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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7주간 토요일 ... 독서, 복음서 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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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군 [ahyin70u] 쪽지 캡슐

2021-05-21 ㅣ No.147021

1독서<바오로는 로마에서 지내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8,16-20.30-31

16 우리가 로마에 들어갔을 때, 바오로는 자기를 지키는 군사 한 사람과 따로 지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17 사흘 뒤에 바오로는 그곳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이 모이자 바오로가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백성이나 조상 전례의 관습을 거스르는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도, 예루살렘에서 죄수가 되어 로마인들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18 로마인들은 나를 신문하고 나서 사형에 처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으므로 나를 풀어 주려고 하였습니다.

19 그러나 유다인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나는 내 민족을 고발할 뜻이 없는데도 하는 수 없이 황제에게 상소하였습니다.

20 그래서 여러분을 뵙고 이야기하려고 오시라고 청하였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희망 때문에 이렇게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30 바오로는 자기의 셋집에서 만 이년 동안 지내며,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

31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1독서 주해(해제.역주  정태현 신부님)

16

루카는 여기서부터 바오로의 로마 선교에만 초점을 맟추기 위해 1인칭 주어 우리를 삭제하고 바오로를 지키는 군인의 지위나 이름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바오로가 로마에서 처해 있는 상황은 가택연금 상태다. 그는 만 2년 동안 한 사람이 군인이 감시하는 가운데 샛집에서 쇠사슬에 묶여 지네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유롭게 사람들을 만나고 하느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정을 가르칠 수 있었다.

 

17

로마의 유다인 공동체는 기원전 2세기 중엽에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바오로 당대에 이 공동체는 상당히 컸던 것으로 전해지지만 테베리오 황제와 글라우이오 황제 때에는 일시적인 박해를 받았다.

 

바오로는 자신의 변호연설에서 자주 되풀이한 내용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 그는 유다 백성과 그 오랜 관습에 언제나 충실했다.“로마인들의 손에 넘겨졌다는 바오로의 증언은 바오로를 때리려는 유다인들의 손에서 로마인들이 그를 구출했다는 21.31의 내용과 상충된다. 루카는 여기서 바오로의 운명을 예수에 운명과 비슷하게 만들기 위해 이런 식으로 바꾸었다.

 

18

로마인들이 바오로를 심문하고 사형 죄목을 사형 죄목을 차지 못해 풀어주려 했다는 내용 역시 이전 기록과 다르다. 25.9에서 페스도는 바오로를 유다인들 앞에서 재판하고자 했고 26.32에서는 페스도가 아니라 아그리빠가 바오로의 변론을 듣고 황제에게 상소만 하지 않았더라면 이 사람은 풀려날 수 있었을 텐데요하고 말했다.

 

19

바오로는 자신을 변호할 뿐, 동족에 대해 반감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것은 유다인들이 먼저 그를 고소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바오로는 자신이 유다 최고의회에서 재판받기를 단호히 거부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다. 바오로는 유다인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언사는 자제한다.

 

20

바오로는 자시니 쇠사슬에 묶여 죄수가 된 이유를 여기서 밝힌다. 이 이유는 이미 바오로 자신이 변호연설에서 다 밝힌 것이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진정한 희망은 죽은 자들의 부활에 있다고 이해한다. 또한 그에게 있어 죽은자들의 부활은 조상들에게 주어진 약속의 성취이며 예수 안에서 마침내 실현되는 것이다. 결국 바오로는 이스라엘의 메시아 희망 때문에 곧 근본적으로 그가 유다교 가치를 고수했기 때문에 죄수가 되었다는 말이다.

 

30

바오로는 가이사리아에서처럼 로마 관리의 호의덕분에 방문객들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 사실은 바오로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수인서간들을 쓸 수 있게 된 조건을 암시할 수도 있다. 서방 사본군은 바오로가 유다인들과 이방인들모두를 맞아들인 것으로 되어 있으나 현재의 원전에서 바오로가 실제로 맞아들인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자 하는 이방인들이다.

 

31

방해를 받지 않고 아주 자유롭게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교 선교에 대한 로마의 묵인을 가리킨다. 루카는 바오로가 온 세상의 중심인 로마에 와서 자유롭고 대담하게 하느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게 되었다는 말로써 사도행전을 끝마친다. 바오로가 로마 황제의 재판을 받았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루카의 구원사적 관점에서 볼 때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따라서 어떤 학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사도행전이 여기서 떨어졌다든가 아니면 시간이 없었다든가 등등의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가 여기서 끝맺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복음<이 제자가 이 말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20-25

그때에

20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21 그 제자들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셨다.

23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나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 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24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5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서 주해(해제.역주 이영헌 신부님)

20

앞 대목과 연결하고 예수의 베드로와 대화를 보도하기 위한 편집자의 인위적 묘사다.

애제자가 부활한 예수를 따르고 있었다는 상황묘사일 뿐이다. 베드로의 물음이 나올 계기로 삼고 예수의 대답과 편집자의 해설을 보도하려는 편집자의 해설을 보도하려는 편집자의 의도로 서술되었다. 예수 추종을 촉구받는 베드로와는 달리 애제자는 이미 예수 추종자로서 강조된다는 해설은 두 제자를 경쟁적 시각에서만 보는 인위적 견해라고 비판한다. 베드로에게 촉구되는 추종은 특별히 죽음의 추종을 뜻하고 현 문맥에서도 베드로의 추종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13.23-25참조. 편집자는 애제자를 예수에게 특별히 신뢰받는 제자로서 상기시키고자 한다.

 

21

애제자에게는 어떤 특별한 것이 주어지겠는가는 일종의 기대가 내포된 질문이다. 이미 언급된 베드로와 애제자의 관계를 전제한다. 그러나 두 제자의 대립이나 경쟁이 시사되는 것은 아니다. 베드로에게 부여된 사목권과 촉구된 죽음의 추종에 비해 애제자와의 관계와 그 제자의 특별한 역할이나 위치를 보증하려는 편집자의 의도가 반영될 뿐이다. “애제자가 요한 교회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음이 오히려 반증되는 셈이다. 이 질문은 문맥상 베드로에 대한 질책이 담긴 예수의 말로 이어진다.

 

22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특히 그리스도의 조기 재림을 뜻한다.

애제자가 살아 있을 때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진다고 당시 요한 교회에 두루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을 편집자는 부활한 예수의 말로써 반영시킨다. 사실상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대망이 요한 교회에도 생생했었다. 따라서 애제자에 관한 이 말은 죽음을 맞게 될 베드로와는 달리 그 제자는 죽음을 맞이하지 않게 된다는 뜻으로서, 그 제자에 대한 예수의 특별한 사랑이 편집자에 의해 시사되고 동시에 베드로와 애제자가 비교된다.

 

부활한 예수가 애제자에 대해 특별한 의도나 원의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고 존중하라는 뜻이다. 베드로와 애제자의 대립이나 경쟁 또는 베드로 교회와 요한 교회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나 논쟁이 시사되거나 전제되는 것은 아니다. 요한 교회는 부활한 예수가 베드로에게 부여한 사목권과 함께 죽음의 추종에 대한 예언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여기서는 다만 애제자의 임무와 역할이 바로 부활한 예수의 뜻이라는 것을 말할 뿐이다.

 

따라서 편집자의 관심사나 의도는 오히려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다. , 베드로 교회로 하여금 베드로의 권위만을 내세우지 말고 요한 교회도 인정하고 이해하도록 이끌고, 또한 요한 교회로 하여금 베드로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공동체의 창설자요 스승인 애제자의 명예를 존중하도록 강조하고자 한다.

 

베드로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 곧 그리스도의 운명에 동참하는 추종의 길을 가라고 촉구한다. 부활한 예수가 애제자에 대해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예수의 이 말은 베드로 교회에도 해당된다.

 

23

요한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20.17형제들과는 다른 차원의 의미다.

애제자가 이미 죽은 사실을 반영한다. 즉 편집자는 이제 그리스도 재림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 애제자에 관한 예수의 말을 설명한다.

애제자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죽자, 요한 교회는 예수의 말을 오해했던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서 이제 바로잡게 된다. 즉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애제자남아 있다는 말을 그 제자가 죽지 않는다는 뜻으로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계속 남아 있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게 된다. 따라서 편집자는 애제자가 요한 교회 가운데 정신적으로 머물러 계속 활동한다거나 또는 이 복음서 안에 정신적으로 머물러 선포하고 증언하다고 말하고자 한다.

 

24

문맥상 애제자를 가리킨다.

애제자가 증언자로 언급됨으로써 베드로와 또 다른 의미를 시사한다. 23절과 연관지어 생각할 때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베드로에 비해 그 제자는 자기가 행한 증언 속에 계속 남아 살아 있다는 뜻이다. , 이 복음서에 그의 증언이 남아 있으므로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 깨까지 정신적으로 계속 살아 있다는 뜻이다.

 

애제자가 복음서의 내용을 증언한다는 말과 함께 이해될 수 있는 표현으로서 이 복음서의 기록은 그 제자의 권위적 증언에 근거한다는 뜻이다. , 편집자는 복음이 전체를 최종적으로 마무리지으면서 애제자의 권위를 내세운다.“애제자의 권위적 증언을 강조하고 동시에 그 후계자들이 이 복음서를 엮었음을 시사한다.

 

25

당시 주변 문학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종의 과장이다. 이 과장법은 예수의 행적들을 문학적 기교로서 더욱 빛내는 데 기여한다. 하지만 예수의 행적에 대한 깊은 의미를 시사한 저자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 여기서는 편집자가 다만 복음서의 끝맺음을 그럴싸한 말로 표현하고자 했을 따름이다.

우리로 갑자기 바뀐 것으로 보아 25절은 후대에 덧붙인 듯하다. 이런 문맥은 이 복음서가 최종적으로 편집되기까지 여러 과정을 거쳤다는 것도 시사한다. 21장은 원복음서에 추가된 부록이다.

 

 

 

 

 

200주년 신약서서 주해/ 분도출판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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