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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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가죽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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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 [estherlove] 쪽지 캡슐

2010-12-18 ㅣ No.60776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대림 3 주간 목요일 - 자유와 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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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성소에 대한 올바르지 않은 생각을 지니신 분들을 만납니다. 예를 들면 지금 각자가 살고 있는 길이 바로 주님의 부르심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 분들은 성소를 끊임없이 찾아가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성소는 주님께서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불러주신 것이고 우리가 그것을 따르고 있을 수도 또 따르지 않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서 자유를 빼면, 모든 것이 예정되어있는 대로 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혹은 하느님을 나쁜 분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못 받는데 그것도 주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것은 주님께서 그렇게 섭리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유를 버리면 책임도 없기 때문에 편하겠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동시에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정 적인 생각을 지니신 분들이 자주 하시는 말들이 있습니다. 어떤 좋은 일을 해 놓고도, “제가 했나요, 뭐. 하느님이 하셨지!” 라고 말합니다.

겸손한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 자신과 하느님을 혼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섭리로 도와주셨을 수는 있어도 결국 자신이 한 일입니다. 하느님은 원하시기만 하실 뿐 선택은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악수는 두 사람이 손을 내밀어야 가능합니다. 모든 것은 주님 섭리에 따라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손을 내미느냐 안 내미느냐에 따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느냐 마느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런 결정도 하지 않는다면 천당에 가거나 지옥에 갈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유가 있기 때문에 책임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큰 고민에 빠집니다. 그렇게 순결하고 예쁘기만 했던 약혼녀 마리아가 몇 달 친척집에 다녀오더니 배가 불러서 온 것입니다. 깊은 배신감을 느꼈지만 그는 그녀를 조용히 놓아주기로 합니다. 이 사실이 밖에 알려지면 마리아도 뱃속의 아기도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자초지종을 설명해줍니다. 그는 잠에서 깨어나 깊은 생각에 잠깁니다. 첫 번째는 자신이 꾼 꿈이 정말 사실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닐 수 없을 만큼 주님의 계시는 확실합니다. 어떤 계시든 조그마한 의심이 든다면 그것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속는 일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꿈에서 계시를 주어도 그 사람이 그것을 믿고 그것에 자신의 온 삶을 바칠 수 있을 만큼 확실하게 주십니다.

그리고는 다른 것보다도 약혼녀를 온전히 믿지 못한 것에 대해 큰 후회를 합니다. 그러나 누가 처녀가 성령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했다고 하는데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마리아와 결혼을 하기로 결심하는 선택은 요셉에게 달려있습니다. 요셉은 기계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초대하실 뿐 응답은 각자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 초대에 다 온전히 응하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즈카리야도 그래서 벙어리가 되지 않습니까?

 

우리 각자도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이 있습니다. 소명이 없이 태어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대로 살고 있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는 것은 각자가 다르게 응답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성모님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바오로도, 또 오늘의 요셉도 자신들의 소명을 이렇게 확실히 받았는데 사실 주님께서 나에게 진정 어떤 삶을 요구하시는지 고민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이 그런 확실한 부르심이 있어서 그 뜻을 따른 것이 아니라 이미 그런 분들은 ‘그 분을 따를 자세가 되어 있어서 그런 확실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나이가 서른이 되어가면서도 주님께서 성직자 혹은 수도성소로 불러주셨는지 아니면 결혼성소로 불러주셨는지 고민하는 청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성소의 ‘열쇠’는 내가 지니고 있음을 묵상해 보아야겠습니다.

 

가죽옷

 

아프리카의 눈물이란 다큐멘터리를 보다보니 한 부족 남자들은 세끼 식사를 소의 피로만 때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소의 고기를 먹는 것보다 매 끼니마다 살아있는 소의 피를 받아서 마시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소의 피를 빼서 마시기 위해 모여든 남자들이 조금이나마 몸에 걸치고 있는 것까지도 다 벗고 알몸으로 식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소는 몸에 무엇을 걸치는 것을 싫어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스페인 투우경기를 할 때 커다란 천이 휘날리는 것을 보면 소가 화가 나는 이유와 같나봅니다. 어쩌면 짐승들은 인간이 옷을 걸치는 것이 전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 것을 아는 것 같습니다.

텔레비전에서 타잔도 더운 밀림 속에서도 꼭 그 부위는 가립니다. 또 원더우먼도 변신하면 수영복차림이 됩니다. 만약 그 정도라도 가리지 않는다면 성인용이 되겠지요. 우리는 이런 것에 익숙해져있습니다. 그리고 그냥 ‘부끄러운 부분’이라 가리는 것이라고만 생각하며 넘어갑니다.

사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나서 처음으로 그 부위를 가렸습니다. 처음엔 급하니 나뭇잎을 엮어 가렸습니다. 사람이 가리는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는 부위가 되어버리니 자신도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는 것을 보시고는 바로 이들이 죄를 지었음을 아셨습니다.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내가 따먹지 말라고 일러둔 나무열매를 네가 따먹었구나!” (창세 3, 11)

인간이 죄를 지은 것을 안 하느님의 행동은 그들의 죄를 들추어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힘겹게 가리고 있는 것을 들추어내어 창피를 주고 혼내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죄를 지은 것을 알면서 그들의 부끄러움을 더 잘 숨길 수 있도록 이번에는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과 사람의 다른 면입니다.

유영철은 등록금을 가져오지 않는다고 아이들 앞에서 선생님이 꾸짖었을 때 자신 안에 악마가 들어왔다고 하였습니다. 가정방문을 마친 선생님이 학생들 앞에서 저의 집이 쓰러져갈 정도로 가난하다고 이야기 했을 때 저도 선생님을 좋게 볼 수 없었습니다.

또 지금은 가톨릭 내에서도 서로서로 비판하며 과거의 일들을 들추어내며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는 모습이 9시 뉴스에까지도 나오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이런 모습들은 부끄러운 곳을 더 감싸주기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하느님의 마음과는 멀어 보입니다. 가리옷 유다가 끝까지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배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당신 목숨을 걸면서까지 그의 잘못을 동료들에게 들추어내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정의를 위해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비판한다고 하지만, 실제적으로 그러면서 자기 자신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교만의 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은 좀처럼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들추어내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 희생으로 자신을 들어 높이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많은 험담 중에 그것을 듣는 사람들의 단점도 몇 가지씩은 들어있기 때문에 누구도 험담 잘 하는 사람 곁에는 좀처럼 가려하지 않습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고 낮은 곳에 모이는 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바로 하느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혔던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얌전하기만 했던 약혼녀가 몇 달 친척집에 갔다 온다고 하더니 임신이 되어 왔습니다. 자신은 함께 잠자리를 한 적이 없기 때문에 틀림없이 신의를 저버린 것입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성경은 이렇게 자신까지 배반한 약혼녀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그 책임을 자신이 다 떠맡으려고 하는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정의합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상대를 판단하고 잘못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품어주고 감싸주는 사람입니다. 우리들도 남의 잘못을 들추어내고 험담하면서 불의한 사람이 되지 말고, 항상 감싸주는 요셉성인과 같은 의로운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평화를 너에게 주노라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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