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지상 어머니 교회의 모델 엘리사벳

스크랩 인쇄

김현아 [estherlove] 쪽지 캡슐

2010-12-21 ㅣ No.60838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대림 제4주간 화요일 - 행복하십니다, 믿으신 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목록으로 돌아갑니다.

 

저의 집은 매우 가난하였습니다. 한 번은 신학교에서 기도를 마치고 함께 밥을 먹기 위해 내려가고 있는데 저의 목 뒤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휴 촌스러워!”

아마 제 이름까지 말했었는지 저는 그것이 저를 향해 하는 말임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제 이름 자체가 촌스러운데다 워낙 촌스럽게 컸기에 그 촌티란 것이 도시에서만 살아온 이들에겐 어렵지 않게 보이나봅니다. 젊은 사제가 뭐 얼마나 시골스럽게 컸을까 생각도 하실 수 있으시겠지만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동네에 전기가 들어왔다고 한다면 환경이 어땠는지 대충 짐작을 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 때는 유치원이 있는 줄도 몰랐고 우유 먹을 돈도 없었고 신발 살 돈도 없었고 촛불 켜 놓고 공부하였고 겨울엔 따듯한 물이 모자라 형이 씻은 물에 또 씻어야 했고 자동차 배터리를 충전시켜 와서 9인치 흑백텔레비전을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사제가 된 지금 이런 모든 것들이 저의 경험을 풍부하게 하기 위한 하느님의 은총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지만 어렸을 때의 가난했던 경험들은 밤하늘의 보석처럼 제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아직도 좋은 묵상거리와 강론거리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제가 사제가 되지 않았고 세상을 비관하여 사는 사람이었으면 그 과거를 어떻게 보게 되었을까요?

‘난 태어날 때부터 지지리 복도 없었지. 우유도 못 먹어서 키도 못 컸지, 과외도 한 번 못하고 하숙도 한 번 못해서 몇 시간씩 통학하며 공부도 제대로 할 수 없었지. 그렇다고 세상이 나에게 해 준 것이 뭐가 있어? 이놈의 세상!’

어쩌면 그 가난이 지금의 비관적인 삶의 핑계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것은 저에게 커다란 선물을 해 주었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그런 것들을 겪으며 산 것을 하느님께 너무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저와 같은 연령대에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도 거의 없고 또 강론에서 보시면 아시지만 저의 많은 묵상 자료들이 어렸을 때의 어려운 경험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가난이 너무 자랑스럽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가난이란 것을 조금은 알기 때문입니다.

 

제 기억 속에 남아있는 가족의 가장 따듯한 이미지 중에 하나는 전기가 처음 들어왔을 때 전기밥솥 주위에 둘러 앉아 자동으로 밥이 되는 것을 보고 온 가족이 놀라고 신기해하던 모습입니다. 잘 살게 되면서 경험하지 못하게 되었던 수많은 것들을 미리 경험할 수 있는 은총을 주셨던 주님을 찬미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로마 8,28)

믿음이 있다면 모든 것이 은총으로 변합니다. 물론 어떤 것들은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는 고통일지라도 믿음의 눈으로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사랑의 섭리입니다. 고통이 믿음을 통해서 그렇게 새로운 희망과 기쁨의 싹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 성모님의 복되심이 그 분의 믿음 덕이라고 칭송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믿지 않아 벙어리가 되었던 즈카리아에 비해서 성모님은 믿어서 행복한 분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삶은 일곱 개의 칼로 심장을 찔리는 고통의 연속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뜻을 따르고 있다는 양심의 위안으로 평안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런 믿음으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단 한 시간도 누려보지 못합니다.

 

성모님이 믿음으로 행복하신 분이시라면 우리도 성모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신앙인의 모범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겸손하여 믿을 줄 아셨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자아를 버린 겸손한 사람에게만 성령의 은총이 내려와 믿을 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항상 하나입니다. 성모님처럼 겸손하고 깨끗해집시다. 그러면 믿음과 행복을 저절로 얻게 될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 깨끗한 마음의 구유에 새로 태어나게 되고 우리와 한 몸이 되실 ‘성체’이십니다.

 

지상 어머니 교회의 모델 엘리사벳

 

사람들을 만날 때 가끔은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맞나?’라고 느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존재 이유를 느끼지 못할 때가 그렇습니다.

돈 천원이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지만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나 북한으로 가면 사람을 며칠 더 살릴 수 있는 돈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돈은 당연히 더 가치를 인정받는 곳으로 흘러가야합니다. 저는 있어야 할 자리를 결정해야 할 때 항상 이것을 기준으로 결정합니다. 예수님께서 유다 지도자들이 아닌 가난한 자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했던 것도 이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왜 하필 엘리사벳을 찾아보았느냐고 질문하시는 분들이 종종 계십니다. 사실 이것을 궁금해 하고 묵상하는 것은 하느님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드렸듯이 성모님도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아셨습니다. 성모님은 먼저 고민하셨을 것입니다. ‘요셉과 함께 있어야하는가?’ 물론 요셉과 항상 있었다면 요셉이 몇 달 만에 갑자기 임신한 약혼녀를 보아야 했던 충격과 아픔을 덜 주고 설득하기도 쉬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모님은 엘리사벳과 함께 있기를 선택합니다.

전에 요셉이 성모님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까지 받아들이는 지상교회의 모델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요셉과 마찬가지로 엘리사벳도 지상교회의 모델입니다.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엘리사벳은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어머니로서의 교회의 모델입니다. 엘리사벳의 태중에 잉태된 요한은 바로 교회 안에서 성령으로 새롭게 탄생하는 우리 자신들을 상징합니다.

만약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에게 오시지 않았다면, 또 엘리사벳이 성모님을 모셔드리지 않았다면, 태중의 요한은 그렇게 기뻐 뛰놀지 못했을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성모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떤 누구도 새로 태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성모님을 통해 오시는 성령님이 임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먼저 성령님을 모시고 그리스도를 잉태하셨습니다. 즉, 성모님은 성령님의 그릇이고 이런 면에서 성령강림도 성모님이 교회에 함께 계시지 않았다면 온전히 일어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은총을 받을 그릇이 온전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하신 성령님도 동시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모님을 받아들인 교회는 물과 성령으로 우리들을 새로 태어나게 합니다.

우리가 보듯이 성령님은 엘리사벳을 통해 태중의 아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이것이 요한의 세례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의 몸에서 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큰 이는 없다고 하신 것은, 세례자 요한만이 이미 엘리사벳의 태중에서 세례를 받고 원죄가 사해진 채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의 은사를 듣고 성령으로 가득 차 성모님을 주님의 어머니라 부르며 자신의 태중의 아들도 기쁨으로 뛰놀았다고 합니다. 기쁨은 성령님의 아홉 열매 중 하나입니다. 아기가 기쁨으로 뛰놀았다는 말은 이미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음을 의미하고, 우리 모두는 교회에서 이런 모습으로 태어났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성모님처럼 성령이 아직 임하지 않은 가난한 곳입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선교는 우리가 가진 가장 귀중한 것, 즉 성령님을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에게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것을 아주 잘 실천한 인물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길을 닦는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먼저 교회 안에서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나누어 줄 성령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타볼산에서 내려와 다시 믿지 못하는 백성에게 가야하는 것은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한 모델을 따르는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먼저 당신 자신을 인간들을 위해 내어주신 것부터 선교는 시작되었습니다.

빛의 예식 때 이미 촛불이 붙여진 사람이 아직 촛불에 불을 붙이지 않은 사람에게 불을 전달해주는 것과 똑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성령의 불을 아직 어둠속에 있는 사람에게 전달해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도, 내가 가진 것들이 가야 할 자리도 모두 그것을 꼭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고 아직 그것들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것도 나눌 줄 모른다면 영적인 것을 나눈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성모님이 육체는 가지 않고 영만 엘리사벳에게 갔다고 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몸소 엘리사벳을 방문했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탄을 위한 새로운 준비는 물질적으로도 영적으로도 가난한 사람과 함께 나눌 줄 아는 것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눌 줄 아는 사람에게 무엇이든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평화가 될 것이고 아기 예수님이 될 것입니다.

 
 
 

 

< 평화를 너에게 주노라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919 3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