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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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녹) 연중 제29주일 ... 독서,복음서 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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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군 [ahyin70u] 쪽지 캡슐

2021-10-16 ㅣ No.150387

1독서<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리라.>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3,10-11

10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11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 이사야 예언자는, 의인이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가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고 전한다.

 

 

 

 

2독서<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4,14-16

형제 여러분,

14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15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16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독서 주해(해제.역주 이 홍 기)

대제관이신 예수께 대한 확신

3.1-4.13은 대제관이신 예수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항목이었는데, 이제 4.14-5.10은 대제관이신 예수와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룬다. 그 첫부분인 4.14-16은 본격적인 설명에 들어가기 전의 간단한 훈화로,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서 유혹과 시험을 겪으신 예수께 대한 확고한 신뢰를 권한다.

 

14

예수께서는 참된 지성소인 하늘에 들어가신 위대한 대제관이며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이스라엘의 왕들이나 로마 황제들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긴 했지만, 그분은 부활하신 뒤에 명백히 드러난 바와 같이 참된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고백하는 그리스도를 굳게 신뢰하여야 한다.

 

15

예수께서 위대한 대제관이며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면만 보면 사람이 가까이 가기 어려운 오해를 풀기 위해 그분은 그토록 지존한 분이면서도 그 누구보다 우리 사람과 가까운 분임을 그분의 지상 생활을 통해 증명한다. 여기서 동정하다는 단순히 심리적으로 측은히 여기다라는 말이 아니라, 희노애락을 같이하고 유혹,시련,고통 등 사람의 나약함을 함께 겪는다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필로가 알려주는 구약의 대제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수께서 아무 죄도 짓지 않으셨다는 것은 신약성서의 기본 사상이다.

 

예수께서 유혹을 받으셨다는 말은 광야의 유혹이나 게쎄마니의 유혹 등을 지상생활을 하시는 동안에 우리와 같은 연약한 사람으로서 겪으셨던 모든 어려움, 고통, 유혹 등을 통틀어서 말한다. 그분은 죄를 제외하고는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다 체험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의 사정을 잘 이해하고 동정하며 같이 아파하신다.

 

16

구약에서는 대제관만이 하느님의 현존 장소인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들을 동정하시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옥좌에 계시므로 평범한 우리도 모두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 하느님의 옥좌는 더 이상 두려운 지존의 옥좌가 아니라 은총과 자비의 자리다.

 

자비와 은총은 초대교회가 은총과 평화”, “은총과 진리등과 같이 흔히 함께 쓰고 있던 일종의 합성어다.

 

시편 111,4에서도 비슷하게 주님께서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다라고 하듯이 이 표현은 하느님께서 사람을 너그러이 받아들이시고 도움을 주신다는 성서적인 표현이다. 하느님은 자비와 은총의 샘이시며 불쌍하고 연약한 사람은 바로 이러한 하느님을 필요로 한다.

 

 

 

 

 

 

복음<사람의 아들은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5-45(또는 10, 42-45)

그때에

35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저희가 스승님께 청하는 대로 저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하고 말하였다.

3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하고 물으시자,

37 그들이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하고 대답하였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하고 물으셨다.

39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은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다.

40 그러나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41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을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하였다.

42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43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44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느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45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서 주해(해제.역주 정 양 모)

35

야고보와 요한은 제베대오의 아들로 일찍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베드로와 더불어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37

마르코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이 종말에 인자로서 재림할 때 영광스럽게 되신다. 그러나 제자들이 스승을 따라다닐 때 그분을 종말론적 인자라고 생각했을 리 만무하다. 사실인즉 스승을 메시아로 짐작하고 그분이 지상에 메시아 왕국을 세울 날을 은근히 기다렸던 것이다. 오른편이 왼편보다 더 높은 자리.

 

38

잔은 독배를 세례는 익사를 연상케 한다. 따라서 잔과 세례의 상징어는 죽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실제로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 당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예고하셨다.

야고보와 요한이 순교한 다음에 어느 전승자가 39-40절을 만들어 덧붙였을 것이다. 그런데 전승자는 두 제자가 순교한 사실을 보도형식으로 쓰지 않고 예언형식을 택하여 마치 예수께서 사전에 그 순교를 예고하신 양 서술했다. 야고보는 44년경 헤로데 대왕의 손자 아그리빠 1세가 참수형에 처했다. 요한의 순교를 확정하는 사료는 없지만 39절에서는 그것을 암시한다. 49년경 예루살렘에서 개최된 사도회의에 요한이 참석했으니 그가 순교했다면 그 시기는 49년 이후일 수 밖에 없다.

 

섬기는 사람이 되라

10.41-45는 상황묘사로 시작하여 예수님 말씀으로 끝맺는 상황이다. 초대교회에서는 전에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높은 자리를 탐했듯이 이제 그리스도인들끼리 서로 자리다툼하는 것을 보고 개탄한 나머지 겸손을 촉구하는 상황어를 만들어 여기에 덧붙였을 것이다. 루카 22,24-27에도 비슷한 상황어가 전해오는데, 이는 루카가 마르 10,41-45를 개작하여 최후만찬 대목으로 옮겨실은 것이라 생각된다.

 

42

우선 42-44절의 내용을 살펴보자. 정계에서는 통치자들이 압제와 폭정을 일삼는데 그리스도교계에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직분이 있게 마련이지만 교직은 봉사직이요 종노릇이라는 것이다. 그럼 70년경 마르코가 복음서를 집필할 무렵 교회에는 어떤 종류의 교직이 있었을까? 바오로는 사도와 예언자와 교사를 꼽았다. 여기 사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을 체험하고 그분으로부터 전도사명을 받은 사람이다.

 

예언자는 성령의 움직임을 받아 신도들을 위로하고 권면하고 격려하며 또한 외교인들을 입교하도록 권유하는 사람이다. 그밖에 필립비 교회에는 감독들과 봉사자들이 있었고 예루살렘 모교회에는 원로들이 있었다. 43-44절에서는 바로 이런 부류의 교직자들에게 봉사하는 자세, 종노릇하는 자세를 당부하는데, 이는 겸손을 촉구하신 유행어를 교직자들에게 적용한 것이다.

 

45

앞에서 교직자들에게 겸손을 촉구하면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그 모범으로 내세운다. 45절에는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삶과 죽음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봉사받기보다 봉사하는 삶이었다고 한다. 남을 섬기는 삶의 감명깊은 사례는 최후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장면이다. 그리고 45ㄴ 절에서는 봉사의 극치인 죽음을 풀이해 놓았다. 이 풀이에 들어 있는 사고범주를 하나씩 살펴보겠다.

 

많은 사람을 대신해서는 이사 53장에 기록되어 있는 야훼의 종의 죽음 해석을 전제한다. 거기에 보면 야훼의 종은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지만 처절하게 죽었는데. 이는 많은 사람이 지은 죄를 대신 속죄하는 죽음이었다는 것이다. 이 죽음은 한마디로 온 겨레의 속죄를 대신하는 대속적행위라는 것이다. 45ㄴ절에서는 바로 이 대속사상을 도입하여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대신해서목숨을 바치셨다고 한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사람을단순히 온 이스라엘 백성으로 알아듣지 않고 온 인류로 확대해석했다.

 

예수의 죽음은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대속적행위라고 풀이했던 것이다. 신약성서에서는 예수의 대속죄적 죽음을 자주 거론하는데 오직 10.45ㄴ절에서만 많은 사람을 대신해서라 하고 다른 대목에서는 주로 위해서라는 전치사를 사용하여 많은 사람을 위해서”,“모든 사람을 위해서”,“교회를 위해서”,“우리를 위해서”,“우리 모두를 위해서”,“여러분을 위해서”,“나를 위해서”,“그를 위해서”,“죄를 위해서”,“나를 위해서”,“그를 위해서”,“죄를 위해서”,“우리 죄를 위해서”,“죄사함을 위해서라 한다. 그리고 우리 범행 때문에라는 표현이 딱 한 번 로마 4.25에 나온다.

 

노예를 해방하려고 혹은 포로를 석방하려고 지불하는 몸값을 속전또는 대속전이라 한다. 속전으로 노예나 포로를 해방 또는 석방해서 양민을 만드는 행위를 일컬어 속량또는 속량하다라 한다.

 

인자는 ..., 하러 왔습니다라는 문구에는 예수의 사명이 환히 나타난다. 그럼 이 대목을 창작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사명이 어디 있다고 보았던가? 예수님은 봉사하면서 사시다가 마침내 범세계적 대속죄와 해방을 이룩하기 위해 자원해서 돌아가시는 것을 당신 사명으로 삼으셨다고 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영의정 우의정 좌우정에서 좌우정이 우의정보다 높았다. 사무실 배치에서 주무관이 있으면 그의 왼쪽에 앉은 사람이 

오른쪽에 앉은 사람보다 높다.  그런데 성서에서는 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왼쪽보다 높다고 한다.  세상하고 반대로 되어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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