우구스띠노야, 교만한 아우구스띠노야, 교만한 아우구스띠노야' 이렇게 세 번 소리쳐다오.”

 

가톨릭의 영성을 한 마디로 말하라고 하면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사랑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 멀어지기 시작하는 때는 자신을 높이려 할 때부터입니다. 겸손은 사랑을 담는 그릇입니다. 항상 말하는 것이지만 산은 높아질수록 서로 멀어지고 낮아질수록 서로 가까이 접하게 됩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외롭지 않고 사랑할 줄 압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혼인잔치에 초대받거든 가장 끝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하십니다. 결론은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면 낮아지고 낮추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라면 하도 이 말을 들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신부님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이 신자들과 함께하는 식사자리에 가면 항상 중앙 자리를 신부님 앉도록 남겨놓습니다. 저도 처음엔 낮은 모습으로 끝에 앉으려하지만 신자들이 하도 원하니 중간에 앉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순간엔가 저는 가장 중요한 자리에 앉아야 당연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혹시 많은 사람들 모인 곳에서 주인공이 되지 않으면 왠지 섭섭한 마음을 지니게 됩니다.

누구나 다 인정을 받고 싶어 하고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다른 사람이 제대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기만 더 높아지려 합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라도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추락하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높아지기 위해서 일부러 겸손해지려 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높아지기 위해서 일부러 자신을 낮추는 것이라면 아직도 높아지려는 교만이 있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정말로 자신을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코의 이러한 예화가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에게 한번은 친구이자 제자인 마세오가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용모가 뛰어나지도 아니하고 학식도 없으며 귀족의 혈통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따르며, 모든 이들이 당신 보기를 바라며, 당신에게서 듣기를 바라며, 당신에게 순종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어째서 세상 사람들이 당신에게 순종하기를 원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그때에 프란치스코가 대답하기를 “그 이유는 가장 높이 계시는 분의 시선이 그런 일을 하시고자 뜻하셨기 때문이오. 그분은 모든 사람들을 보고 계시는데 가장 거룩한 눈으로 죄인 중에서도 더 이상 죄인일 수 없는 작은 사람 이보다 더 자격 없고 이보다 더 죄인인 사람을 찾을 수 없으셨던 것이오. 그래서 그분은 놀라운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나를 택하셨다오. 그분은 나보다 더 천한 인간을 찾으실 수 없으셨기 때문에 나를 택하셨고 또한 이 세상의 고귀한 신분과 위엄, 강함, 미모 그리고 학식을 깨뜨리기 원하셔서 그렇게도 미천한 나를 택하셨던 것이오.”

프란치스코는 일부러 자신을 낮춘 것이 아니라 정말 자신을 미천하게 생각하였고 모든 성인들이 그렇습니다.

 

성인은 어떤 큰일을 하셨기 때문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임을 깨달을 때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은 포도나무요 우리들은 가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엇이나 된 것인 양 우리 힘으로 무엇을 하려고 합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온전히 만족시킬 수 있을까요? 혼인 할 때, “제가 이 사람을 꼭 행복하게 해 주겠습니다.”라고 하지만 그 사람은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는 한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거나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성인이란 그런 자신을 알고 주님께 그것을 해 달라고 청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실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기대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주시면 받고 안 주시면 안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언가를 당연히 주셔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양들이 풀이 있으면 뜯어먹고 없으면 안 먹는 것과 같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하느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겸손한 만큼 주님을 많이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을 달로 표현하고 성모상을 보면 성모님께서 달을 밟고 계신 이유도 그 분의 여성성과 함께 주님인 태양 빛을 가장 밝게 받아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달과 같기 때문입니다. 겸손의 크기만큼 하느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겸손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더 필요로 하는 것이고 누구도 성모님만큼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모님보다 하늘에서 더 밝게 빛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한 만큼 주님의 빛으로 빛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달과 같이 밝게 또 어떤 사람은 보일랑 말랑.

그러나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만드는 일은 그만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타볼산 위에서 변모하셨듯이 우리도 산을 올라야 변모할 수 있습니다. 그 산에 오르는 것을 우리는 기도라 부릅니다. 사랑의 모든 행위가 기도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시간을 더 주시는 이유는 이렇게 더 겸손해 져서 우리의 본질을 변화시켜 하늘나라에서 더 큰 영광을 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이유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을 당시,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분의 자살에 대한 강론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함께 계셨던 신부님 한 분이 정의구현 사제단이셨습니다. 저는 그런 것도 몰랐는데, 나중에서야 다른 신부님들과 함께 모인 자리에서, “그 때 참 섭섭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자살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타살을 당하신 것입니다.”라고 했고, 다른 신부님도 그 신부님의 말에 동의하였습니다. 저도 대꾸를 못했는데, 외적인 압박이 매우 컸었던 것은 누가 보아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자신의 목숨을 끊은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살아오면서 삶이 너무 힘들어 ‘좀 쉬었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을 아주 조금씩이라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죽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되어도 정해진 시간까지는 최대한 열심히 살아야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런 삶과 죽음의 딜레마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이 세상을 떠나는 편이 훨씬 낫다고 하십니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

아마 예수님도 아버지를 떠나와 이 세상에서 배척받고 이해받지 못한 사람이 되어버렸을 때 아버지께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절실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타볼산에서 아버지를 만나셨을 때는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베드로 사도는 천막을 짓고 그 곳에서 살자고 제안합니다. 세상의 악취로 다시 내려가는 것보다는 천상의 향기에 머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향하기 위해 타볼산에서 내려오십니다.

바오로 사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죽는 것이 이득이고 편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 세상이 자신을 필요로 하니 먼저 죽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합니다. ... 나에게는 그것도 보람된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여러분의 믿음이 깊어지고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내가 남아 여러분 모두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성모님도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가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갓 태어난 교회를 성장시켜 줄 어머니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예수님과 함께 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 남아 교회를 성장시키셨습니다.

요한 사도도 나머지 사도들처럼 순교를 하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끓는 기름에 던져져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장 젊은 나이였기 때문에 자신이 본 것을 최대한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전파하고 또 평생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해 묵상하여 요한복음이나 요한묵시록을 기록해야 할 사명이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죽지 못하는 것이 곧 순교였습니다.

최진실씨는 물론이고, 얼마 전 흑진주 아이들 셋을 두고 자살한 아버지나, 아들과 함께 자살한 아버지를 보며 그 심정이 오죽했으면 그랬겠느냐는 마음도 듭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들을 필요로하는 이들이 세상에 아직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이 딜레마 속에서 더 고생해야 하는 것을 알더라도 더 남아서 세상에 필요한 일을 하고 주님이 부르는 순간까지 기다려야 함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겠습니다.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을 수 있는 시간은 이 세상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최대한 주님의 영광을 위해 고생하는 것을 선택합시다.

 

<사랑한다는 말은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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