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토)
(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도란도란글방/ 새그릇.(斷食) (마태6:16-18)

스크랩 인쇄

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1-06-16 ㅣ No.147603

 

 

*힘드시더라도 중요하니까 끝까지 보시길 권합니다.

(공동번역성서) 2021. 6. 16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도란도란글방

 새그릇.(斷食

(마태6:16-18)

16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얼굴을 하지 말아라. 그 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남에게 보이려고 얼굴에 그 기색을 하고 다닌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17 단식할 때에는 얼굴을 씻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라. 18 그리하여 단식하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지 말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첫 번째 신랑으로부터 받아먹어야 하는, 율법(律法)이라는 양식(糧食)이 있었고, 과월절 어린양, 그리고 두 번째 신랑(新郞)으로부터 받아먹어야 하는, 은혜(恩惠)라는 양식이 있었죠. 두 번째 신랑으로부터 그 은혜의 진리를, 양식으로 받아먹을 수 있는 이들은, 첫 번째 신랑으로부터, 그 율법이라는 양식을 받아먹고, 그것만, 그 양식만을 먹어야 하는, 영적인 애굽에서 반드시 뛰쳐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그 첫 번째 양식, 그 과월절 고기, 그 율법이, 그 인간의 가치를 향상시켜 주고 상승시켜 주는, 자기애(自己愛)적 자아향상(自我向上)! 자아상승(自我上昇)! 자아가치 상승! 뭐 이렇게 표현해도 되겠죠? 그런 것들이 너무 좋아서, 두 번째 양식이 필요 없는, 그냥 어떤 무리들은 그곳에 그 양식을 먹으려고 계속 머물면서, 그 공허(空虛)한 양식을 배터지게 먹다가, 결국은 그곳에서 멸망(滅亡)에 처해지게 된다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와 물 포도주를 내는 두 신랑의 이야기인 거고, 로마서 7장의 그 첫 번째 남편과 두 번째 남편의 이야기인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신랑과 양식의 이야기에다가 이런 비유(譬喩)를 하나 붙여 넣어 주셨어요. 한 번 보세요.

 

(루가복음 5:34~39) 34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잔칫집에 온 신랑의 친구들이(아들들)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도 그들을 단식하게 알 수 있겠느냐? 35 이제 때가 오면 신랑을 빼앗길 것이니(첫번째 남편을 빼앗기는 날) 그 때에는 그들도 단식을 할 것이다.' (율법을 안먹습니다.) 36 그리고 예수께서는 비유(譬喩 파라볼레’)를 들어 말씀하셨다.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을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못쓰게 만들뿐만 아니라 새 옷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37 그리고 새 술을 헌 가죽부대에 담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릴 것이니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는 못쓰게 된다. 38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39 또 묵은 포도주를 마셔 본 사람은 '묵은 것이 더 좋다' 고 하면서 새것을 마시려 하지 않는다.'

 

묵은 거에 그 맛이 든 사람은 새 것은 안 먹는다는 얘기입니까? 발렌타인 21년산을 먹던 사람은 17년산을 절대 안 먹는다는 얘기인가요? 너무 잘 아는 새 술은 새 부대의 비유죠? 이게 왜 단식의 이야기에 붙어 있을까요?. 새 걸로 먹으라는 건가요? 이 말은 마치 격언(格言)처럼, 선거 때마다 등장하고, 심지어 시위 현장에서도,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그런 구절입니다. 이 말은 그렇게 함부로 쓸 수 있는 말이 아니에요.

왜 단식의 이야기에 이 비유가 붙어 있는지, 이 이야기를 잘 이해하면, 주님이 말씀하시는 단식의 이야기가, 더 아주 선명(鮮明)해질 겁니다. 그러면 그냥, 이 시대들이 오해(誤解)하고 있는, 그 이슬람 교인들이 하고 있는 라마단식의 그런 단식으로, 지금 교회도 단식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거든요. 그것이 이슬람 교인들도 하는 그런, 그런 우매(愚昧)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인지, 잘 알게 될 거예요.

이 비유를 원문으로 보면, 아주 중요한 세 단어가 키워드로 쓰이고 있어요. 첫 번째 단어가 카이노스고 두 번째 단어가 네오스라는 단어고, 세 번째 단어가 팔라이오스라는 단어예요. 그 단어의 뜻을 잘 이해를 하면, 이 비유는 아주 쉽습니다. 카이노스’(καινός)라는 단어는. NEW라는 단어예요. ‘네오스’(νέος)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예요. 여기서도 NEW. 비슷하죠? 새로운, NEW라는 단어가 나온 거거든요. 새로운! 이거와 대조적으로, ‘팔라이오스’(παλαιός)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단어는 뭐, ‘오래된’, ‘묵은’, ‘옛 것의뭐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어떤 차이가 있냐면? 카이노스새로운이란 뜻이지만, ‘새 것, 새로운이런 뜻인데, 예전에 아주 엉터리로 살던 사람들이, 개과천선(改過遷善)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 할 때에, 그러니까 똑같은사람이에요. 똑같은 사람인데, 예전에는 엉터리로 개차반같이 살다가, 이 사람이 변화(變化)하고 성숙(成熟)되어, 새롭게 변했을 때에, 그걸 카이노스라고 그래요.

반면에 네오스라는 단어는요. 그냥 본질(本質)적인 그 새 것 있죠? 그 새 것! 제가 예전에 칼로스라는 단어하고 아가또스라는 단어를 비교해서 설명해 드렸는데, 둘 다 선()이죠? 둘 다 선이라는 단어인데, 칼로스라는 단어는 나타난, 겉으로 나타난 선()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니까 성전이나, 성경이나, 율법이나 뭐, 예수나 이런 것이 이렇게 눈에 보이게 나타난 선()! 그러니까 어떤 선이라는 것을 내용으로 담아 눈에 보이게 나타난 것으로 준 것! 그래서 그 눈에 보이는 그것을 칼로스라고 그러고, 이걸 칼로스!’ 이것의 내용으로 진짜 그것을 선하게 만드는 그 내용이, 바로 아가또스라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둘 다 선인데, 칼로스라는 걸, 이렇게 나타내 보여 준걸, 아가또스로 알지 못하고, 그냥 나타난 그것! 그 성전! 그 예수! 그 성경으로 보게 되면, 그것 자체가 뭐예요? ‘카코스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한글성경이 ()’이라고 번역한다고 그랬습니다. 이런 개념들을 잘 알아 두면, 어렵지 않아요.

칼로스는 선()이에요. ‘나타난 선이에요. 성전도 분명히 성경이 선하다고 그랬고, 예수도 선한 분이고, 율법도 선한 거예요. 그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이 진짜 선(‘아가또스’)으로 이해되어지지 못해서, 그냥 그 표피(表皮)적인 것으로 그들에게 이해되어진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건 그냥 (‘카코스’)이라니까요. 성경이 그걸 악이라고 그래요.

 

마찬가지로 이 새 것(‘카이노스’) 있죠? 로마노의 1년 전, 낡은 것(‘팔라이오스’) 옛 것! 그런데 지금 새거 됐잖아요, 그죠? 그런데 사람은 똑같은 사람이죠. 아주 좋은 예가 하나 들어와 가지고, 보세요. 사람은 똑같은 사람이라니까요. 그런데 그 안에 어떤게 들어갔어요. 그 내용(內容)이라는 새 것이 그게 네오스예요. 그거는 그냥 본질(本質)인 새 것! 이게(‘네오스’) 들어가니까, 어떤 이가 팔라이오스상태에서, 묵은 것! 옛날 것! 낡은 것! 이 상태에서 카이노스새로운 것이 되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 팔라이오스라는 이 단어는 팔린이라는 이 단어에서 나온 건대요. 팔린이 뭐냐면 반복하다, 진동하다, 씨름하다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희생제사는 계속 반복해서 드려야 되죠? 율법도 계속 반복해서 지켜야 되는 거죠? 단한번에 이루어지지 않은 율법은, 계속 지켜야 되는 거잖아요? 그런 의미에서의 팔린이에요.

그러면 묵은 것이라는 건, 단순히 옛날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어떤 걸 계속 반복하고 진동(振動)하고, 그 수고하고 무거운 짐으로 씨름해야 하는, 율법적인 어떤 것을, ‘묵은 것’ ‘옛날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반면에, 새 것은 거기에서 벗어나서 어떤 것을(‘네오스’) 받아, 거기에서(‘팔린’) 벗어나서, 옛 것이(‘팔라이오스’) 이렇게 새로운 피조물이(‘카이노스’) 되어 버리는 거 있죠? 이걸 카이노스라고 그래요. 이 차이만 잘 이해하면 됩니다. 그러면 이 비유는 아주 쉽게 풀 수 있어요.

 

(고린도후서 5:17)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

 

여기서는 어떤 단어가 쓰였겠어요? 새 것이 되었으니까, ‘카이노스? 거봐요. 이렇게 잘 하면서 말이야~ 당연히 카이노스예요. 똑같은 존재인데 새 것이에요

지금 여기 있는 분들 새 것이에요 새로운 피조물이죠? 그런데 겉은, 우중충 옛날 거란 말이에요, 똑같이. 그러니까 이거 이게 바로 카이노스예요. 새 것! 새 것인데, 그 본질이 변해 버린 게 아니라, 어떤 변화와 성숙, 어떤 하느님의 선물, 그 은혜가 내 안으로 들어와, 내가 그렇게 하느님께 여겨지고 평가(評價)되어지는 새 것인 거예요.

그리고 그 팔라이오스는 구식이라는 말 정도가 아니라, 반복(反復)하고, 씨름하고, 진동해야 하는 율법적인 언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 비유의 의미를 해석해 보자 말이에요. 이 단식의 이야기의 연장으로 붙어 있는 새 술과 새 부대의 이야기를, 각 절로 이렇게 분해(分解)를 해보면, 36절은 카이노스팔라이오스의 대조(對照)예요. 그리고 37절은 네오스팔라이오스의 대조예요. 그러면 38절은 네오스카이노스의 대조예요. 이러한 사전(事前) 분석(分析)이 이 비유의 이야기를 해석(解釋)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키(key)가 돼요.

36절은 카이노스’(καινός-새 옷)팔라이오스’(παλαιός-낡은 옷)의 대조

37절은 네오스’(νέος-새 포도주)팔라이오스’(παλαιός -낡은 부대)의 대조

38절은 네오스’(νέος-새 포도주)카이노스’(καινός-새 부대)의 대조

먼저 36절을 보면, ‘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을 깁는 사람은 없다.’라고 시작이 됩니다. 여러분 한글성경이 좀, 웃기게 번역이 되어 있지 않았어요? 아니, 어느 미친놈이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서, 낡은 옷을 깁는 인간이 있어요? 생각을 해보시라구요. 이게 그 말이겠어요? 아니, 낡은 옷이 뭐, 진짜 옛날에 고조할아버지나 이런 분이 뭐 의미 있는 어떤 걸로 이렇게 전해주는 것이, 좀 떨어져서, 그걸 기우기 위해 뭐 새 것을 갖다 대고, 이런 거는 이해가 가지만, 그런 사전 설명 없이, 새 옷을 찢어서 낡은 옷을 깁는 사람이 어디에 있냐고요? 그런데 여기 그렇게 번역이 되어 있단 말이에요.

여기에서 새 옷히마티온(ἱμάτιον-) 카이노스이고, 낡은 옷이 히마티온(ἱμάτιον -) 팔라이오스이에요. 히마티온은 우리가 겉옷, 속옷 할 때 배웠던 단어입니다. 그리고 조각이라고 번역이 된 에피블레마(έπίβλημα)’라는 단어는 에피발로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건데요. 그 단어가 ()하다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이젠 여기서는 붙이다이렇게 번역을 해 놨단 말이에요. 그리고 찢어라는 그런 단어는 어디에도 없어요. 찢어서 뭐 어디다 붙였다는 이런 말은 없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구절을 직역을 하면, ‘새 옷에(‘히마티온’ ‘카이노스’) 속한 것을, 옛날 옷에 속하도록 던져 넣는 건, 원리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이런 말이에요.

그러면 새 옷에 속한 그게 뭐겠어요? 당연히 진리(眞理)의 말씀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새 옷을 새 옷 되게 하는 거는 진리라는 말이에요. 하느님의 말씀, 복음밖에 없단 말입니다. 새 옷에 속한 그것을 묵은 옷, 낡은 옷에다가, 낡은 옷은 당연히 팔라이오스니까, 율법(律法)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 율법에다가 던져 넣는 것, 이건 불가능이다, 이런 말이에요.

새 옷을 뭐 조각을 찢어서 헌옷에다가 갖다가 기우고, 이런 이야기가 아니라, 새 옷에 속해 있는 그것을, 낡은 옷에다가 던져 넣어, ()하도록 던져 넣는 것은, 원리적으로 형용부사니까 안 된다, 이런 말이에요. 당연한 거죠?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건 새 것의 파괴(破壞), ‘스키조’(σχίζω)라는 단어가 분열하다, 부수다이런 말이거든요. 그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인데, 왜냐하면? 그 새 것에 속한 것은, 옛 것과(‘새 옷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어울리다라고 번역이 된 쉼포네오는요 함께 한 소리를 내다이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왜 새 것에 속한 것을, 낡은 옷에 속하도록 던져 놓을 수 없냐면? 새 것에 속한 그 말과, 옛 낡은 옷에 속한 그 말이, 함께 한 소리를 내는게 아니기 때문에, 그 둘은 섞일 수가 없다, 이런 말이에요. 그러니 단식의 이야기가 참말, 진리와, 거짓말, 가짜 양식의 이야기잖아요? 그거에 연결되어 지금 이 이야기가 붙어 있는 거란 말이에요.

 

지금 이 비유가 단식의 이야기를 부연(敷衍) 설명해주는 거라는 것을 놓치시면 안 됩니다. 새 것에 속한 양식은, 절대로 옛 것 안에 양식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이런 말인 거예요. 왜냐하면, 그 둘은 같은 말(쉼포네오)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말이거든요. 그렇게 새 옷과 옛 옷은 서로 엮여지지가 않아요. 그래서 율법에 보면 두 옷감을 하나로 붙여서, 옷을 만들지 말라고 그러죠? 섞지 말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혼솔(호지 않은) 속옷을 입고 있었죠? 바느질 한 흔적이 없는 옷인 거예요. 그거는요. 그건 그 분이 이렇게 저렇게 찢고 엮어서 만든 그런 옷을 입은 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였어요. 그분은 원래부터 호지 않은 옷! 이렇게 인간들이, 이렇게 찢고 저렇게 찢어서 서로 엮어서 만든 그런 옷이 아닌, 원래 그거! 진리! 그걸 입고 오셨고, 그걸 넘겨주시려고 했는데, 인간들이 그걸 그대로 받지 못하고 갈갈이 찢어 버린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그걸, 그렇게 찢은 그걸, 넷으로 넘겨주는 분이다.’가 십자가에서 그 분의 옷이 넷으로 찢어지는 거예요. 그러나 호지 않은 그 속옷은 찢지 말라, 그러잖아요? 찢지 말자! 그런단 말이에요. ? 바로 이 넷으로 찢어서 너희들에게 준 거, 사실은 우리가 찢어 버린 거예요. 그게 율법(律法)이잖아요? 진리는 하나인데, 인간들의 그 노미조하는 두 마음, ‘에피뚜미아라는 두 마음이, 그 말씀을 갈갈이 찢어 버리는 거죠. 그런데 주님은 그걸 넷으로 줘요. ? 그걸로 하나를 알라고. 그래서 거기에 넷으로 찢어서 주는 겉옷이 나오고, 호지 않는 하나의 옷이 나오는 거예요.

, 그렇게 갈기갈기 찢어서 자기들의 힘과 노력으로 이리저리 꿰매어 입는 옷, 이걸 율법의 옷이라고 그래요. 그걸 낡은 옷 히마티온 팔라이오스라고 부르는 거예요. ‘옷이 헤졌어, 낡았어, 옛날거야, 구식이야! 그래서 새 것 또 사야 돼!’ 이런 말이 아니란 말이에요. 여자들 거울 앞에 서면, 맨날 옷이 없대~ 옷 천진데~. 창세기 37. 보세요. 그렇게 꿰매어 자기들이 만들어 입는 옷! 낡은 옷! 옛날 옷! 이게 창세기에 나옵니다.

 

(창세기 3:7) 그러자 두 사람은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앞을 가리웠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처음으로 한 일이,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하고르, 예요. 치마 아닙니다. 띠를 해 입은 거예요. 고작 부끄러움을 가리겠다고, 띠를 해서 묶은 거예요. 상체와 하체를 겨우 분리해 놓은 거죠. 여러분, 그 일은 선악과를 따먹자마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일부러 성경이 나무를 계속 단수(單數)로 표기를 해요. 그러면 거기에는 나무가 하나라는 뜻인데, 선악과를 먹자마자, 무화과나무 잎사귀는 어디서 나온 거예요? 성경이 의도적(意圖的)으로 선악과나무를 무화과나무로 연결을 시키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이 신약에서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詛呪)해 버리는 거거든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자마자, 그 이파리로 자기들이, 치마를 해 입었어요. ‘를 해 입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나무 뒤에 숨는 거예요. 그때 하느님이 아담아 네가 있는 곳이 어딘 줄 알아?’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 율법 뒤에 숨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가 숨바꼭질하는 하느님이 어딨어? 못 찾겠네.’ 그런 의미로 물어 본 거 아니잖아요? ‘아담아, 네가 있는 데가 어디냐? 어디인줄 알아? 왜 그 나무 뒤에 숨어 있어?’ 그런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무화과나무는, 성경 전체에서 줄곧 율법을 모형(模型)하는 나무로 등장하죠? 그래서 주님께서도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詛呪)하신 거란 말이에요. 그 이파리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는, 스스로 꽃을 피울 수도 없고, 열매를 맺을 수도 없고, 그래서 무화과(無花果)예요. 꽃도 아닌 것이 과일도 아닌 것이~. 고작해야 아담과 하와의 띠밖에 생산해 낼 수 없는 나무예요. 그래서 저주하신 거예요.

그런데 그게 뭐가 그렇게 잘못된 거죠?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가리겠다고,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해 입은 거, 그게 뭐 그렇게 나쁜 일인가요?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를 해 입었다고 그러죠? 엮다라는 단어가 타파르(תפר)’라는 단어인데요. 그게 바느질하다라는 뜻이에요. 성경이 일부러 그런 단어를 갖다 써요.

진리의 모형, 띠예요. 그 띠를 만들기 위해, 사람이 자기 힘을 동원하여, 스스로 바느질을 해서 입더라는 거예요. 이게 최초의 낡은 옷이에요. 그리고 이것을, 율법으로 계속 반복하여 설명해 주는 것일 뿐입니다. ‘타파르!’ 자 그걸 율법이라고 하고, 인간들의 스스로의 힘과 노력과 열심으로 진리를 완성해 보려고 하는, 그 모든 시도를, 성경은 그걸로 계속 설명을 해줘요. 그게 율법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들의 힘으로 이리저리 재단하여, 바느질을 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옷을 해 입어 버리면, 그게 바로 히마티온 팔라이오스, 구약(舊約)’이 되는 거예요. ‘낡은 옷!’ 그래서 주님이 그 낡은 옷의 재료인 그 율법의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말려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 무화과나무 이야기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대목이,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다.’라는 말이에요. 그 때! 때가 언제예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이제 영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그 때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때가 되면, 열매가 열려요. 때가 되지 않으면, 열매는 못 열린다니까요. 거기에서.

그래서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죠.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그래요. 못 딴다는 거죠? 그런데 주님은 따셨어요. 가시나무와 엉겅퀴는 율법(律法)입니다. 그런데 율법, 가시나무와 엉겅퀴에서, 하느님께서 포도를 따시고, 포도는 연합된 성도를 의미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 개가 붙어서, 하나가 된 그걸, 하느님이 그냥 교보재로 사용하는 거예요.

그리고 구약에도 그렇고, 신약(新約)에도 그렇고 내가 반드시 무화과를 따겠다.’라는 그런 말이 여러 번 나와요. 그런데 그 무화과는 꽃도 아니고 열매도 아닌 그게 아니라, 하느님이 그 무화과나무라는, 거기에서 따려고 하는, 하느님의 열매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 사도행전에서요 부제(보조자), 7부제, 12사도 다음에 7부제가 나오죠? 7부제를 완료(完了)하고 죽는 게 누구예요? 7부제는, 말씀으로 섬기는 자들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가 스테파노죠? 스테파노가 포도라는 뜻이에요. 하느님이 포도를 땄잖아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딴다니까요. 열매를 따신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때, 주님이 스스로 그 저주받은 무화과나무가 되셔서, 그 말라비틀어진 나무가 되셔서 죽는 거예요.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그 율법의 무화과나무가 되셔서, 골고타 언덕에서 저주(詛呪)를 받으세요. 저주를 받아서, 말라비틀어진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열리게 하기 위해서, 그분이 친히 말라비틀어진 언약(言約)의 기둥에 매달려 버리는 거죠. 율법의 나무예요. 선악과(善惡果)예요.

그런데 그렇게 율법의 무화과나무가 죽자, 거기에서 생명(生命)의 열매가 맺혔잖아요? 그 열매는 이라고 합니다. 그렇죠? 그 말은 이죠 그 진리를 받았어요. 그리고 우리가 그 말을 할 때, 바로 그 열매를 맺는거죠. 그걸 누군가 들어서 따 먹으면, 그가 산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자신이, 그들의 식량(食糧)이 되는 거예요. 내 살과 피가 너희들의 양식이야~’라고 하신 주님의 말이, 그게 우리라니까요. 내가 이 땅의 양식이에요. 내 안에 진리가 있다면, 만약에 아니면, 텅 빈 것을 먹은 그자가, 텅 빈 것을 전해 주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알곡과 쭉정이를 키질할 때, 다 날라 가는 거예요.

 

, 이렇게 주님께서, 저주의 무화과나무에 매달려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열매가 맺혔고, 그 열매가 여기까지 이렇게 이제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의의 겉옷이, 넷으로 주어진 거죠. 그 넷은, 호지 않은, 꿰매지 않은, 하나의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우리도, 그걸 꿰매지 않은, 호지 않은, 바로 그 하나로, 갖고 있어야 되는 거고, 그것으로 전해줘야 되는 거예요. 따라서 새 옷에 속한 것과, 낡은 옷에 속한 것은, 분리(分離)가 되어서, 서로 엮일 수 없는 게 맞죠. 그래서 새 옷에 속한 것을, 낡은 옷에 속하도록 던지는 건, 원리적으로 안 되는 거다. 이렇게 이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새 옷을 찢어서 붙인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새 사람은 낡은 음식을 먹을 수가 없고, 여전히 낡음에 속한 자들은, 새 것을 먹을 수가 없다는 그런 말이죠.

그렇다면 새 포도주와 낡은 부대의 이야기로 한번 넘어가 보자구요. 이건 또 어떻게 그 양식, 단식의 이야기와 연결이 되는지.

 

(루가복음 5:37) 그리고 새 술을 헌 가죽부대에 담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릴 것이니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는 못쓰게 된다.

 

여기에서는, 새 포도주와 낡은 부대가, 대조가 되고 있죠. 새 포도주는요, ‘오이노스(οίνος), 네오스(νέος)’입니다, 이게. ‘네오스라는 건 본질적인 그 새 것이라고 그랬어요. 새 포도주! 낡은 부대는, ‘아스코스(άσκός), 팔라이오스(παλαιός-낡은)’예요. 그러니까 새 포도주는 본질(本質)인 새 것을 가리키는 거고, 낡은 부대는 여전히, 이제 율법의 그릇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스코스라는 단어는 단순히 그냥 가죽 부대라는 말로 해석을 하면 곤란해요. 그 단어는, ‘스큐오스(σκευος)’라는 단어에서 나온 단어인데요. 그 단어는 그릇, 기명(器皿), 기구(器具)’ 이런 말이에요. 그 단어가 사용된 구절을 한 군데만 찾아 드릴게요.

 

(로마서 9:21-24) 21 옹기장이가 같은 진흙덩이를 가지고 하나는 귀하게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어낼 권리가 없겠습니까? 22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진노와 권능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면서도 당장 부수어 버려야 할 진노의 그릇을 부수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참아 주셨습니다. 23 그것은 하느님께서 자비의 그릇에 베푸실 당신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보여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비의 그릇은 후에 영광을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미리 만드신 것인데 24 그 자비의 그릇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느님께서 불러주신 우리들 가운데는 유다인뿐 아니라 이방인도 있습니다.

 

이 단어는 성전의 기명(器皿)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흔히 쓰는 단어인데요. 성전의 기명이라는 건, 진리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들이잖아요? 하나하나가 다! 그렇죠? 따라서 우리가 우리 안에 진리를 담게 되면, 우리는 새 그릇이 되는 거예요. 새 부대예요. 그것이. 새 부대! 우리 안에 담긴 것이 진리가 아니면, 우리는 그냥, 그냥 그릇이에요. 질그릇!

그러니까 보배를 담은 질그릇과, 그냥 질그릇은 다른 겁니다. 보배를 담은 질그릇은 깨지면, 보배가 드러나지만, 그냥 질그릇은 깨지면, 그냥 깨지는 거예요. 멸망이에요. 그것이.

 

(고린도후서 4:6-7) 6 '어둠에서 빛이 비쳐 오너라' 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속에 당신의 빛을 비추어 주셔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7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 주셨습니다. (스큐오스)이것은 그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보배가 뭐라고 그러죠? ‘어둠에서 빛이 비쳐 오너라' 고 말씀하신 하느님이게 창세기 1장에서 빛이 있으라그 말을 하신 하느님이란 말이 아니라, 어두움이 뭐라고 그랬죠? ‘호셰크라는 이 단어가 어두움인데, 이 어두움은, 반드시 오르라는 으로, 적어도 성도에게 있어서는, 빛으로 이해되게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성경에서, 이 어두움을 나쁘다고 그러지 않아요. 적어도 창세기 1장에서는 이 어두움과 빛이라는 것을, 뭐가 나쁘고 뭐가 좋은 것이다, 이렇게 구분(區分)하지를 않아요. 그냥 이건 어두움은, 하느님이 이렇게() 나타내려고 주신 거야~고 이야기를 한단 말이에요.

! 마찬가지예요. 밤이 라힐이죠? 뭐예요? 이게. 가르침을 주는 가르침! 밤이라는 단어 자체가 뭘 가르치기 위해 준 거라는 뜻이에요. 낮은 뭐예요, 그러면? 진리를 주는 게 낮이에요. 그러면 밤이나 낮이나 뭐가 달라요? 이 밤으로 이 낮을, 이 날을 알면 되는 거예요.

그럼 저녁은 뭐고, 아침은 뭐예요? 이게 저녁이고, 이게 아침인데, 저녁이라는 말은, ‘뭐가 이렇게 덮여 있다,’ 이런 뜻이에요, 원래가. 덮여있는데, 그러니까 파자(破子)하면, 아랫것으로 시작하는 성전이란 뜻인데, 덮여 있는 거예요. 그 안에 뭘 분명히 내용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아침은 뭐냐면, 그 성전을 파괴하고 다시 세우기 시작하면, 그걸 아침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이거 보세요. 어두움! 이 어두움을, 그게 뭔지 그러니까 성전을 그대로 성전으로 보면, 네 눈이 어둡다 그런단 말이에요. 그걸 어두움이라고 그래요. 그걸 호셰크라고 그래요. 그리고 그걸 죄()라고 한다니까요. 이 어두움을.

그런데 그 성전이 뭔지를 알았어요. 그런데 여전히 그 성전이에요. 그런데 어떤 이의 눈에는, 그게 그냥 껍데기로 안 보이고, ‘그렇지, 그게 그 내용이지라고 보인단 말입니다. 그 때 똑같은 성전을 보는데, 어떤 이는 그걸 어두움으로 보고, 어떤 이는 그걸 빛으로 본다 말이에요. 빛이라는 건 그런 거라니까요. 다른 종류의 어떤 것이 아니에요. 이해가 가세요, 여러분? 그러니까 이 어두움은 이 빛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거고, 이 빛이라는 건, 그 어두움을 나타낸 거네요. 그러면 이건 뭐고, 이건 뭐냐고요? 마찬가지예요.

 

밤이라는 건, 뭔가를 가르치기 위해, 하느님이 우리에게 허락(許諾)하신 거예요. 그 어두움을 밤이라 하자 그랬단 말이에요. 그래서 왜냐하면 예언서나 구약이나 아니면 신약에도, 뭐 유다가 밤으로 갔다~ 니고데모가 밤에 왔다~ 이런 밤 이야기를 하기 위해, 창세기의 이야기들, 그 창세기에서 전제들을 계속 이렇게, 어떤 개념들을 정리해 놓으시는 거예요.

, 밤이라는 게, 뭔가를 가르치기 위한 그 가르침이 밤이에요. 그런데 그 밤을 통해서, 니고데모처럼, ‘아 저분이 이구나~‘라고 알면, 그게 뭐예요? 그게 낮이에요. ‘!’ 진리를 받는 거예요. 그것이! 그리고 그게 뭐냐면? ‘어이구 그게 덮여 있던 게, 부수어지고 파괴되어지고 다시 세워지니까, 나에게 보이네! 그게 그 뜻이네!’라고 하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건 그냥 다 하나라니까요. 뭐 이거는 나쁘고 저거는 좋고, 이렇게 구분하라고 준 게 아니란 말이에요. 바로 그 어두운 것에서, 그걸 빛으로 아는 어떤 이들이 있어라~’라는 그 분이, 그 예수 그리스도라는 껍질에, 그게 프로소폰(πρόσωπον-얼굴)’이죠? 얼굴이라는 단어가, 얼꼴, 영의 모양이니까. 그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느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마음에 비춘 그걸, ‘보배, 그러는 거예요. 그 보배를 마음에 갖고 있으면, 그 사람이 보배를 가진 질그릇이다,

그런데 그게 없으면, 그냥 질그릇이에요. 깨지는 거예요. 여기서 쓰인 단어도 스큐오스예요. 그릇이에요. 그릇! 기명! 기구! 이런 뜻이란 말이에요. 내용을 담는 그릇! 그러니까 오이노스, 네오스,’ 새 포도주! 그 본질! 그 진리! 그 새 포도주는 질그릇 안에 담긴 보배를 이야기하는 거겠죠, 그리고 낡은 부대는, 진리와 상관없는 율법의 그릇! 진노(震怒)의 그릇!

로마서의 표현(表現)대로 바꾸면, 진노의 그릇! 멸망(滅亡) 받을 그릇! 그걸 상징(象徵)하는 거예요. 낡은 부대! 그 안에는 율법이, 헛된 양식(糧食)이 가득 담겨져 있어, 그 새 포도주! 진리(眞理)가 담길 공간이 없다, 못 담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새 포도주는 낡은 부대에 담길 수가 없어요. ‘팔라이오스의 그 그릇에 담길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 어구를 직역을 하면, ‘새 포도주는 옛것이 담겨져 있는 그릇을 위해 존재하는게 아니다.’ 반드시 옛것이 먼저 비워지게 되어 있어요.

만일 새 포도주인 진리가, 낡은 그릇에 담겨 버리면, 새 포도주가 낡은 그릇을, 가죽 부대를, 산산조각으로 부수어 버린다, ‘찢는다고 그러는데, 이거는 조각조각 부수어지다라는 말이에요. 그리고 우리가 율법을 모래라고 하고, ‘부스러기라고 하고, 조각조각 깨진 것, 율법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리고 37절 후반부를 보면, 그 결과 낡은 부대가 아폴뤼미(άπόλλυμι)’ ‘완전히 멸망한다,’ 그래요. 이게 무슨 얘기냐면? 새 포도주, 그 물 포도주를 내시는 새 신랑! 그 신랑 예수라는 돌에 오히려 걸려 넘어지는 자, 오히려 그 예수라는 올무에 걸려, 멸망에 이르는 자들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여전히 율법의 그 헛된 양식(糧食)으로 가득 차있는 이들에게 진리가 가면, 그 예수에 의해 그들이 멸망한다, 그들은 완전히 산산이 율법으로 조각조각 내어, ‘아폴뤼미완전히 멸망(滅亡)시켜 버리는 거예요. 절대 안 받아들이니까. 그래서 주님이 그래요. ‘너희들은 그 말에 의해 심판(審判)받을 거야~’라고 그런다고요. 말에 의해서!

복음을 주면, 그걸 율법으로 산산조각 낸다니까요. 그러면 그 진리는 그들을 산산조각 내버려요. 바다의 모래로! 그렇게 되면, 그 새 포도주 그 네오스그 새 것이 땅으로 흘러 버린다고 그랬어요. 그러면 그 피를 땅으로 계속 쏟아내는 이를, 무슨 병이 걸렸다고 그래요? 유출병(流出病), 혈루병에 걸렸다고 그러죠.

그들을 부정(不淨)한 자라고 괜히 그러는 게 아니라, 그렇게 주님께서 당신의 피를 흘려서, 이건 참 생명이잖아요? 그 피는 곧 물이고, 물은 곧 성령이고, 그 성령은 곧 진리니까. 그것을 흘려서, 하느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주죠 그걸 너희들이 받아 마시고, 네 마음으로 가지라고 주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걸 KEEP하지 못하고 흘려버리면, 그러면 멸망(滅亡)이에요. 그가 부정한 자란 뜻이에요.

그래서 혈루병이 부정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율법에도, 여자가 월경 때는 부정하다고 한 게, 바로 그런 의미란 말입니다. 그 피를 땅에 흘리면 안 되는데, 율법주의자들에게, 그 진리가 가게 되면, 그들은 이 진리를 부수어 버리고, 진리도 그들을 부수어 버려, 그리고 완전히 멸망케 해요. 그리고 그들에게서, 그 새 포도주가 담길 공간이 없기 때문에, 계속 흘러~ 땅으로~. 그러면 저주다! 이런 말입니다.

그래서 메케오(έκχέω), 쏟아진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쏟아진다, 새 포도주가 쏟아진다. 따라서 새 그릇은 반드시, 그 새 포도주를 마음으로 담아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 낡은 그릇은 절대로 진리의 양식을 먹을 수 없다, 그래서 단식의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붙어 있는 거예요. 똑같은 이야기잖아요? 그들은 매일 엉뚱한 율법의 양식이나 먹는 거죠.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반드시 새 그릇에 담겨져야 돼~’. ‘팔라이오스라는 그릇에 담겨져 있으면 안 된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 새 그릇에 담긴 새 포도주를 창세기 언어로 바꾸면, ‘자칼네케바인 거예요. 네케바라는 그릇, 그 단어 자체가 이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그 단어가 구멍을 뚫다이런 뜻도 있어요.

그러니까 ’, 구멍이 뚫려진 어떤 곳에, 거기에 들어가야 할 보석을, 이런 이런 거를 네케바라고 그러고, 그 안에 담기는 것을 자칼이라고 그런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게 담겨져 있지 않으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생각해 보세요. (알 빠진 반지 끼고 다니는 여자 같이 추한 여자 어딨어?) 그런데 그 자칼이 없는 그 그릇은,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런데 이 보석, 이 보배, 자칼~ ‘네케바가 없으면, 이것도 아무런 가치가 없어요. 그냥 구슬이에요. 이건. (다마치기할 때 쓰는 다마라니까) 그러잖아요? 자칼은 영이잖아요? 영이라는 개념은 그걸 담는 그릇인 이런 육신이 없으면, 이건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영은 비로소 담길 그릇과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그 때부터 의미가 발생하고 가치가 생기는 거예요. 안 그러면 그게 담길 그릇이 없을 때, 영은 그냥 허깨비라니까요. 신기루라니까요. 그러니까 이 둘은 반드시 연합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 38절이, 쉰테레오(συντηρέω)’로 끝나죠. 이게 함께 완성하다, 함께 일하다, 둘 다 보존되다이런 말이거든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이렇게 돼 있는데~ 그냥 새 포도주와 새 부대는 반드시 쉰테레오, 함께완성되어야 돼! 둘이 함께 공존(共存)해야 돼!’ 이런 말이에요. 새 포도주는 새 그릇에 담겨 있어야, 둘 다 의미(意味)와 가치(價値)를 찾을 수 있다! ‘(σύν -함께)’이라는 단어 자체가 함께니까요.

그렇게 새 포도주! 성령을 양식으로 먹은 자들은, 이제 성경과 예수뿐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이제 그 나타난 표피로, 육체대로 보지 않고, 영으로 보겠죠? 진리로 본단 말이에요. 그 육체로만 판단(判斷)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선악으로!

 

(고린도후서 5:15-17) 15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죽으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을(새남편!)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세속적인 표준으로 판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가 세속적인 표준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였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17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이전. 아르케)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

그 옷이 뭐죠? 무화과나무! 그 옷! 이전 것은 지나갔어요. 그걸 낡은 옷! 묵은 옷이라고 했잖아요. ‘팔라이오스.’ ‘히마티온(ἱμάτιον -) 팔라이오스라고. 그런데 여기서는 아르케(이전)’라고 쓴다 말이에요. ‘태초의 그 옷!’ 그것은 지나갔으니, 이제 새 것이 왔다! 새 것이 되었다!’라고 이야기 한단 말이에요. 그 새 것 카이노스!’ 우리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그 그리스도도 우리에게는, 육체대로 아는 그리스도면 안 되잖아요. 십자가에 매달아놓고 열심히 비나이다, 비나이다하는 그 예수! 그건 나와 아무 상관없는 예수죠. 그 복음은 그냥 내가 소문으로 들은 복음이지, 내거가 아니라니까요. 나와 아무 관계없는 그 십자가가, 나에게 무슨 영향을 미치냐구요?

이제는 육체대로 알지 않아요. 영으로 알아요. 그런데 영은 어디에 있어요? 여기 내안에 있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 이천 년 전의 그 골고다의 십자가는 이제 사르르 녹아 이리로 들어와 있단 말이에요. 그러면 더 이상 그것은 나에게 찬양의 대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감격의 대상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거보고 눈물 콧물 짜고 하는 그런 일을 그칠 수 있다니까요.

그런 사람을 이제 새로운 피조물, 새 것! 이라고 부르고, 그들은 더 이상 묵은 것에 매이지 않는다고 하는 거예요. 그들은 이제 새 포도주만을 원하죠. 그게 그들의 참된 양식! 참된 이라는 건, 진리 아가또스’ ‘알레떼이아예요. 진리의 양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거예요.

러나 새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고 여전히 묵은 포도주인 율법만을 먹고 마시고 있는 이들은, 절대로 새 것을 원하지 않아요. 이 진리를 아무리 이야기 해 줘도, 그 율법, 내가 내 열심으로, 내 가치 챙기고, 내 만족 챙겨 갖는, 그 신앙생활(信仰生活)이 너무 좋아! 사실은 그게 보람 있고, 할 맛도 납니다.

힘들지만 애써 헌금하고, 힘들지만 정말 매일 새벽에 나와서 미사하고 레지오 활동하는 거, 보람 있다니까요. 그리고 인간들은 그렇게 할 때, 그 때 만큼은 내가 하느님 앞에서 뭘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굉장히 뿌듯해 져요. 그래서 그것을 열심히 시키는 교회는 다 흥()해요그래서 마지막 39절이 이렇게 끝나요.

 

(루가복음 5:39) 또 묵은 포도주를 마셔 본 사람은 '묵은 것이 더 좋다' 고 하면서 새것을 마시려 하지 않는다.'

 

보세요.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있는 자들은 절대로 새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 묵은 것이 인간들의 구미에 맞아요. 그래서 이 인간들은 전부 묵혔다 먹어~. 된장도 묵혔다 먹어~, 술도 묵혔다 먹어~, 치즈도 묵혔다 먹어~, 그리고 오래 묵힐수록 비싸~, 죠니워커 블루가 제일 오래된 거거든요. 죠니워커 레드 보다 배나 더 비싸요. 배가 뭐예요. , 옛날 전적이 다 나오네~ 뭐든지 묵혔다 먹어~. 그리고 오래 묵힐수록 가치가~. 골동품 보세요. 오래 묵혀 두면은 묵혀둘수록 비싸~.

성경은 그런데 새 것, ‘네오스’ ‘카이노스가 되라고 그래요. ‘네오스를 받아서~ 그런데 인간들은 전부 묵혀~ 뭐든지~. 그게 그냥 우연히 아닌 거예요. 인간들의 그 본성(本性)! 심지어 싱싱한 회도 왜 초밥에 식초를 뿌려 먹는지 아세요? 그걸 오래 묵히면 시거든요. 그런데 성질이 급해갖고요. 새 것을 갖다 놓고 묵은 것으로 만들어 먹는 거예요. 그래서 식초를 뿌리는 거예요. 다 묵혀 먹어~.

 

새로운 피조물(被造物)이 된 카이노스에 새 것들은, 이제 본질이 바뀐게 아니라, 신분과 그들에 대한 평가가 바뀐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낡은 그 피조물과 새로운 피조물이, 눈에 보이는 어떤 차이를 가지는게 아니라, 낡은 것이 그 진리 안에서 새 것으로 여겨지는 것 일 뿐인 거예요.

그러니까 뭐가 대단하게 크게 변화가 없을 수도 있는 거란 말입니다. 단지 그것의 누림에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다른 게 아니라, 묵은 포도주가 담고 있는 그 새 것이라는 내용을 알게 되면, 그게 새 포도주가 되는 거예요. 말씀은? 성경이 율법으로 보이면 그게 묵은 것이에요. 그러나 진리로 보여 지면, 그 자체로 새 것이에요.

성경이 그 사람들은 딴 거 갖고 있는 게 아니라니까요. 똑같은 성경인데, 어떤 이들에게는 묵은 것으로 가고, 어떤 이들에게는 새 것으로 보여져요. 그래서 새 언약! 새 언약 신약이죠. 새 언약에 쓰인 단어가, ‘네오스가 아니라 카이노스예요. 그 말은 무슨 말이에요? 이건 그냥 구약(舊約)! 그 내용을 그대로 갖다 옮겨 놓은 거야~ 이런 말이에요. ‘구약도 이 이야기였어~’ 이런 말이에요. 그 새 언약이 카이노스예요. ‘카이노스!’

 

(고린도후서 3:6)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새로운 계약을 이행하게 하셨을 따름입니다. 이 계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여기에서 문자(文字) 나 영()이나 똑같은 말씀을 가리키는 거죠? 文字는 율법이고, 푸뉴마,’ 말씀이에요. 진리의 말씀! 문자의 말씀이 따로 있고 영의 말씀이 따로 있는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 말씀을 문자, 즉 율법으로 보고 열심히 행하고, 육체의 일을 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그 말씀을 영으로 보고, 열심히 살리는 일을 하더라는 거예요.

살리는 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워서 죽이는 일이 아니라, 살리는 일을 하는 거예요. 영으로 보고. 그래서 주님께서도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따라주시면서, ‘이것이 바로 새 것의 모형(模型)이야!’ 이렇게 이야기 하시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새 것의 모형이야!’

 

(마태복음 26:27-29) 27 또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고 그들에게 돌리시며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 (포도주) 28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 29 잘 들어 두어라.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실 그 날까지 결코 포도로 빚은 것을 마시지 않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제 그 아버지의 그 나라가 완성이 되면, 너희와 함께 뭘로 마셔요? 새 것으로 마신다 말이에요. 내 안에 그 그리스도가 영으로 들어오시면, 나와 그 그리스도는 함께 새 것으로 마시는 거죠? 그런데 이 새 것이 뭐냐면, ‘카이노스예요. 그 포도주가 사실은 새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는 뜻이란 말이에요.

그러면 이제 그 새 것을 내가 마셨다면 성령을 마셨단 말이에요. 주님이 이게 생수(生水)라고 그랬고 그게 바로 성령이다.’라고 했단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새 것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주님과 함께 마시는 새 것! 그러면 성찬식 때 마시는 그 포도주가 이제는, ~ 마셔도 되고 안 마셔도 되는 거죠. 마시면서, ‘그렇지 이게 새 것이지! 이게 성령이지!’라고 해도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거 안하면 큰일 나는 것 처럼! 다 그렇게 간다고, ‘이게 맞는 거겠지?’ 라고 하면 다 죽어요. 그 포도주는 , 피는 곧 물이고, 그 물은 그 진리고, 그 진리는 성령이며, 그 성령이 바로 새 것이에요. 다 같은 겁니다. 그래서 요한이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죠.

 

(요한일서 5:7-8) 7 증언자가 셋 있습니다. 8 곧 성령과 물과 피인데 이 셋은 서로 일치합니다.

 

보세요. 성령, , , 진리, 다 그걸 증거 하는 거라네요. 같은 거죠? 이게 뭐예요? 이게 새 것이잖아요? 이게 뭔지를 알면 그게 바로 새 것이잖아요. 그래서 바오로도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로마서 7:7) 그러면 율법이 곧 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없었던들 나는 죄를 몰랐을 것입니다. 탐내지 말라는 율법이 없었더라면 탐욕이 죄라는 것을 나는 몰랐을 것입니다.

 

나는 죄를 몰랐을 것입니다.’라고 이야기 해 놓고, ‘탐내지 말라라는 말로 그 죄를 다시 받아요. 이게 에피뚜미아거든요? 그러니까 율법이 그 내용이라는 걸 내가 몰랐으면, 나는 계속 탐욕을, 그 내 욕구, 육체의 욕구를 따라, 그 율법을 그냥 행해 버렸을 텐데!’ 그걸 죄()라고 그래요. ‘나는 계속 죄를 지을 뻔 했구나!’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율법의 내용이 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거죠 탐욕이 무엇인지 가르쳐서 그거 하지 마! 그거 안 돼!’를 가르쳐 주는 거라는 거잖아요? 그런데 바오로가 자기는 열심히 행했는데, 율법이 그거 열심히 행하지 말라는 거였다는 얘기 아니에요, 그럼 그 열심히 행한게 하느님의 말씀을 내 육체로, 육신으로 열심히 행해 버리면, 그게 에피뚜미아요 그게 죄다!’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뭔지를 알았으면, 더 이상 그 율법은, 나에게 있어서 죄도 아니고, 내 육체의 욕망(慾望)을 이루는, 그런 것도 아니란 말이에요. 그 때 그 율법은 나에게 이 되는 거라니까요. 그렇게 먹으라는 거예요.

그래서 십계명의 맨 마지막이 그 전체를 정리하는 탐내지 마!’로 끝내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은 그걸 딱 빼고, 그건 전체 주제니까, 살인! 간음! 거짓 증거! 사랑! 이렇게 네 개만 주는 거란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5:16-18) 16 내 말을 잘 들으십시오. 육체의 욕정(에피뚜미아)을 채우려 하지 말고 성령(호 푸뉴마)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말씀과 진리와 육체의 욕심은, 서로 대척점(對蹠點)에 있는 거예요. 육체의 욕심(慾心)은 율법인 거예요. ‘노미조하는 우리의 생래적(生來的) 그 본성(本性)

17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육정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 푸뉴마티코스영에 속한 사람이 되어 버리면, 우리 안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에피뚜미아, 육체에 있을 때에 그 뭐든지 노미조해버리는 그 에피뚜미아와 다른 거라는 거예요. 주님이 자연스럽게 내어 놓은 그 에피뚜미아!’ 그것을 우리가 갖게 되는 거란 말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나누어서 안 봤다니까요.

18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그 말씀이 너희를 인도해 간다면, 너희는 절대 그 율법 아래 있지 않지, 이런 말이에요. 그런데 왜 모든 말씀을 다 자꾸 그 율법으로만 보고, 그걸 그냥 네 육체로 자꾸 행하려고 그래? 그런 말이에요. 그걸 그렇게 행해 놓고 그냥 다 이겠거니~’하고 그렇게 있는 거, 큰일 나는 겁니다.

 

, 이렇게 육체의 욕정 에피뚜미아를 금()하는 율법을, 그냥 에피뚜미아로 행하게 되면 그게 멸망(滅亡)의 양식(糧食)이라는 거고, 에피뚜미아를 금하는 율법을 통해, 에피뚜미아를 하지 않게 되었다면, 나는 이제 그걸 금식(禁食)하는 자가 되는 거잖아요, 그러면 그것이 바로 나의 생명(生命)의 양식이 되는 거예요. 왜냐면? 육체의 욕정 에피뚜미아가 죽어버린 저주(詛呪)의 무화과나무에서 열린, 그 진리의 말을, 나는 이제 따 먹는 거니까.

그래서 새로운 포도주! 그 새 양식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말씀! 그 율법! 그 예수! 그 성전! 을 올바른 내용으로 아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가 새 계명(誡命)을 설명하면서, 이건 뭐 다른 게 아니라, 어두움인 옛 계명을 그냥 내가 드러낸 거야, 이렇게 이야기 해는 거예요. ‘새 계명이라고 다른 거 뭐 대단한 거 갖다 주는 게 아니라, 옛날 거! 그거 그냥 써 준 거야! 그런데 그걸 내용으로 알면 돼!’ 이러는 거예요.

 

(요한일서 2:7-8) 7 내가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로운 계명( ‘카이노스’)이 아니고 여러분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옛 계명입니다. 그 옛 계명은 여러분이 줄곧 들어 온 그 말씀입니다. 8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사실은 새 계명입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이미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계명이 참되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났고 또 그대들의 경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어두움이 지나가고 그 어두움이 나에게 빛으로 보이네! 그러면 그게 나에게 새 계약인 거예요. 새 계명인 거예요. ‘아 이제 십계명(十誡命)이 무슨 말인지 금방 알겠네. 예수님의 산상수훈(山上垂訓)을 알고 나니까, 위에 다섯 계명까지도 다 나에게 해결이 되었네!’ 그러면 나에게 있어서 그건 어두움이 아니라 이제 빛이잖아요. 그래서 요한이 그러는 거죠. ‘내가 뭐 대단하게 새 거 어디서 갖고 와서 너희에게 주는 게 아니라, 옛날 것 그거야! 그런데 그 어두움을 빛으로 볼 수 있는 너희에게 이것이 주어지니, 이것이 새 계명이 되는 거 아니냐?’ ‘카이노스!’ 그러면 그게 우리에게 양식이 되는 거예요.

 

정리를 하면. 우리는 하늘에서 내리는 말씀이라는 양식을 참 양식으로 먹고 살아 나야, 영생(永生)의 삶을 살 수 있는 존재예요. 그런데 그 하늘의 말씀은, 이 시간과 공간과 인간의 그 제한된 이성 속으로 내려와야 하기 때문에, 아래의 것이라는 그릇에 담겨 내려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느님의 은혜(恩惠)를 입지 못한 사람들의 눈에는, 그냥 껍데기로 보이게 되고,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게만, 진의(眞義)로 보이게 되어 있어요. 전자는, 그렇게 하늘의 말씀을 쭉정이로 보고, 쭉정이로 먹는 자들이고, 후자는, 그 말씀을 참된 알곡으로 먹고, 살아나는 자들인 거예요. 이게 성경 전체의 이야기예요. 그 양식의 이야기! 어떤 걸로 먹을 거냐~ 이런 말이에요.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부터 이 양식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창세기 1:29-31) 29 하느님께서 다시, '이제 내가 너희에게 온 땅 위에서 낟알을 내는 풀과 씨가 든 과일나무를 준다. 너희는 이것을 양식으로 삼아라.

너희에게는, ‘자칼네케바가 된 이들이게는, 내가 온 지면에, 그 씨 맺는 모든 풀, 씨 뿌리는 자 아라 제라모든 풀과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 그런데 여기 나무가 단수예요. ‘모든이라는 단어, ‘이 붙어 있는데, 나무는 단수예요. 모든 하면 복수로 써야 되는 거 아니에요? 선악과와 생명나무 창세기에 두 나무 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것도 하나라는 얘기예요. 그래서 모든!’ 그러면서 그냥 나무. 자 그 나무를 너에게 식물로 줄 거야~ 양식으로 줄 거야~ 그거를 생명나무 열매로 먹으면 된다는 얘기요.

30 모든 들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생물에게도 온갖 푸른 풀을 먹이로 준다.'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31 이렇게 만드신 모든 것을 하느님게서 보시니 참 좋았다. 엿샛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양식의 이야기 단식의 이야기는, 다 여기서 출발하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여 풀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양식의 이야기를 알면, 다른 그 어떤 개념들, 괜히 막 복잡하게 성경이 이렇게 해 놨는데, 그것들 몇 개 알았다고 그래가지고 사람들한테, 내가 뭐 그냥 성경에 통달(通達)한 사람인양, 이렇게 하는 사람들 많은데, 그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거 몰라도 돼요. 이것만 제 양식으로 먹어버리면 됩니다. 몇개 아는 거, 그냥 추측하고 상상(想像)하여 이거 아니에요? 그거 딴 사람들한테 그거 자랑하고 싶어가지고, 그런 거 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이 양식을, 이 말씀을 이렇게 그냥 제대로 먹어 버리면, 우리는 그 하느님이 먹지 말라고 한 그것을 당연히 이렇게 금()하게 되어 있어요. 물론 그것을 먹지 않는 게, 육신을 갖고 있는 우리로서는, 참 힘듭니다. 그걸 안 먹는게, 우리 육이 지금 굶어 죽어가는 거거든요. 왜냐면, 육신은 그걸 먹어야 된단 말이에요. 그런데 나는 육신을 갖고 있는데, 하느님이 그걸 먹지 말라는 거예요. 그거 단식하라는 거예요. 새 것으로 먹는 거니까.

 

 

 

  



5,462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