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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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람이 살지 않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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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 [estherlove] 쪽지 캡슐

2010-12-01 ㅣ No.60380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대림 1 주간 목요일 - ‘화해’는 없고 ‘싸움’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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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하시며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라서 어떤 어려움이 와도 흔들리지 않지만, 말씀을 듣고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아서 어려움이 밀려오면 자주 어렵사리 지어놓은 집들이 완전히 무너져 버린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르는 신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 말씀을 실천하고 싶지 않은 신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문제는 하고 싶어도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항상 평온하고 싶어도 자주 넘어지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죄를 짓지 말고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때부터 죄를 지어 인류 전체가 행복을 잃었지만 그리스도의 피로 그 죄가 씻겨 결국엔 다시 그리스도와의 혼인으로 행복을 얻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고해성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짓는 죄들을 반복해서 짓습니다. 몇 년 동안을 계속 같은 죄만을 고백하고 매번 다음부터는 짓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지만 또 똑같은 죄를 짓고 맙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면 행복해지고 마음의 평화가 온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말씀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도 이것 때문에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쓴 일기를 읽어본 일이 있습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죄를 짓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어서 그들은 서로 싸운다. 나는 이 싸움을 지켜보는 심판관처럼 서 있다. 그러면 서로 싸우는 이들은 누구인가? 천사와 악마? 아니다. 이들은 내 자신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들이다. 이 싸움이 언제나 끝날까? 그 때까지 내 안에 평화는 없는 것인가?”

사춘기 때 이런 내적 분열은 겪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영과 육의 싸움이 가장 치열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육체가 영을 이기는 때가 더 많아서 많이 위축 되어있는 때였기 때문에 이런 갈등을 일기로 썼던 것 같습니다. 정말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지던 때입니다.

 

이 싸움은 청년이 되어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떤 분은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있는 내 자신들을 서로 화해시켜야 해요. 서로 화해하지 않으면 싸움은 끝나지 않을 거예요.”

참 좋은 말씀처럼 들립니다. 마치 남북통일을 해서 평화를 얻는 것과 같은 ‘내 자신들의 화해’, 그럼으로써 오는 평화. 그러나 그런 평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과 육의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은 하느님으로부터 오고 육은 이미 죄에 물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이 만날 수 없는 것처럼 영과 육도 서로 화해를 이룰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과, 욕망대로 살아야 한다는 육체와의 싸움입니다. 천사와 악마가 영원히 손잡을 수 없는 것처럼 둘은 서로 화해 될 수 없는 원수들입니다. 왜냐하면 원죄가 우리 육체를 오염시켜서 지금의 육체는 죄로만 가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 (로마 8,6)

결국 육체를 완전히 죽이지 않는 이상 생명과 평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화해란 좋은 말이긴 하지만 내 안에 있는 악한 경향을 받아들이겠다는 위험한 말도 됩니다. 화해가 아니라 싸워서 이겨야 평화가 옵니다.

 

반석위에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짓기 위해서 결국 주님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먼저 예수님 자신이 왜 아버지 뜻을 실천하기 위해 40일간 단식하며 자신의 육신과 싸웠었는지부터 묵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육체와 감정에 휘둘리면 아버지의 뜻을 따르려고 해도 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 자신의 육체와 교만부터 이기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성모님께로부터 죄로 물들지 않은 육체를 취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자신의 육체와 치열하게 싸웠다면 우리 인간들의 불쌍한 육신과의 전쟁은 얼마나 치열하겠습니까?

물론 우리의 힘만으로는 육체를 이기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본인이 원하기만 하면 마귀 일곱 들렸던 여인까지 성녀로 만드셨지만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삼년 동안 함께 있으며 가르쳐도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과의 싸움을 멈추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반석위에 집을 지을 때의 반석이란 바로 내 자신의 싸움에서 불안하게 출렁거리지 않는 단단한 내면일 것입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

 

저는 군대 가기 전까지 시골에서 살았었습니다. 군대 첫 휴가를 나왔더니 집이 이사를 해서 집 찾는데 꽤 고생을 했던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는 시골집에 찾아가질 않았습니다. 한 10년 정도 지나서 시골집이 미군부대 확장으로 아주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제야 20년을 넘게 살아왔던 시골집을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형과 함께 찾아간 집은 누가 일부러 무너뜨린 것이 아닌데도 거의 허물어져 있었습니다. 사람이 살지 않으니 스스로 허물어진 것입니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던 집에 들어가면 집이 잘 정돈되어 있어도 왠지 휑한 느낌이 듭니다. 사람이 살지 않으면 사람에게서 나오는 기운이 사라져서 집이 저절로 그렇게 된다고들 합니다. 즉, 주거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기운이 집을 지탱시켜준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이유도 있을 수 있겠지만, 더 객관적으로는 사람이 살지 않으니 집이 조금씩 손상이 갈 때 고쳐주지 못해서 그럴 것이고, 또 불을 때 주지 않으니 벽돌에 습기가 스며들어 벽 자체도 약하게 만들고 나무를 갉아먹는 작은 벌레들도 많아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유야 어쨌든 사람이 살지 않으면 집은 허물어지게 되어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황금 칠을 한 대단히 아름답고 웅장한 건축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순간에 파괴되고 맙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 안에 사셔야 마땅한 하느님을 내쫓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도 각자가 작은 집이고 작은 성전입니다. 인간이 집이라면 집주인은 당연히 그것을 지으신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이 사시지 않으면 인간도 예루살렘과 똑같은 운명을 겪어야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저절로 허물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반석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지킨다는 것은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고 산다는 것을 의미하고,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이 집주인인양 산다는 뜻입니다. 집이 집주인 행세를 하니 결국 그 집은 빈 집이 되어버린 것이니 저절로 허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독서말씀에서 이사야는 이런 집들을 높은 곳에 집을 지어놓은 사람들로 비유합니다. 높이 집을 지었다는 것은 교만을 상징하고 그 교만 때문에 그 집들은 허물어져내려 결국 계곡을 메우게 될 것입니다. 교만이란 내 집을 내 것이라 생각하고 주인을 모시지 않는 사람을 뜻합니다.

하루 종일 기도만 하고 성령세미나에 나가 황홀경에 빠져 율동과 함께 성가를 부르고 자신은 하느님 없이는 살지 못한다는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이야기를 들으니 이상한 종교에 빠져 집에 있던 성물들과 성경을 버리고 벌써 오래 냉담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하느님이 전부인 것처럼 살았지만, 실제로는 그 집에 자기만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만 살고 있었기에 자신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 쉽게 그 쪽으로 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반석 위에 세워진 집은 겉으로만 주님주님 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기도가 전부는 아닙니다. 기도는 실천하기 위한 힘을 얻는 과정이고 참 사랑의 실천은 이웃에게 표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 생명을 주신 것이 그 안에 아버지께서 함께 사심을 증명해주는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사랑이 실천되고 있지 않다면 실제로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집은 언제 무너질지 모릅니다. 내 안에 나의 주님이 사신다는 사실은 그래서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여 목숨을 바칠 수 있다는 것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 내 안에 사는 이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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