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7일 (월)
(녹)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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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4-05-24 ㅣ No.172686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르 10,9)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인연들이 있습니다.
가장 소중한 인연들이지요.
그 어떤 다른 인연보다 소중합니다.

비단 혼인성사를 통한 부부의 연만은 아닐 겁니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인연은
다 그렇습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맺어주신
그리스도의 헝제자매들로서의 인연,
저희같은 수도자들이
수도서약을 통해
피보다 더 진하게 맺어진
도반의 인연,

그 다음으로는
학연과 지연 등의 인연도 있고
실제로 모든 만남은 우연이 아니고
하느님이 맺어주신 인연이기에
소중합니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오늘 하느님께서
나에게 맺어주신 인연들에 감사하고
그 인연들을 더 귀하게
여겼으면 좋겠습니다.

알타반 친구들의 인연에도
새삼 감사드리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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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신부 강론

“형제 여러분,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오늘 야고보서는 서로 원망하지 말라고 권고하는데

저는 사람에게 원망하지 않는 편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 때문에 아버지가 한번 원망스러운 적이 있었는데

얼마 가지 않아 아버지를 원망하기보다 하느님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저를 버리고 가셨다면 아버지를 원망하겠지만

하느님께서 아버지를 데려가신 것이기에 그런 것입니다.

 

그때부터였습니다.

원망이건 무엇이건 시선을 하느님께 돌리게 된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이 원죄입니다.

시시하게 아담과 하와가 원죄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그런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만든 분이시고,

인간은 그렇게 된 존재입니다.

 

‘잘되면 자기 공, 안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로

조상 탓하지 말고 자기가 자기 인생 책임지라고 하지만

저는 사실 많은 것이 조상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유전 인자를 준 것도,

그렇게 키운 것도 다 부모이고 조상의 대물림입니다.

그래서 책임 있는 부모는 자식이 잘못한 것을 다 자기 책임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 부모가 이럴 진데 하느님 아버지는 더 근본책임이고 무한 책임입니다.

그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아무튼, 저는 사람을 별로 원망하지 않고 하느님을 더 원망합니다.

그럼으로써 사람에게 꽂혀 있는 시선을 하느님께 돌리려고 애쓰고,

가능한 한 빨리 원망을 기도로 만들려고 애씁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부부의 인연을 하느님께서 짝지어주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인간이 서로 좋아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이 서로 좋아 택한 것 같아도 실은 하느님께서 짝지어주신 거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부부간에 문제가 생겨도 서로 원망하지 말고 자기 잘못을 반성할 뿐 아니라

왜 내가 저런 인간하고 결혼했지? 내가 눈이 멀어도 한참 멀었어!라고 생각지 말고

왜 저런 인간을 제게 주셨습니까? 하고 하느님을 원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단 이렇게 화살을 하느님께 돌린 다음,

그러나 우리가 신심 깊은 신앙인이라면 원망만 하지 말고,

주님께서는 왜 이런 인간을 내게 주셨지? 이렇게 생각해야 하고,

더 나아가 이 인간에게 나를 보내신 것은 아닐까? 하고 주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아무튼, 원망을 기도로 돌리고,

기도 안에서 하느님 뜻을 찾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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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 강론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이 아닌 관계도 있다.』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마르 10,2-12)”

 

1) 여기서 ‘시험하려고’ 라는 말은

‘함정에 빠뜨리려고’ 라는 뜻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이혼 문제를 질문한 것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였는데, 만일에 예수님께서 “아내를 버려도

된다.” 라고 대답하시면 산상설교의 가르침과(마태 5,31-32)

다른 말을 한다고 공격했을 것이고, “버리면 안 된다.”고

대답하시면, 헤로데에게 가서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처럼

헤로데를 비판했다고 고자질을 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의 결혼 문제를 비판하다가 살해당한

일은(마르 6,17-29),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심각한 일,

그러나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헤로데를 편들 수도 없고 비난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가 왕비를 버린 일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을 비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르 6,18).

<사실 왕비를 버린 것도 죄이지만,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이 더 큰 죄였기 때문에 그것부터 비판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바리사이들은 아내를 버리는 문제에 대해서만

질문을 하는데, 자기들의 질문이 함정이라는 것을 감추려고

세례자 요한과는 다른 방식으로 질문한 것 같습니다.

 

2) 바리사이들이 언급한 이혼 규정은

신명기 24장 1절-3절에 있는 율법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바로 그 율법을 폐지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라는 말씀은,

“그 율법은 하느님의 계명이 아니라 모세가 정한

인간의 규정이다.” 라는 뜻입니다.

<“모세 당시에는 그런 규정이 필요했겠지만,

그것은 임시 조치였을 뿐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 일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충돌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본래의 정신대로 회복시키신 일입니다.

 

3) 헤로데의 왕비는 이스라엘 바로 옆에 있는

‘나바태아’ 라는 나라의 공주였습니다.

그런데 헤로디아와 눈이 맞은 헤로데가

일방적으로 이혼을 통보하고 친정으로 보내버렸습니다.

<사실상 버린 것이고, 쫓아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일 때문에 헤로데와 나바태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뻔 했는데 로마 황제의 중재로 전쟁까지는 가지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는 예수님 말씀은 혼인성사에만 해당되지 않나?

헤로데와 그 공주의 혼인은 혼인성사가 아니지 않은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교회의 혼인성사는 아니지만, 헤로데와 그 공주의 결혼은

유대교의 율법과 예식대로 이루어진 혼인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 혼인도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결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4) 매일미사 책에서는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이라는

말씀이 ‘모든 관계’에 적용된다고 설명했는데,

‘모든 관계’가 아닙니다.

인간 세상에는 ‘죄가 되는 관계’가 분명히 있고,

‘죄가 되는 계약’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 관계라면 끊어야 하고, 그런 계약이라면 파기해야 합니다.

<모든 불륜 관계는 관계 자체가 죄가 되는 관계입니다.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관계, 범죄를 공모하는 관계,

그 외에도 여러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어떻든 ‘모든 관계’가 다 ‘선’인 것은 아니고,

분명히 ‘악하고 나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악’의 관계 안에서, 신의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큰 죄를 짓는 경우를 인간 세상에서 흔히 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동방박사들과 헤로데 임금 사이에

있었던 일이 좋은 예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를 찾으면 헤로데에게 알려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천사의 지시를 받고

그냥 되돌아갔습니다(마태 2,7-12).

헤로데는 박사들이 약속을 안 지켰다고 크게

화를 냈는데(마태 2,16), 사실 그 약속은

지키면 안 되는 약속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크게 방해하는 약속이었기 때문입니다.

배반자 유다와 사제들 사이에 맺은 계약도(마태 26,14-15)

계약 자체가 죄였기 때문에, 지키면 안 되는 계약이었습니다.

<우리 교회 법원의 ‘혼인 무효 소송’은,

겉으로는 혼인성사로 보이지만 성사로 성립될 수 없는 혼인을,

즉 무효인 혼인을 가려내는 소송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이 아닌,

인간들이 마음대로 맺은 혼인이 실제로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경우에 무효가 선고되면, 혼인 관계가 풀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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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영억 신부 강론


「나의 보물」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아주 가깝다는 표현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바로 혼인 관계입니다. 온전히 하나가 되어서 새 창조를 이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혼인과 이혼의 문제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결혼문제는 단순히 남녀의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신랑이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로서(예레31,3). 하느님과 인간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서 한 마음 한뜻으로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느 강의장에서 강사가 물었습니다. “여러분! 다시 태어나면 지금의 남편이나 부인과 결혼하시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는데, 한 남자가 손을 들더니 말했습니다. “난 지금의 부인과 살겠습니다.” 여기저기서 감탄하는데 강사가 물었습니다. “부럽습니다! 그럼 만약에 부인이 싫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남자 왈, “그럼… 고맙지요. 뭐∼!” 그랬답니다. 속마음이 다들 그런 것은 아니겠지요? 어떤 분은 그러더라고요, 자기는 같이 살고 싶다고 하는데 배우자가 아주 싫어한다고!

 

바리사이들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당시는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로 취급되었습니다. 당연히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면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뜻과는 맞지 않는 결혼제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는 어떻게 가르쳤느냐고 물으십니다. 문제의 답을 항상 성경 안에서 찾도록 안배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받았을 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사실 모세가 이혼장을 써주라고 한 것은 남자의 권위 아래에서 여성을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한 것입니다.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기에 이혼을 허락하여 자유를 허락하였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창조 사업에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남자도 여자도 똑같은 피조물입니다. 남자도 여자도 똑같은 하느님의 고유한 작품입니다. 그리고 서로는 각각의 아름답고 고유한 특성이 있지만 혼자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부족함이 있고, 반드시 상대방의 도움을 통해서만이 채워져야 할 부족한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완전함을 만들며 서로의 거들 짝을 만나서 부족함을 채워가는 것이 결혼의 삶입니다. 서로를 도와주는 동반자로서 협력해야지 일방적인 자기 요구만을 상대방에게 강할 때 한마음 한뜻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결혼한 사람은 배우자에게 ‘여보’라고 합니다. ‘여보’라는 말의 어원이 女寶 또는 如寶에서 비롯됐다는데, 부부는 ‘보물’과 같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 부부님들, 서로를 보물처럼 대하고 있는가, 아니면 원수처럼 대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배우자! 서로에게 배우자! 결혼은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관계이지 자기 욕심을 채우는 수단이 아닙니다. 서로의 의무와 권리를 가진 동반자입니다. 서로 사랑받고 존경받아야 할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서로의 보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셨고 또 우리의 만남도 이끌어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 수십억 가운데 자기 짝을 만나는 일이 어찌 우연이겠습니까?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결혼을 인간이 갈라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신중하게 결혼해야 하고 사랑이 없는, 신의 없는 결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아내와 남편의 관계나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그렇게 소중한 관계입니다.

 

자녀와의 관계를 봅니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 떠남을 생각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놓아주는 능력, 이기심이나 독점욕, 지배욕을 버리고 자립할 수 있는 인간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또한 자녀는 부모로부터 독립 해야 합니다. 기대지 말고, 의존하지 말고 정신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스스로 서야 합니다. 부모에게 짐이 되지 말고 떠나야 할 때 떠나야 합니다. 부모도 떠나보내야 할 때 떠나보내야 합니다.

 

이혼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서로의 의무와 책임을 소홀히 하는 데서 오는 아픔입니다. 성격 차이를 1순위로 꼽고 있지만 ‘너는 나의 것’이라는 일방적인 소유욕에서 불행이 시작됩니다. 서로에게 예속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의 인격이 ‘우리’라는 공동체를 형성 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도 다르지 않습니다. 신자 수는 늘어났지만 참 신앙인은 많지 않습니다. 주일미사 참례자, 영성체하는 사람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세례때 서약한 우리의 의무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미사참례는 의무가 아니라 사랑하는 주님과의 만남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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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욱현 신부
하느님께서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유다인들은 결혼에 대해서는 아주 고상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정절의 덕은 덕 중의 덕이었다. “우리는 하느님이 부정의 죄 이외의 죄에 대해서는 오래 참으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부정은 하느님의 영광을 떠나보냈다.” “모든 유다인들은 우상숭배, 살인, 간음을 범하는 것보다 죽는 편이 더 낫다.” “사람이 젊은 나이에 아내를 내어 보낸다면 제단이 눈물을 흘린다.”라는 말이 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혼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오직 한 사람 하와만을 짝을 주신 것은 두 사람이 모든 일에 동등하게 하나가 되고 모든 것을 나누고 모든 것을 희생하도록 하신 것이다. 이혼에 대한 가르침은 남성과 여성에게 동등하게 적용된다. 간음이란 혼인의 원래 목적에서 실패했던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5절) 라고 하신 말씀은 처음에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아담이 하느님께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12) 그리고 여자는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먹었습니다.”(창세 3,13)라고 핑계를 대는 것에서 나온 법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인간의 본 모습인 것 같다.

혼인은 교회가 묶어주고 봉헌으로 굳건히 하며 축복으로 봉인하고 천사들이 선포하고 아버지께서 확증하시는 것이 혼인의 행복이다. 하나의 희망, 하나의 열망, 하나의 규율, 하나의 섬김으로 일치된 두 그리스도인과 같은 짝은 없다. 이 둘은 형제와 같은 관계이며 각자의 소임에서 동등하다. 그들 사이에는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갈라짐이 없고, 참으로 “둘이 한 몸입니다.”(창세 2,24; 마태 19,5; 에페 5,31). 몸이 하나이면 마음도 하나이다. 부부는 함께 기도하고, 하느님 앞에 함께 엎드리고, 함께 단식하고, 서로 가르치고 서로 권고하고, 서로 위로하는 관계이다. 하느님의 잔치에서도 완전히 등등하고 환난과 박해 속에서도 완전히 동등하며 위로를 받을 때에도 그러하다. 서로 아무것도 숨기지 않으며 상대방에게 소홀하지도 않고, 서로에게 짐이 되지도 않는다. 이것은 혼인 생활을 절제 있게 엮어 가고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9절)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주님의 가르침은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똑같이 적용된다. 이 가르침은 간음의 경우 외에는 모든 이혼을 금한다. 그 간음은 여자나 남자가 아내이기를, 남편이기를 원하지 않았고 혼인의 신의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부는 살아 있는 동안 서로에게 매여 있다(참조: 1코린 7,39). 부부는 항상 서로에 대한 믿음 안에서 서로를 위하여 어떠한 경우에라도 부부간의 도리와 혼인의 신성한 의무를 충실히 하여야 한다. 부부는 하나라고 한다. 둘이면서 하나이다. 그리고 하나이면서 둘이다. 그리고 사랑으로 주님을 그 안에 모시기 때문에 주님을 모신 삶으로 삼위일체의 삶을 사는 것이다. 가정의 모습은 삼위일체의 모습이어야 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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