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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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문은 하느님의 눈물어린 호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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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연 [fisherpeter] 쪽지 캡슐

2019-10-30 ㅣ No.133543

 

 

오늘 복음의 내용을 보면 그냥 텍스트의 액면적인 내용만 봤을 때 핵심은 좁은문과 또 하나는 첫째와 꼴찌가 바뀌는 내용입니다. 저는 성경에 대한 그냥 보통적인 지식만 있어서 자세한 건 잘 모르지만 그냥 일반적인 사람이 생각했을 때 이 부분에 대해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한 생명이라도 더 구원하시려면 구원의 문을 더 활짝 열어놓으셔야 되는 게 정상일 텐데 구원에 이르는 길을 선택하는 범위를 좁혀놓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필시 그런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런 생각을 한번 해봅니다. 의사가 지금 생명이 위독한 환자를 살려야 하는 상황에 있다고 가정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위독한 환자이다 보니 환자의 상태는 상당히 좋지 못한 상태에 있을 겁니다. 치료 과정에 수반하는 많은 아픔과 고통이 뒤따를 겁니다. 증상이 경미했을 때와는 상대적으로 그럴 겁니다. 환자를 살리기 위해서는 환자가 비록 아픔과 고통을 호소한다고 하더라도 그에 맞는 시술을 해야만이 환자를 살릴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치료를 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고통을 환자가 참고 인내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치료하는 의사의 입장에서도 환자가 치료중에 고통을 느끼는 걸 알면 가능하면 고통없이 치료하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일 겁니다. 근데 그런 식으로 환자의 입장을 고려해서 치료를 하면 자칫 상태가 악화될 수도 있고 생명도 위태로운 그런 상황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의사도 마음은 힘들지만 그래야만이 환자를 살릴 수가 있다고 판단되면 환자에겐 다소 고통이 따르는 힘겨움이 있을지라도 그걸 도외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이런 의사와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의사가 환자를 살리려고 할 때 위독한 환자일 때는 치료과정에 상당한 고통이 있지만 그걸 이겨내야 호전될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린 자유의지가 주어졌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도 로봇처럼 저희를 강제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에 대한 차선책으로서 하느님 나라로 저희를 이끌기 위한 눈물어린 호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제발 하늘나라에 가서 나랑 영원히 기쁨과 복락을 누리려고 하는 이 애비의 마음을 헤아려서 힘들지만 그 길을 가야만이 영원한 생명이 있는 거란다 하는 메시지를 주시는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제가 생각하는 복음묵상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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