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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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진리의 협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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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 [estherlove] 쪽지 캡슐

2010-11-13 ㅣ No.59927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32 주간 토요일 - 하느님을 들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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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 공부하면 손님이 참 많이 찾아옵니다. 바쁘기는 하지만 연락을 하고 오는 손님을 그냥 보낼 수는 없습니다. 지금은 좀 한가한 편이지만 바쁠 때 손님이 많이 오면 힘들어지기도 합니다.

손님이 오면 거의 하루 종일 걸어야 하고 공부도 할 수 없기에 몸도 마음도 힘이 드는데 언제 한 번은 새끼발가락 옆에 난 티눈 때문에 걷기가 더 힘든 것이었습니다. 걷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티눈이 있어도 뺄 생각을 잘 하지 않았는데 꼭 많이 걸어야 하는 날 더 아파오는 것이었습니다.

다니면서 계속 빨리 티눈을 빼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집에 들어와서는 피곤해서 쓰러져 잤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학교에 가려고 하는데 티눈이 또 생각났습니다. 아침에 바쁜 와중에도 불구하고 티눈을 빼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학교 갈 때 또 괴롭힐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침을 먹지 않는 한이 있어도 티눈부터 빼야겠다고 생각했고 앉아서 손톱깎이로 티눈을 뜯어냈습니다. 결국 아침은 먹지 못했지만 티눈을 때내니 속이 시원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꾸준한 기도의 필요성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재판관은 하느님도 안 무서워하는 사람이었지만 과부가 자꾸 괴롭히니 귀찮아서라도 그의 청을 들어주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재판관은 마치 발에 난 티눈처럼 과부의 청원이 귀찮고 싫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빨리 해결을 짓고 싶었을 것입니다. 저는 어제 재판관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마치시며 이렇게 결론을 지으십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창세기 32장엔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불리게 된 경위가 나옵니다.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때의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야뽁강을 건너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느닷없이 어떤 사람이 나타납니다. 야곱은 밤새 그 사람과 씨름을 합니다. 야곱을 이기고 빨리 가려던 그 사람은 야곱이 끈질기게 축복을 청하자 야곱의 엉덩이를 쳐서 환도뼈를 부러뜨립니다. 날이 밝아오는데도 야곱이 쩔뚝거리며 끈질기게 축복을 청합니다. 그 사람은 결국 야곱에게 져 축복을 해 주시고 이름도 이스라엘로 바꾸어주고 떠납니다. 야곱과 씨름을 했던 사람은 하느님이십니다.

 

과연 하느님께서 인간과 씨름을 해서 질 수 있을까요? 이는 축복을 얻어내기 위한 야곱의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습니다. 뼈가 부러지는 아픔으로 이젠 포기해 벌릴까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에 반해 우리는 기도를 드리다가도 안 될 듯싶으면 금방 포기해버립니다. 그러나 청원은 마치 티눈처럼 하느님을 괴롭혀 은총을 얻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금방 포기해버리는 것은 어쩌면 믿음이 약해서일지도 모릅니다. 나무 밑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고 사과가 떨어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은총도 쟁취해 내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무엇을 사달라고 할 때 부모가 응답이 없으면 사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끝까지 조릅니다. 몇 대 맞고서 절대 안 된다는 것을 부모가 보여주기 전까지는 끝까지 달려듭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그런 믿음을 보여야합니다.

 

성당에 안 나오는 남편, 사업의 어려움, 공부 등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경에 열두 해씩이나 하혈병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께서 원하지도 않았는데 그 분의 옷자락에 손을 댐으로써 병을 치유합니다. 하느님은 그런 믿음으로 들볶임을 당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미국에서 금광을 찾던 한 사람이 버려진 광산을 하나 싼 값에 샀습니다. 그 사람은 그 폐광을 더 파 들어가면 반드시 금맥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금맥을 발견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다시 그 폐광을 팔아버렸습니다. 새로 그 탄광을 산 사람이 곡괭이질을 해서 1미터 정도 더 파 들어가자 누런 금광이 발견되었습니다. 만약 처음 사람이 한 번만 더 휘둘렀다면 평생의 노고가 보상받았을 텐데 마지막에 포기했기 때문에 평생 고생해서 남 좋은 일만 시키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한 번만 더 하면 들어주시려고 준비하고 있을 수 있음을 기억하며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합니다.

물은 100도에 이르지 않으면 결코 끓지 않습니다. 단 1도 차이로 물이 끓지 않는 것처럼, 혹은 단 1점 차이로 시험에서 떨어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도도 100도까지 완전히 도달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도 그 기도가 완전해질 때까지 기다립니다. 99도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지금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말아야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지향으로 기도를 하던 마치 하느님의 발의 티눈처럼 기어코 빼내지 않고는 못 배기실 정도의 집념으로 청원을 드려야겠습니다.

 

진리의 협조자

 

차에 부착하는 성물로 예수님, 성모님 다음으로 많은 것이 여행의 주보성인인 성 크리스토포로의 상입니다. 그 성물은 한 커다란 사람이 지팡이를 들고 있고 어깨엔 아기를 메고 물을 건너는 형상으로 되어있습니다.

이 성인은 어려서부터 몸집이 매우 크고 힘이 장사였습니다. 그의 처음 이름은 레프로부스(신이 저버린 사람이란 뜻의 라틴어)였고 자기보다 힘 센 사람을 만나면 그를 주인으로 섬기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가 처음 찾아간 것은 세상 사람이 벌벌 떨던 당시의 임금이었습니다.

레프로부스는 한동안 왕을 섬겼는데 어느 날 궁정 가수가 궁정에서 노래 부르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노래 가사는 거듭해서 악마에 대한 언급이었습니다. 왕은 그 때마다 몸을 움츠리며 뭐라 중얼거렸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레프로부스가 왜 그러느냐고 다그쳐묻자 왕은 마지못해 자신은 악마를 가장 두려워하여 악마로부터 화를 당하지 않으려고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크게 실망한 나머지 레프로부스는 악마를 찾아 세상을 헤매고 다닙니다. 그러다가 사막에서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무시무시한 한 집단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가장 무서워 보이는 이가 곧 악마의 우두머리임을 알고 그를 따를 것을 맹세합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이상한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 악마의 무리가 십자모양으로 드리워진 그림자를 피하여 길을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연유를 다그쳐묻자 좀처럼 입을 열지 않던 악마는 마침내 “저 모양의 나무 위에서 죽었다 부활한 이가 내가 두려워하는 유일한 사람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느냐고 물으며 온 세상을 다닙니다. 그러다 안티오키아의 주교 바빌라를 만나 세례를 받고 새로운 이름 크리스토포로를 갖게 됩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을 묻자 주교는, 기도와 단식을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할 줄도 모르고, 단식을 하느니 죽는 편이 낫다고 하였습니다. 주교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기 가까이에 있는 강에 가보시오. 그 강을 건너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많소. 당신은 몸집이 크니 강가에 움막을 짓고 살면서 강을 건너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거든 어깨에 메고 건네주시오. 당신이 그리스도를 위해 봉사하는 동안 그 분께서 당신에게 나타나시도록 기도를 드리겠소.”

오랜 세월이 흘렀고 몸집이 컸던 그는 어깨에 사람을 메고 장대에 몸을 의지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무사히 건네주었습니다. 나이가 말년에 찼을 때도 꾸준히 그 일을 하고 있었는데 한 번은 어린 아이 하나를 건네주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업고 물속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무거워짐을 느꼈습니다. 결국엔 그 무게로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속으로, “이상한 일인데?”라고 중얼거렸습니다.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였기에 자신도 물에 휩쓸릴 뻔하였고 간신히 개울을 건넜습니다.

“얘야, 너 때문에 하마터면 나는 죽을 뻔했단다. 너를 메고 있으니 마치 온 세상을 떠멘 것 같더구나.”

“당신은 지금 전 세계를 옮겼고 전 세계를 만든 분을 옮겼습니다. 당신이 찾던 예수가 바로 나입니다.”

아이는 그렇게 사라졌고 크리스토포로의 땅에 꽂아두었던 장대는 하루가 지나자 잎과 열매가 무성한 대추나무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만난 크리스토포로는 너무 기뻐 계속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때 순교하게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요한은 가이오스라는 한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는 이들을 물질적으로 도와줄 것을 청합니다. 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도움을 받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돌보아주면, ‘진리의 협력자’가 된다고 합니다.

제가 병자 봉성체를 할 때, 너무 안 된 집이 있어서 성당에서 해 주는 것이 없냐고 물었습니다. 함께 다니시던 봉사자분이 성당에서 특별히 도와주는 것은 없고, 개신교 청년들이 매주 와서 청소, 빨래, 음식까지 해 주고 간다고 알려주었습니다. 한 사제로서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웠습니다. 성당에서는 봉성체만 해 주는 것이 전부였던 것입니다.

사실 사제가 돈을 내라거나 봉사를 하라고 하는 말은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우선은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성당은 웬만큼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강론 대에선 가난하게 살라고 하면서 돈 이야기를 하는 것은 신자들이 사제를 이상하게 볼 것 같기도 하고, ‘왜 내가 구차하게 돈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하는 생각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요한사도께서 한 사람에게 물질적으로라도 도와달라고 청하는 모습은 복음을 위해서라면 그만큼 누구에게도 낮아질 수 있어야 한다는 모범을 보여줍니다. 복음을 위해서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나의 자존심까지 버리고 도와달라고 청하는 것은 오늘의 요한사도처럼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을 물질적으로 도와주던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사제는 사실 신자들이 내는 돈으로 살아갑니다. 그것만큼도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신자들 앞에서 매우 교만해 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주기만 하고 받는 것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아무 것도 지니지 말고 맞아들이는 집에 들어가서 신세를 지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제나 수도자들만 신자를 위해 무엇을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진리의 협조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협조 안에서 교회가 커지는 것이지 몇 명의 선교사들에 의해서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개신교 목사도 아니지만 십일조를 강조합니다. 우선은 성경말씀대로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감사의 신앙고백이고, 그리스도께서도 하라고 하셨으며, 그런 감사의 봉헌이 곧 미사의 준비이고, 그렇게 진리의 협조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토포로처럼 온 생애를 바쳐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지는 않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안에서 복음전파를 도와야 할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누구는 ‘진리의 협조자’라는 명칭을 받았는데, 누구는 “욕심쟁이”라는 명칭을 받는다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하지 맙시다. 사랑하면 줄 것이 반드시 있는 법입니다. 내가 무엇으로 진리의 협조자가 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면 반드시 우리 성당에서도 나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 아버지 뜻대로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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