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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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참된 할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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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 [estherlove] 쪽지 캡슐

2010-11-04 ㅣ No.59710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31 주간 목요일 -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한 자매님으로부터 슬프지만 기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당신의 큰 아들이 사형수로 복역하고 있었는데 그 곳에 찾아오시는 신부님과 수녀님에 의해 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자매님과 다른 가족들도 큰 아들 덕분에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형수 아들이 온 가정에 신앙을 심어주게 된 것입니다.

그 자매님께서 저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실 때는 아드님의 사형 집행이 있고 난 후 며칠 안 돼서 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죽었어도 어머니는 크게 슬퍼하는 기색이 아니었습니다. 말썽꾸러기 아들이 죽어서가 아니라 좋은 곳에 갔다는 확신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사형장으로 끌려갈 때 웃으며 들어갔어요. 다른 종교를 가지거나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형수들은 안 끌려가려고 울며불며 발버둥을 쳤지만 내 아들은 당당하게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갔습니다. 그 때 울던 사람들은 그것을 지켜보던 우리들이었습니다. 제 아들은 ‘신부님, 술 담배 건강에 안 좋으니 끊으세요. 수녀님, 우시지 마세요. 저 좋은데 가잖아요.’라고 하며 오히려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로했어요.”

이 분은 청부살인으로 사형을 구형받았고 그렇게 우리나라에서 집행된 마지막 사형집행 때 돌아가셨습니다. 물론 그 분으로 인해 피해를 당하신 분들은 그 분이 신앙을 가져 구원을 받게 되어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살게 되는 것에 대해 분노가 치밀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정말로 하늘나라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합니다. 예수님께서 한 영혼을 구원하여 기뻐하기 때문에 나도 기쁜 것이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슬플 때 함께 슬퍼해주는 것보다 기쁠 때 함께 기뻐해주는 사람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정작 자신들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회개하는 죄인들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죄인은 누구일까요?

 

예전에 한 청년이 고시원에 불을 내고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칼로 살해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세상이 자신을 무시하여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그런 행동을 했다고 합니다.

인터넷으로 이 뉴스를 읽으면서 밑에 있는 댓글들을 보았습니다. 하나같이 다 ‘그런 인간은 사형시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전 그런 말 하는 사람들 중에 신자가 없기를 바랐습니다.

잘못해서 다 죽어야 한다면 구원받을 인간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무시하는 사람을 미워해 본 적이 없습니까?

 

구약의 요나 예언자가 그런 과정을 겪습니다.

하느님은 그를 앗시리아 니느웨로 보내어 40일 안에 그 도시가 망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게 합니다. 앗시리아는 당시로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남유다에게도 큰 위협이 되던 적국이었고 니느웨는 그 수도였습니다.

요나는 적국 수도에 가서 그런 예언을 하는 것도 싫었고 그래서 그들이 회개하게 되는 것은 더 싫었습니다. 결국 그는 주님의 뜻으로부터 도망을 치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물고기 뱃속에 가두어 그 곳까지 데려다 놓습니다.

어쩔 수 없이 요나는 예언을 하는 둥 마는 둥 합니다. 안타깝게도 그 예언을 들은 니느웨 백성은 모두 거친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며 회개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이에 하느님은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멸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요나는 성이 머리끝까지 납니다. 적국의 수도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거기까지 보낸 하느님이 원망스러워 자신을 죽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던 중 햇볕이 너무 뜨거워 견딜 수 없었는데 하느님은 그의 옆에서 나무가 자라게 하여 그 빛을 가려줍니다. 그래서 조금 살만 했는데 이번에는 바로 벌레들을 보내시어 그 나무를 갉아먹게 하십니다.

요나는 미쳐버릴 지경입니다. 하나 있던 위로마저 없어지니 불평밖에 남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네가 노력도 하지 않은 그 나무를 그렇게 소중하게 여긴다면 나에게 저 많은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소중하겠느냐?”하시며 당신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요나는 결국 회개해야 할 사람은 니느웨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보다 더 몰인정했던 자신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마리아 고레띠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마리아 고레띠는 열 살 남짓한 나이에 자신의 어머니가 일해 주는 가족의 아들에게 살해를 당합니다. 신앙심이 있었던 고레띠는 그러면 안 된다고 손바닥을 올립니다. 자신을 받아주지 않아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청년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칼로 자신에게 내민 손바닥부터 시작하여 온 몸을 수십 차례 찌릅니다. 그러나 마리아 고레띠는 아직 숨이 붙어있습니다. 그렇지만 워낙 상처가 많고 깊어서 살아날 가능성은 없습니다. 거의 하루를 꼬박 죽음의 고통 속에서 지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없느냐는 신부님의 말씀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저를 찌른 그 사람과 함께 천국에 있고 싶어요.”

그러나 청년은 감옥에 갇혀서도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을 때 그에게 마리아 고레띠가 꽃을 들고 나타납니다. 이것을 경험한 청년은 완전히 회개하고 감옥살이를 마치고는 곧바로 고레띠의 어머니를 찾아가 용서를 청합니다. 고레띠의 어머니도 딸이 용서를 했으니 당신도 용서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수도원에 들어가 평생 정원사 일을 하며 자신의 죄를 보속하고 바티칸 광장에서 있었던 마리아 고레띠의 시성식에도 참석하게 됩니다. 물론 지금은 두 사람이 천국에 함께 있습니다.

 

미운 사람이 잘 되면 정말 배가 아픕니다. 그러나 잘못 되면 은근슬쩍 슬픈 척을 해 줍니다. 정말 함께 기뻐해 주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라도 죄인들의 회개를 기뻐합시다. 아니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희생을 바치고 기도합시다. 이것이 예수님의 뜻이고 예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신창원씨도 많은 죄를 지었지만 근래의 편지에는 사랑한다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얼마나 큰 사랑이 필요했을까요? 그 사랑이 한 사람을 구원하였고 그 모습은 너무 아름답습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참된 할례

 

사람의 마음이 참으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안 것은 대학 다니며 누구를 좋아할 때였습니다. 사실 처음 누가 좋아질 때는 그 사람 외에는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신의를 지켜야한다는 생각에 지나가는 예쁜 사람을 쳐다본 것에서도 죄책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서서히 상대에게서 서운한 것이 느껴지고 그 사람이 예전처럼 나를 완전히 채워주지 못한다는 것을 느낄 때는 마음이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특별히 더 예뻐 보이고 그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면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다가올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냥 ‘만나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사람에게는 느낄 수 없는 잊혔던 감정들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몇 번 만나 이야기 하는 것은 바람피우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그러고 나서 본래 좋아하는 상대에게 더 잘 해주면 된다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바람피우고 이혼하고 하는 연속극을 보며 ‘왜들 저렇게 사나, 나는 결혼해서 절대로 저렇게 되지 말아야겠다!’라는 생각을 쉽게 하지만, 실제로 살다보면 그런 것이 꼭 남의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육체의 나약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감정도 믿지 못하게 되고, 혹 상대도 그런 사람이었고 그렇게 자신을 떠나가는 것을 체험하면, 나뿐만 아니라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됩니다.

 

사랑은 사람을 믿는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믿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사람을 믿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조차도 그런 믿을 수 없는 사람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람 안에 잠재되어 있는 ‘육적인 감정’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육체적인 감정에 따라 자주 변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사랑은 믿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자주 변하는 육체적 감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아일랜드에 갔더니 하루에도 날씨가 수십 번씩 변합니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 말로는 ‘아일랜드 날씨는 하루에 4계절이 다 들어있다.’라고 합니다. 물론 영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나라에서 비가 안 오는 때라도 우산을 들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자주 변하는 날씨는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맑다고 하루 종일 맑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에서 “육적인 것을 신뢰하지 않는 우리야말로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을 믿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나를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 안에 있는 ‘육체적 감정들’을 믿지 말라는 말입니다.

육체가 원하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인정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고, 높은 사람이 되고 싶고, 인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부자가 되고 싶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많이 자고 싶고, 맛있는 걸 먹고 싶고, 멋지게 보이고 싶은 등의 성향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위해 자신의 색깔을 쉽게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육체적인 사람입니다.

성경에서는 사람에게 보증을 서주지 말라고 합니다. 돈이 필요할 당시는 모든 책임을 다 질 듯이 굽실거리다가도 상황이 바뀌면 어떤 사람도 쉽게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것이 사람의 육체가 느끼는 감정입니다.

 

이런 육체적인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즉,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것을 보며 마치 그 죄인들 중 하나처럼 취급하려합니다. 자신들이 그런 처지면 당연히 그들이 즐기는 방식으로 즐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은 제가 인터넷에 글을 올린다고 하면, “이젠 큰물에서 놀려고 하시나봐. 역시 인기관리는 잘해.”라고 하며 꼭 좋지만은 않은 시선을 보내는 분들도 있습니다. 각자 자신이 쓴 안경대로 보는 것이니 그런 말에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체를 믿지 않는 참으로 할례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육체를 믿지 않는 참으로 할례 받은 사람”이란 뜻은 우선 나부터라도 영적인 사람이 되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뜻입니다. 처음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한 예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더 쉽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나중엔 사람을 믿는 것보다 변하지 않는 하느님을 믿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처럼 변하지 않고 누구라도 믿을 수 있는 그런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할례, 즉 세례를 받은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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