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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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4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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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corenelia] 쪽지 캡슐

2024-03-16 ㅣ No.170641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요한 7,40-53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인터넷에서 본 <학사 석사 박사 교수의 차이>라는 유머글입니다. ‘학사 들은 것은 많은데 설명할 수는 없는 상태’, ‘석사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 이제 조금 아는 상태’, ‘박사 나만 모르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남들도 다 모른다는걸 깨달은 상태’, ‘교수 어차피 아무도 모르니 끝까지 우겨봐야겠다고 다짐하는 상태’. 누군가 웃자고 쓴 글이지만 이 안에는 인간의 무지에 대한 뼈저린 성찰이 담겨있는거 같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대철학자인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라’고 했을 정도로 아는게 별로 없는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그 알량한 지식 몇 가지로 남들 앞에서 또 얼마나 잘난 척들을 하고 나보다 모르는 이들을 무시하는지요?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다 꿰뚫고 계시는 전지하신 하느님께서 그런 우리 모습을 보면 얼마나 기가 차실까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지 못하고, 자기가 모든걸 다 안다는, 그러니 자기 말이 옳다는 교만과 독선에 빠지면 내가 아는 그 얕은 지식이 내가 진리로 다가가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됩니다. 우리는 그 상태를 일컬어 ‘아는게 병이다’라고 하지요. 그런 점은 하느님에 대한 앎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체험과 깨달음을 통해 하느님에 대해 알게 된 점들이 그분을 더욱 깊이 사랑하게 하고 그분과의 일치를 더욱 갈망하게 만든다면 그건 우리 구원에 약이 되는 참된 앎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섣불리 판단하게 하고 남들 앞에서 나를 드높이려고 하며 나보다 상대적으로 모르는 이들을 무시하게 만든다면 우리 구원에 병이 되는 거짓 앎이 되지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대한 연구를 통해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지식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지식을 발판으로 삼아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갔으면 참 좋았을텐데 그러질 않습니다.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는 자기들만이 하느님의 뜻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교만에 빠집니다. 그 교만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행동의 옳고 그름을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려 듭니다. 누군가 자기들의 권위와 기득권에 도전하는걸 절대 참지 못하고 쉽게 분노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으니 그 진면목이 보일리가 없지요. 그들 눈에 예수님은 이방인 지역에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다니는 보잘 것 없는 ‘시골 촌뜨기’일 뿐입니다.

 

그에 비해 예수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행적을 눈여겨 보았던 사람들은 그분에 대한 그 어떤 지식도 지니고 있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참모습을 알아보았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지니고 계신 참된 권위도 강하게 체험했지요. 최고의회 의원이라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먼저 예수님을 찾아가 그분과 대화를 나누었던 니코데모가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그분 말씀을 열심히 듣던 수많은 군중들이 그랬습니다. 그들 마음 속에 구원의 진리를 알고자 하는 갈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세주께서 만들어가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 속에 그런 갈망과 희망을 지니고 있으면 짙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교만과 판단으로 진실에 눈 감고 있습니까? 아니면 갈망과 희망으로 진리를 찾고 있습니까?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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