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3일 (화)
(백)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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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모든 은총은 하나의 ‘시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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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글로리아 [gloria7] 쪽지 캡슐

2022-01-12 ㅣ No.152225

 

 

 

 

 

  

 

 

 

 

2022년 다해 연중 제1주간 목요일  

 

 

 

 

 

<모든 은총은 하나의 ‘시험’이>

 

 

 

 

 

복음: 마르코 1,40-45

 

 

 



LORENZETTI, Pietro 작, (1325)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병 환자를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 ‘순종’하는 것보다 자신이 받은 은총을 전하는 것이 더 주님께 도움이 되겠다 싶었는지 자신의 이야기를 널리 퍼뜨립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더는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신분으로 부정하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은총을 받는 것이 중요한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한가?’에 관한 내용입니다. 물론 은총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은총은 좋은 만큼 모두가 하나의 ‘시험’입니다. 세상에 악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의 시험을 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일류 대중 선동가이며 히틀러의 악행을 정당화하려 노력했던 ‘악마의 재능’이라 불린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세기의 선동가 ‘요제프 괴벨스’입니다. 

괴벨스가 모든 면에서 재능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평탄치 않았고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소아마비로 오른발이 마비되어 여러 차례 수술하였지만 결국 평생 발을 절룩거려야 했습니다. 1차대전 때 독일군 입대를 신청했지만 절름발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했습니다. 이것은 자신과 가족의 굉장한 수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키는 163cm였습니다. 매우 작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런 열등감을 영웅을 찾아 극복하려 하였고 그 사람이 히틀러였습니다. 그가 히틀러를 만나기 전 쓴 소설이 있었는데, 실패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탓을 유대인에게 돌렸습니다. 히틀러는 그의 반유대주의와 소설가적 재능을 보고 그를 자신의 목소리로 사용하였습니다. 나치 선전 책임자로 세워 이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는 영화와 팸플릿을 만들고 책을 쓰는가 하면 다른 책을 불태우고 독일인에게 유대인이 적이라고 이해시키려 했습니다. 그는 이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대중은 거짓말을 처음에는 부정하고 그다음엔 의심하지만 되풀이하면 결국에는 믿게 된다.” 그는 거짓말을 어떻게 대중들에게 세뇌할 수 있는지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독일 영화산업을 장악하여 지독한 반유대주의를 담은 영화를 상영하고 언론을 통해 조장하였습니다. 역시 대중은 그의 거짓말을 듣다가 결국엔 믿게 됩니다. 

 

 

    1938년 기회가 옵니다. 유대인 망명자가 나치 외교관을 암살한 것입니다. 괴벨스는 이 사건을 유대인의 반란이라 날조하였고 열광적인 연설을 통해 잔혹한 복수를 요구했습니다. 무력을 동원하여 어느 날 밤 폭동을 일으켰는데, 군대와 경찰까지 동원된 조직적 폭력이었습니다. 이날을 ‘깨진 유리의 밤’이라 부릅니다. 

 

 

    한 나라의 사람들을 일제히 선동하여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재능은 정말 천재적인 재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재능을 좋은 일이 아닌 히틀러를 위해 썼다는 데 있습니다. 사실 히틀러를 위해 쓴 게 아닙니다. ‘자신을 인정받기 위해’ 쓴 것입니다. 히틀러도 외국의 비판이 거세지자 ‘깨진 유리의 밤’을 조장했던 괴벨스에게 화를 냈습니다. 

    괴벨스는 열등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을 주님으로부터 받은 능력으로 극복하려 한 것입니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나병 환자의 병을 고쳐주시며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에 속하려면 교회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한다는 말은 나의 뜻을 바친다는 말입니다. 겸손해진다는 뜻입니다. 순종이 바탕이 된 안에서 은총이 와야 그 은총이 나를 망치지 않습니다.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2003)는 한 지방 방송국 앵커인 브루스가 하느님의 능력을 갖추게 된다는 설정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능력을 갖추면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브루스는 쫓겨난 직장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 되려 합니다. 물론 잘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잃게 되는 게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자였습니다. 잘 나가다 보니 지금까지 사귀던 여자는 그냥 소모품처럼 여겨집니다. 그렇게 바람을 피우다 헤어집니다. 세상 것을 다 얻었지만 한 여자의 마음은 얻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얻어도 허전하기만 합니다. 

 

 

    한 여자의 마음을 얻는 것도, 교회에 머무는 것도 내 뜻을 봉헌하지 못하면 불가능합니다. 준비 없이 받는 능력은 우리를 저절로 교만하게 만들어 누구도 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공부할 때도 항상 ‘겸손과 사랑의 증가’에만 초점을 맞추어야지 저는 공부를 많이 해서 오히려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모든 은총은 교회에 순종해야 함을 잊을 때 은총이 아닌 저주로 변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12장 전체를 은총이 교회의 선익을 위해 쓰여야 함을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그러며 제13장에서는 은사 중 가장 큰 은사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교회에 순종하는 겸손과 모든 이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이 실제로 우리가 청해야 할 전부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성 프란치스코는 교회를 위해 이 은총을 사용하였습니다. 루터는 이 은총을 교회를 벗어나는 것을 위해 씁니다. 그래서 어쩌면 역사적으로 너무나 많은 사람이 성체성사와 고해성사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은총을 구합시다. 그러나 은총이 나에게 시험이 되지 않으려면 교회를 사랑합시다. 교회에 유익하기 위한 목적으로 구합시다. 그러면 분명히 주님은 그 은총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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