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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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상대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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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 [estherlove] 쪽지 캡슐

2010-11-22 ㅣ No.60159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34 주간 월요일 - ‘사람’

 

 

제가 2000년에 처음 유학을 나올 때, 동료 신학생들에게 인사를 하게 되었는데, 저는 공부보다도 ‘사람’ 되어서 돌아오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사람이 되게 하지 않는 공부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였고, 또 제 자신이 온전한 사람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고 느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과의 닮을 모습을 죄를 지으면서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그 모습인 것입니다. 따라서 참 사람이 된다는 의미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이전의 모습을 회복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참 인간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참 인간의 모델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셔서 보이지 않는 아버지만을 계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참 인간의 모습이 어때야 하는지도 동시에 계시하시는 완전한 ‘아담’이십니다.

먼저 그리스도는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받습니다. 세례 때 아버지는 당신의 모든 것인 사랑의 본성을 성령님을 통하여 아들에게 주십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는 비로소 참다운 ‘하느님의 아들’이 됩니다. 아들은 당신이 받은 성령님을 취하고만 있으려하지 않으시고 다시 아버지께 돌려보내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물론 아버지는 당신의 모든 것을 다시 아들에게 보내십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다시 말해서 참다운 사람의 모습이란,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고 또 모든 것을 돌려 드리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라고 하면서 ‘관계’ 안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받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참다운 인간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목마르다!’라고 신음하는 한 명의 걸인을 보고 그런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어야 하겠다고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시간과 생명을 그 사람들을 위해 씁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하나도 남겨 놓지 않았기에 참 하와의 모습을 회복하신 것입니다.

반대로 가리옷 유다는 이미 가진 것도 많음에도 불구하고 돈을 더 가지기 위하여 자신의 스승을 팔아넘깁니다. 이렇게 자신만 생각하고 더 가지려고만 했기 때문에 참 인간의 모습을 잃고 마귀의 모습이 되게 된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잊고 온전히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서로서로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는 가운데 한 몸을 이루어 곧,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를 이루시는 것처럼 인간도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을 때 온전한 ‘사랑’이 되고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사람의 모상이 되시는 것입니다.

 

오늘 로마에서 공부하고 있는 모든 사제들이 모인 가운데 대표 신부님이 강론을 하시는데 제 마음 깊이 반성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대표 신부님은 바쁘신 가운데도 아무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제단 대표를 2년 연속 하고 계신 분이고 올 해는 총무나 서기도 없이 혼자서 일을 다 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좀 도와달라는 말씀으로, “우리는 모두 바쁩니다. 그러나 그렇게 바쁜 것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주려고 할 때, 먼저 나를 생각하게 됩니다.

‘나도 부족한데...’

그러나 그 부족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항상 부족하고 항상 더 가졌으면 하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나눌 줄 아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회복한 인간일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넉넉한 가운데 무엇을 준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 안에서 줄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겐 줄 것이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보는 과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전 두 닢이면 요즘으로는 컵라면이나 하나 사 먹을 수 있을 정도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과부는 자신의 최소 생계비까지 모두 주님께 봉헌 한 것입니다. 그것조차 주님께로부터 받는 것임을 고백하는 신앙행위인 것입니다.

마치 마더 데레사와 마찬가지로, 혹은 ‘나도 부족한데...’라고 생각하는 우리 모습과는 다르게, 자신을 잊고 모든 것을 내어줄 줄 알았기에 참 사람인 것입니다.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에게 ‘사람 좀 돼라.’라고 합니다. 하느님도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참 인간의 모습인 과부의 헌금을 보여주시면서, 그렇게 아담과 하와의 죄로, 또 우리의 죄로 잃어버린 참 인간의 모습을 회복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잊고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참 사람’이 됩시다.

 

상대평가

 

수능 때가 되니 제가 학력고사 볼 때가 생각이 납니다. 어머니는 제가 대학교에 떨어지고 신학교 가기를 바라셔서 아침부터 계란과 미역국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점심도 계란 프라이가 들어간 햄버거를 싸 주셨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모르고 어머니 기도하시는 모습만 생각하고 시험을 치렀습니다. 어머니는 대학 문 밖에서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제가 시험 보는 동안에 아버지와 함께 대공원에 놀러갔다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어쨌건 저는 시험에 붙었습니다.

집이 가난해서 하루에 통학 시간만 해도 3시간이 넘게 걸리며 수원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녔고 과외나 학원 같은 것은 꿈도 못 꾸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한 것은 물론 당연한 말이겠지만, ‘시골에서 가난하게 살면, 서울 강남에서 과외와 좋은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을 당해낼 수가 없겠구나!’였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대학 입시는 ‘절대평가’임으로 이런저런 것들을 따지지 않고, 나오는 결과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 사는 아이들은 좋은 대학 들어가서 계속 잘 살게 되고, 못 사는 아이들은 계속 못 살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입장에선 이런 시험 방식은 참 불공정한 평가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얼마나 공정합니까? 가난한 과부가 동전 몇 개 봉헌 한 것이 부자들 돈다발을 봉헌하는 것보다 더 많이 봉헌했다고 하십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사람을 판단하는 방식은 항상 ‘상대평가’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공정한 평가인 것입니다. 신앙인이라면 무엇을 판단할 때 이렇게 환경을 적용하고 비교하는 상대평가에 익숙해져야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른 것은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는 않았지만 또 대부분의 사도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합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누구 때문에 더 마음이 아프셨을까요? 얼핏 도망친 사도들보다, 직접 예수님의 죽음에 가담한 사람들이 더 잘못이 클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많은 은혜를 베풀었음에도 당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 때문에도 마음 아프셨겠지만, 삼년동안 동고동락하며 수많은 기적과 가르침과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사도들이 당신을 저버리는 것에 더 마음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더 믿고 사랑하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는 것이 모르는 사람에게 그렇게 당하는 것보다 더 마음 아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더 받은 사람은 더 많이 내어놓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자동차가 자전거보다 빠르지 않다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과 비교해서 무언가 다르지 않으면 그리스도께 더 큰 아픔을 드리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못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똑같이 자신에게 준 은총을 주었을 때 자신보다도 더 거룩하게 되지 못할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자신의 거룩함을 절대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은총에 비해 현재 나타난 자신의 모습을 상대 평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자신에겐 겸손해지고, 남에겐 자비로워질 수 있습니다.

사제가 당연히 해야 하는 매일미사 한다는 것이 신자들 앞에서 무슨 자랑거리가 되겠습니까? 그러면서 미사에 나오지 않는 신자들에게 무어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사제가 안 되고 평신도였다면 매일미사에 나올 수 있었을까요? 저는 간신히 주일미사만 나오는 신자였을 것입니다.

또 범죄자들 대부분이 결손가정 출신인데,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그런 환경에서 살았다면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란 자신이 있을까요? 그런데 우리는 왜 그런 사람들은 죽어 마땅하다고 판단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판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만약 무엇을 판단해야 할 일이 생겼다면, 여러 환경을 고려해서 신중하게 평가를 내려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절대평가를 했다면, 오늘의 과부는 가장 적은 액수를 봉헌했지만, 상대평가를 내린다면 가장 많이 봉헌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 중심으로 판단하지 말고 ‘내가 그 사람이었다면’하고 상대편에서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겠습니다.

 

 

 

 

< 사랑한다는 말은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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