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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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4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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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corenelia] 쪽지 캡슐

2024-03-15 ㅣ No.170616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요한 7,1-2.10.25-30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의 시기적 배경이 되는 것은 ‘초막절’입니다. 초막절은 수확철에 도둑들로부터 가을걷이를 지키기 위해 농장 한 켠에 초막을 짓고 지내던 가나안 사람들의 전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전통이 유다인들에게 받아들여져서, 이집트를 탈출한 후 약속된 땅에 들어오기 전까지 광야에 초막을 짓고 살았던 그 옛시절을 기억하고 그렇게 자신들을 구원으로 이끄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되새기는 종교적 축제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초막절이 되면 집 밖에 초막을 짓고 거기서 일주일을 지냅니다. 모든 것이 갖춰진 안락한 집을 두고 바깥 생활을 하는 것이 불편하지만, 초막절이 지나면 자기들이 돌아갈 집이 있음에 감사하며, 또한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고 하느님께서 계신 집으로 돌아갈 것을 기약하며 기꺼이 그 불편을 감수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유다인들에게 있어 초막절은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깊이 묵상하는 일종의 ‘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초막절 기간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자 그분을 본 사람들이 웅성거립니다.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디서 오셨는지 그 신원과 정체성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 무지한 것은 물론이고, 그분에 관해 알고 있는 인간적인 정보에도 오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분이 ‘나자렛’이라는 작은 시골마을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분의 어머니가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마리아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는 그 얼마 안되는 정보가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메시아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획기적인 방법으로 등장해야 하며, 그가 어디서 왔는지를 아무도 몰라야만 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소명을 완전히 이룰 때까지 하느님의 현존 안에 숨겨져 있는 ‘신비’로운 존재여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으니 그분을 ‘메시아’로 받아들여야 할 지 혼란스러웠던 겁니다. 그들의 어설픈 앎이 ‘병’이 된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나자렛이 아닌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예수님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는 셈입니다. 또한 그들은 ‘하느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 그리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떤 뜻을 가지고 그분을 이 세상에 보내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엄밀히 따지면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봐야 옳지요. 예수님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에 대해 아는 몇 가지 정보로 그분을 파악하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그런 세속적인 지식으로는 예수님의 신원과 사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의 마음과 뜻을 깊이 헤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9)

 

유다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은 그분에 관한 표면적인 정보를 머리로만 대충 아는 것이고, 예수님이 하느님 아버지를 ‘아시는’ 것은 그분과 맺은 사랑의 친교 안에서,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깊은 대화를 나눔으로써 그분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고 받아들이신 겁니다. 그랬기에 오직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살며 그분 뜻에 합당한 일들만 하실 수 있었지요. 그것이 우리가 지녀야 할 참된 믿음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 몇 가지로 그분을 섣부르게 판단하고 그분 섭리가 자기 기대나 바람과 다르면 실망하고 등돌리는건 믿음이라고 부를 수도 없지요. 나 중심이 아니라 철저히 하느님 중심으로 판단하면서, 그분께서 나를 세상에 왜 보내셨는지, 이 세상에서 그분 뜻에 맞게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치열하게 고민하며 그렇게 사는게 신앙생활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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