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연중 제11주일] 겨자씨의 비유 (마르4,26-34)

스크랩 인쇄

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1-06-13 ㅣ No.147533

 

2021년 6월 13일 주일

[연중 제11주일] 겨자씨의 비유 (마르4,26-34)

 

 

1독서<낮은 나무는 높이리라.>(에제17,22-24)

22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내가 손수 높은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을 따서 심으리라가장 높은 가지들에서 연한 것을 하나 꺾어 내가 손수 높고 우뚝한 산 위에 심으리라.

23 이스라엘의 드높은 산 위에 그것을 심어 놓으면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훌륭한 향백나무가 되리라온갖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이리라.

24 그제야 들의 모든 나무가 알게 되리라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이며 푸른 나무는 시들게 하고 시든 나무는 무성하게 하는 이가 나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

 

화답송 시편 92(91),2-3.13-14.15-16(◎ 2ㄱ 참조)

◎ 주님당신을 찬미하오니 좋기도 하옵니다.

○ 주님을 찬미하오니 좋기도 하옵니다지극히 높으신 분이시여당신 이름 찬송하나이다아침에는 당신 자애를밤에는 당신 진실을 알리나이다

○ 의인은 야자나무처럼 우거지고레바논의 향백나무처럼 자라나리라주님의 집에 심겨우리 하느님의 앞뜰에서 우거지리라

○ 의인은 늙어서도 열매 맺고물이 올라 싱싱하리라불의가 없는 나의 반석주님이 올곧으심을 널리 알리리라

 

2독서 <함께 살든지 떠나 살든지 우리는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를 씁니다.>(2코린토5,6-10)

형제 여러분, 6 우리가 이 몸 안에 사는 동안에는 주님에게서 떠나 살고 있음을 알면서도우리는 언제나 확신에 차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그리고 이 몸을 떠나 주님 곁에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살든지 떠나 살든지 우리는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를 씁니다.

10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서야 합니다그래서 저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이 몸으로 한 일에 따라 갚음을 받게 됩니다.

 

복음<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마르4,26-34)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6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27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처음에는 줄기가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32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34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연중 제11주일 제1독서(에제17,22~24)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손수 높은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을 따서 심으리라. 가장  높은 가지들에서 연한 것을 하나 꺾어,  내가 손수 높고 우뚝한 산 위에 심으리라.  이스라엘의 드높은 산 위에 그것을 심어 놓으면,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훌륭한 향백나무가 되리라. 온갖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이리라.  그제야 들의 모든 나무가 알게 되리라.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이며, 푸른 나무는 시들게 하고, 시든 나무는 무성하게 하는 이가  나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 "(22~24)

 

에제키엘서 17장의 결론 부분인 22~24절은 지금까지 주어진 비유의 연장으로서 주 하느님 주권에 의해서 선민 회복 예언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내용은 앞에서 제시된 어두운 분위기를 완전히 반전시키고도 남을 만큼 밝고 희망에 찬 예언이다. 그러나 시간적으로는 앞의 예언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는 먼 미래에 있을 일을 말하는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에제키엘서 17장 1~10절 비유에서는 향백나무 높은 가지를 꺾는다는 표현이 제시된 후, 그것을 냇버들처럼 버들잎 사시나무처럼 큰 물 곁에 심었고, 그것이 키가 낮은 포도나무처럼 되었다고 서술한다(3~6). 그런데 본 단락에서 향백나무가 또 다시 언급되지만, 버들나무나 포도나무로 바뀌지는 않는다.

 

이러한 사실과 관련해서 혹자는 이 단락의 주제를 '메시아 안에서 이루어지는 축복의 약속'으로 정하고, 이 모든 예언이 미래에 구세주로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그렇다면 여기 언급된 향백나무의 꼭대기는 다윗 가문의 후손을 상징하고, 높은 가지 영원한 왕좌를 차지하실 메시아를 상징한다.

 

겸손의 모습으로 오신 메시아를 상징하는 연한 가지 무성하게 성장하고 열매를 맺어 크고 아름다운 향백나무로 자랄 때,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고 그 그늘에서 산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구세주로 오셔서 모든 죄인들을 대신해 희생 죽음을 당하시고, 하느님께로부터 받을 축복을 누리도록 길을 열어 주심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믿어 영적 혜택을 받을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만민에게 주 하느님께서는 높은 자를 낮추시고,  낮은 자를 높이시는 하느님이신 것을 자신의 비천한 출생과 죽음, 영광스러운 부활의 생애를 통해 분명히 알리실 것이다. 

이러한 예언으로 본장이 끝마쳐지는 것은 남부 유다 왕국의 치드키야 임금이 비록 이집트를 통해 복을 얻으려고 했지만, 진정한 복은 주 하느님께서 친히 제시하시는 통로를 통해 온다는 사실을 교훈하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한편 본문에서 '내가'에 해당하는 '아니'(ani)는 강조적 의미를 함축하는 인칭 대명사이다.

 

본절에서 주 하느님('내가')의 행위는 에제키엘서 17장 3~4절에서 큰 독수리가 향백나무 높은 가지를 꺾는다는 것과 대조된다. 

에제키엘서 17장 3절 이하의 경우는 이스라엘 자손이 고난을 당하게 될 것임을 나타낸 것이지만, 주 하느님께서 그 높은 가지를 꺾어다 심는다는 표현은 하느님의 백성이 축복을 받게 될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는 메시아를 통해 복을 내리시기 전에 먼저 즈루빠벨(기원전 597년 제1차 바빌론 유배 때 끌려간 남부 유다의 마지막 임금인 여호야킨의 손자; 2열왕 24,8~17; 25,27~30; 하까이2,23)이라는 다윗의 후손을 바빌론 포로지에서 꺾어 이스라엘 고토에 심으시는 일을 행하실 것이다.

하지만 즈루빠벨은 주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그 구원사업의 최종적 주역은 아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아직도 그 높은 가지 끝에서 연한 것을 하나 꺾어 높고 우뚝한 산 위에 심으실 일이 남아 있으며, 그 연한 가지 즈루빠벨의 가계 혈통을 통해 태어나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지칭하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가지들에서 연한 것을 하나 꺾어,  내가 손수 높고 우뚝한 산 위에 심으리라.'

여기에서 주 하느님께서 친히 꺾어 옮겨 심으시는 '연한 것'에 해당하는 '라크'(raq)는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나오는 햇순(새싹)같은 메시아 상징한다(이사11,1; 53,2; 즈카6,12).

 

이러한 '연한 것'이 하느님에 의해 심겨지는 '높고 우뚝한 산'에 해당하는 '하르 까보아흐 웨탈률'(har gaboah wethalul)은 그 위용이 다른 높은 산들과 비할 바 없이 탁월하며 높고 웅장한 산을 의미한다.


이 산은 에제키엘서 17장 23절에서 이스라엘의 드높은 산으로 재차 설명되며, 이사야 2장 2절에서는 모든 산들 위에 뛰어나 종말에 모든 민족들이 모여들 하느님의 산(집)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예루살렘을 지칭하며, 그 곳에서부터 성령 강림이 이루어졌으며, 본격적으로 교회가 시작되었음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소수의 무리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그리스도의 교회는 지극히 미약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분이 하느님의 살아계신 아드님, 곧 결코 멸하지 않는 영원한 왕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그분의 교회는 영원히 번성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드높은 산 위에 그것을 심어 놓으면,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훌륭한 향백나무가 되리라.' (23ㄱ)

주 하느님께서 심으시는 이 가지는 하느님께 뿌리를 두고 하느님을 향하여 무럭무럭 성장하여 수많은 가지들을 내고 많은 열매들을 맺어, 위풍당당한 향백나무로 우뚝 설 것이다.

이것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가 십자가 죽음을 통해 수많은 백성들을 일으키시고,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지닌 분으로 온 세상, 모든 사람 앞에 높이 서실 것을 상징한다(필리2,6~11).

 

여기에서 '훌륭한'에 해당하는 '앗디르'(adir)는 단지 외모가 아름다운 것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몹시 존귀하고 풍채가 위풍당당하며 강력한 상태를 모두 아우르는 표현이다. 

이것은 부활 후 승천하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면모가 어떠한지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라고 할수 있다.

 

'온갖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이리라.' (23ㄴ) 

본문의 주어인 '온갖 새'에 해당하는 '콜 칩포르 콜 카나프'(kol tsipor kol kanap)는 문자적으로 '모든 날개가 있는 작은 새'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이다.

후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겨자씨 비유 통해 그것이 심겨져 자라 큰 나무를 이룬 후에 온갖 새가 와서 그 그늘에 깃들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르4,3; 마태13,32).

이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복음, 그 분이 이루신 구원 사업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얻으며 참된 안식을 얻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을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진정한 쉼을 줄 수 있는 이 큰 나무는 작은 겨자씨 하나로 시작하고, 높은 가지에서 취한 연한 가지 하나로 시작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것은 예수님의 비천한 출생,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었던 그의 비참한 죽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을 겪고 난 후, 예수님 자신과 그를 믿는 교회와 그의 복음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그를 믿고 선택받은 믿는 이들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게 된다(마태11,29).

 

이제 에제키엘서 17장 22절과 23절의 사건이 진행되는 가운데, 세상의 모든 나라들, 모든 민족들은 주 하느님께서 높은 자를 낮추시고, 낮은 자를 높이시는 진정한 주권자이심을 분명히 보아 알게 될 것이 예언된다(24절).

 

 

 

 

                                    

 연중 제11주일 복음(마르4,26~34)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26~27)

 

마르코 복음 4장 26~29절은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 말씀이다. 이 비유 말씀을 마르코 복음 4장 2~20절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과 비교해 보면, 두 가지의 차이점이 있다.

 

첫째'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달라짐을 강조하고 있다면,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복음 또는 하느님 나라가 지니는 역동성과 은밀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는 '씨 뿌리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나 하느님을 상징했지만,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에서는 인간 자체, 특히 복음 전파자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비유가 공통점도 있다. 본문에 나오는 '씨'와 마르코 복음 4장 3절의 '씨'가 말씀을 상징한다는 점이고, 두 비유가 모두 하느님 나라를 소재로 한다는 점이다.

 

한편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마르코 복음에만 나오는 특수 자료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땅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는 말로 시작되는 이 비유는 이미 소개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르4,2~20)와 중복됨을 암시한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강조점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심화, 발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강조점은 사람의 마음 또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의미하는 '밭'에 있다.

그래서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만이 길가나 돌밭,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과는 달리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따라서 좋은 땅, 곧 밭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그러나 '저절로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에서 이러한 밭의 중요성이나 심지어 농사짓는 농부의 중요성조차 발견되지 않는다.

씨앗이 발아하여 싹이 나고, 자라고, 이삭이 나오고 열매를 맺는 전 과정에서 오로지 강조되는 것이 '씨앗의 생명력'이다.

 

여기서 농부는 이러한 전 생장의 과정에 대해 전혀 무지한 자로 부각된다. 그리고 '저절로', '스스로' 익은 열매에 대해 추수의 은혜와 감격만을 누릴 뿐이다.

 

끝으로열매를 맺기 위한 중요한 변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는 '사람의 마음 내지는 영혼의 상태'였다면, 반면에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에서는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씨앗 자체'라는 점이다.

따라서 열매를 맺고 하느님의 나라가 확장되기 위해서는 그 씨앗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이 계셔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마르코 복음 4장 27절에서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는 '시간이 흘러가는 데 따라'는 표현을 그렇게 한 것이다.

히브리인들은 하루가 아침에 시작해서 밤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해질 무렵에 시작되어 다음 날 해질 무렵에 끝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하느님의 창조 행위를 묘사하면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창세1,5)라고 표현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 4장 27절의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는 말씀은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알지 못한다'고 번역하면 좋다.

'알지'에 해당하는 '오이덴'(oiden; know)의 원형 '오이다'(oida)는 완료형으로 사용될 경우에는 '알다', '감지하다'등의 의미를 가지며, 시제는 완료이나 알고 있는 시점은 현재이다.

 

부정어 '오크'(ouk; not)과 더불어 완료형으로 사용되어  밭에 뿌려진 씨앗이 자라는 과정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씨를 직접 뿌린 농부가 알지 못하는 내용은 바로 이것이다. 씨앗을 자라게 하는 생명력의 근원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또는 어떻게 발생하는지 지식적으로 알거나 감각적으로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답은 마르코 복음 4장 28절 전반절이 말하는 '저절로', '스스로'이다.

따라서 농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씨를 뿌리고 난 뒤에 그 씨 자체에 내재하고 있는 생명력으로 말미암아 잘 자라기를 바라며 지켜보는 수 밖에 없다.


이처럼 하느님의 나라는 그 시작과 과정, 그리고 완성에 있어서 인간이 정확히 알지 못하는,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때에 따라 점진적으로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씨 뿌리는 농부로 대표되는 인간은 하느님 나라를 자라게 하는 힘이나 그 나라가 완성되는 때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아도 식물이 끊임없이 자라난다는 것만큼 확실한 사실은 없으며, 또한 추수의 시기가 도래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농부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이처럼 믿는 이들 역시, 하느님 나라의 성장과 완성에 대해 본질적으로 주도적인 위치에 있지는 않지만, 그 기대와 확신의 끈을 놓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6,242 0

추천 반대(1)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