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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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7일 주님수난 성지주일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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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규 [vegabond] 쪽지 캡슐

2011-04-17 ㅣ No.63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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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7일 주님수난 성지주일 - 마태오 26,14ㅡ27,66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가장 큰 하느님 사랑의 표시, 자유의지>

 

 

    유다의 배신을 묵상하며 지난 세월 예수님께 대한 저의 배신을 떠올려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저를 배신했던 그 누군가를 떠올려봅니다.

 

    나약한 인간이기에, 유한한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우리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 그리고 우리 인간 사이에서 서로 배신을 주고받는가 봅니다.

 

    유다의 죄와 배신, 그리고 우리들의 죄와 배신을 생각할 때 마다 떠오르는 의문 한 가지가 있습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선만 창조하지 않으셨을까? 왜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만 이 세상에 보내지 않으셨을까? 왜 하느님께서는 안 그래도 나약하고 방황하고 흔들리는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하게 만드는가?

 

    아마도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각자의 나아갈 방향이나 앞으로 전개될 삶의 유형을 미리 딱 규정하여 놓으셨다면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로봇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꼭두각시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는 것, 자신의 삶의 방향을 스스로 엮어가며 독자적으로 결정한 권리를 부여하셨다는 것, 그것은 그만큼 우리를 존중하신다는 표시입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시입니다. 그만큼 우리를 배려하신다는 표시입니다.

 

    때로 우리가 심각한 죄 중에 살아간다할지라도, 우리가 사랑 자체이신 그분을 떠나간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분을 철저하게도 배반한다 할지라도, 하느님 그분은 그냥 그대로 계시는 분이십니다.

 

    왜 그렇게 죄를 지었냐고, 왜 그 따위로 살아 가냐고, 언제 인간될 거냐고, 단 한 번도 윽박지르지 않으십니다. 그저 바라보고만 계십니다. 그저 기다리기만 하십니다. 그저 다시 한 번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도 다 헤아리고 계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제자들의 내면을 정확하게 꿰뚫고 계시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유다의 속마음을 어찌 모르셨겠습니까? 유다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던 파장을 왜 눈치 채지 못하셨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기다리십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유다에게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자유롭게 선택할 자유를 주십니다.

 

    제가 예수님 입장이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배신의 조짐이 포착되자마자 즉시 유다의 그런 상황에 대해 다른 제자들에게 떠벌렸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유다를 사무실에 불러 앉혀놓고 인생 그렇게 살면 되냐고 혼냈을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마음 바꿔먹으라고 닦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함구하십니다. 다른 제자들이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하게 하십니다. 다른 제자들로부터 구박받지 못하게 배려하십니다. 주도권을 유다에게 주십니다. 그가 결정할 수 있도록, 그가 스스로 회복할 수 있도록, 그가 자발적으로 돌아설 수 있도록 참아주십니다.

 

    참으로 무한한 예수님의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녕 바보 같은 예수님의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사고로는 도저히 납득 안가는 어처구니없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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