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3일 (금)
(백)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예수님을 믿는 눈먼 두 사람의 눈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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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녹) 연중 제24주일 ...독서, 복음서 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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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군 [ahyin70u] 쪽지 캡슐

2021-09-11 ㅣ No.149673

1독서<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내맡겼다.>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0,5.9

5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6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우리 함께 나서 보자. 누가 나의 소송 상대인가? 내게 다가와 오아라.

9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 이사야 예언자는,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주님의 종의 말을 전한다.

 

 

2독서<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로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2,14-18

14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 할 수 있겠습니까?

15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16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잇겠습니까?

17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18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핳 것입니다. “그대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실천이 있소.” 나에게 실천 없는 그대의 믿음을 보여 주십시오,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독서 주해(해제.역주 진 토마스>

믿음과 선행

신앙의 실천이 야고보의 가장 큰 관심사다. 그는 이미 신앙과 실천에 관해 언급했다. 이제 14-26절에서는 신앙과 실천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바오로는 인간이 신앙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주장했는데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신앙은 사람을 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야고보가 강조하는 행동은 바오로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비판한 율법의 행업이 아니라 바오로가 신앙과 성령의 열매라고 한 덕행이다.

 

야고보는 행동으로 구현되고 입증되는 신앙을 요구한다. 그 행동은 특히 이웃사랑과 기도다. 이와같이 행동을 강조하는 것은 마태오복음에 반영된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입장과 비슷하다. 바오로는 율법의 행업으로 구원된다는 보수적인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구원론을 반대하여 신앙으로 구원된다는 점을 강력히 내세웠다. 그 결과 그는 신앙과 행동을 엄격히 구별하게 되었다. 그러나 야고보가 직면한 현실은 아주 달랐다. 그는 바오로의 가르침을 일방적으로 왜곡하여 행동의 가치를 무시한 사람들을 바로잡기 위해 신앙과 일치를 강조하게 되었다.

 

15

15-16절은 훈계가 아니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소용이 없다는 것을 실감나게 설명하는 비유다.

 

18

18-19절의 뜻을 밝히기는 매우 어렵다. 해석자들의 의견이 각각 달라서, 디벨리우스는 18절을 신약성서의 가장 어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문제는 어떤이가 누구냐 하는 점이다. 문학유형상으로만 본다면 필자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지만, 내용상 18절의 경우에는 야고보와 같은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다. 옹호자의 말은 23절까지 계속된다. 18절에서 23절까지는 상대가 이고 24절부터는 상대가 다시 여러분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복음<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27-35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셨다.

28 제자들이 대답하셨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분이라고 합니다.”

29 예수님께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

3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31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과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3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까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하며 꾸짖으셨다.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서 주해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

전승자 혹은 마르코는 예수의 정체에 관한 군중의 여론과 베드로의 고백을 한데 묶어 스승과 제자들간의 대답을 만들었다. 이 두 가지는 본디 따로 전해온 독자적 전승요소였다. 군중의 여론은 6.14-15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예수님을 두고 실지로 그런 여론들이 나돌았다. 베드로의 고백도 역사적 신빙성이 있을까? 실지로 베드로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근처에서 예수의 신분을 밝혀 당신은 그리스도십니다라고 했다는 설이 있지만 별로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 공생활 때의 사실보도이기보다 예수 부활 이후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라는 인상이 짙다.

 

사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사건들을,특히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선포하고 믿기도 했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의 정체를 밝혀 예수께서 주님이시로다라고 환성을 질렀던 것이다. 베드로의 답변은(29) 바로 이 환성의 변형이다. 환성이야말로 가장 깊이있는 신앙고백이다.

 

27

필립보의 가이사리아는 헤로데 대왕의 아들이며 갈릴래아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의 이복 동기인 헤로데 필립보가 헤르몬 산 아래 지하수가 펑펑 솟아나는 자리에다 기원전 2년경에 세운 도시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북쪽으로 백리쯤 되는 곳. 지금은 바나야스라 한다.

 

지금까지는 예수께서 자주 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다니셨으나 이제부터는 가이사리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을 가신다. 그분이 예루살렘에서 처형되신만큼 거기로 가시는 것은 죽음에의 행진이다.

 

30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나 영화를 누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고난을 받으실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십자가사건이 있기 전에는 당신 정체를 알리지 못하도록 함구령을 내리신다.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

베드로가 예수의 정체를 밝혀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고백했으니(29)이제 어떤 의미의 그리스도인지 보충설명이 필요하다. 그래서 마르코는 세 번 거듭 수난과 부활에 관한 예고를 실어 수난하고 부활하시는 그리스도임을 강조한다.

 

수난과 부활에 과한 삼중예고를 살펴보면, 우선 그 내용이 초대교회에서 선포하고 믿던 것과 같다. 사실 선포와 신앙의 주제는 한결같이 십자가와 부활이다. 아울러 삼중예고에는 수난과 부활 하건을 전제하는 요소가 있다. , 예수 수난과 부활을 체험한 다음 그것을 보도형식으로 기사화하지 않고 마치 예수께서 그런 일을 예고하신 양 예언형식으로 꾸민 것이다. 먼저 사건을 체험한 다음에 그것을 예전처럼 꾸민 것을 일컬어 사후예언이라 한다. 첫 번 예고 가운데(31) “원로들과 대제관들과 율사들그리고 사흘 후에는 사후 예언에 속한다. 의인들이 한동안 적수들한테 고통을 당하지만 결국 하느님에게 구원받는다는 주제가 구약성서에 나온다.

 

의인들의 고난과 구원이란 주제가 예수 수난과 부활에 관한 삼중예고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끝으로 8,31-33의 서술양식을 규정한다면 상황묘사로 시작해서 예수님의 말씀으로 끝맺기 때문에 상황어라 하겠다. 그런데 예수께서 제자들을 상대로 말씀하신 상황어이므로 제제교육 상황어라 하겠다.

 

31

가르치기 시작하다는 전형적인 마르코 문체다. 이 복음서에 가르치다17, “... 하기 시작하다26번쯤 나온다.

사람의 아들은 고난당하는 인자.

마땅히 ... 해야 한다에는 하느님의 뜻에 절대 복종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가짐이 엿보인다.

원로들은 유지들을, 대제관들 중견 제관들을. 율사들은 주로 바리사이계 율법 전문가들을 뜻한다. 이들이 모여 최고의회를 구성했는데 실지로 예수 수난의 주역들이었다. 수난의 주역 열거는 사후예언이다.

 

사흘 후에”, “사흘 만에는 같은 뜻이다. 31절에서 죽음과 부활 사이를 3일로 잡은 것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선포문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제 선포문에서 그렇게 부활일을 명시한 이유에 관해 세 가지 설이 있다. 부인들이 무덤에 예수의 시신이 없는 것을 발견 한 때가 일요일. 곧 돌아가신 지 삼일 만이었다고 보는 설, 가장 신빙성이 있는 설이다.

 

예수께서 처음으로 발현하신 때가 돌아가신 지 사흘만이었다고 보는 설.; 부인()에게 나타나신 발현사화, 베드로에게 나타나셨다는 언습, 엠마오로 가고 있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발현사화, 열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발현사화, 열 제자에게 나타나신 발현사화에 나오는 발현 날짜를 너무 순진하게 믿는 설이다.

 

의인들이 잠시 고난을 당하지만 사흘 만에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인즉 빠른 시일 안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 즉 예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신조가 그 영향을 받은 것이라면 이는 꼭 사흘을 뜻하는 게 아니라 그냥 가까운 시일을 의미한다는 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부활일을 명시할 때 언제나 사흘 후에또는 사흘 만에라고 하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납득이 가지 않는 설이다.

 

32

명백히는 공관복음 전부를 통틀어 여기에만 나오는 낱말이다. 이제부터 예수님은 당신이 고난받으실 것을 명백히말씀하신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했으나(29) 수난하는 그리스도이신 줄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스승을 나무란 것이다.

 

33

스승과 제자가 함께 길을 가면 스승은 앞서가고 제자는 뒤따라갔다. 그러므로 내 뒤로 물러가라하신 말씀은 베드로가 제자의 위치로 돌아가 스승을 따를 생각을 하라는 뜻이다.

사탄은 귀신들의 두목. 베드로는 사탄의 사주를 받아 예수께서 고난의 길을 가시려는 것을 만류했다.

 

어떻게 예수를 따라야 하는가?

본디 상관이 없는 네 단절어가 초창기 신도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일찍이 어느 전승자가 넷을 한데 모아 집성문을 엮었는데, 마르코는 그것을 채집하여 이 자리에 배치했다. 모름지기 제자들은 수난하고 즉으신 스승을 따르고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34

추종어의 번체가 어록에도 전해온다. 추종에 요구되는 두 조건은 자아 부정과 십자가 수락이다. 자아 부정은 무조건 자아를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라 추종에 역행하는 자아를 버리라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예수님을 철저히 따름으로써 자아를 온전히 실현하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버리라고 명하신 것은 장자가 자아를 엃었다고 한 것과 같은 뜻이다.

그 십자가를 지고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일을 상기하여 전승자가 가필한 것 같다. 그렇다면 여기 그 십자가는 예수의 십자가일 수도 있고 추종자의 십자가일 수도 있겠다.

 

35

이 단절어의 변체가 어록과 요한 12.25에도 있다. 35절의 경우 전.후반부가 병행문인데, “나와 복음 때문에를 삭제한다면 더욱 완벽한 병행문이 된다. 전승자가 나 때문에를 덧붙인 결과 나와 복음 때문에라는 표현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가필을 제외한 병행문을 살펴보자. 얼핏 보면 군 지휘관의 훈시를 연상케 한다. 전선으로 출동할 병사들을 앞에 놓고 죽을 각오를 하면 살고 살 생각을 하면 죽는다따위 훈시를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 지휘관이 아니고 하느님 나라 선포자였다. 따라서 단절어의 뜻인즉 이렇다. 지금 일시적인 목숨을 보전하려고 작심하는 사람은 장차 신국에서 영생을 잃을 것이요, 현재 일시적인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은 장차 신국에서 영생을 차지할 것이다. 그럼 어떤 상황에서 이 말씀을 하셨을까? 예수 생애 말기쯤 종교계 지도자들이 당신을 처단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스승은 제자들을 상대로 이 역설적인 말씀을 하셨으리라.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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