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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3주일 다해, 생명주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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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3주일 다해, 생명주일] 요한 21,1-19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어떤 남자 청년이 있었습니다. 조용하고 무뚝뚝한 성격에, 같이 어울려보라고 불러도 반응이 영 시큰둥했습니다. 청년회에서 주최하는 행사에 참여하는 모습은 소극적이었고, 주일 저녁 미사가 끝나면 뒷풀이에 함께 하는 날보다 그냥 집으로 가는 날이 더 많았지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청년의 모습이 놀라울 정도로 급격하게 변화되는게 보였습니다. 뒷풀이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여 주도적으로 대화를 이끌었고, 청년회에서 주관하는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다른 사람들을 살뜰하게 챙겼지요. 갑자기 그렇게 바뀐 게 참 신기해서 그 청년을 따로불러 조용히 그 계기를 물어보았더니, 그 청년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청년회 안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거든요.” 그 청년의 행동을, 더 나아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바꾼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호감을 갖게 된 사람에게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전까지 머물러있던 부정적이고 무기력한 모습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게 된 겁니다. 바로 그것이 사랑이 지닌 힘이겠지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제대로 하여 구원받으려면 사람에 대한 사랑에만 머물러있을 게 아니라,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며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하느님 나라에서 참된 기쁨을 누리기에 합당한 존재로 변화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스승님의 명령에 따라 갈릴래아로 이동하여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거기서 뭘 해야 할지를 깨닫지 못해 무료한 시간을 보냈지요. 멍하니 갈릴래아 호수를 바라보고 있으니 거기서 고기를 잡으며 살던 어부시절이 생각났고, 오랜만에 실력발휘 좀 해볼 심산으로 고깃배에 오릅니다. 그런데 다시 배를 타고 그물을 잡은 그들의 행동은 그저 시간이 남는 김에 해보는 ‘잠깐의 일탈’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는 하는데 세상은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고, 그분께서 당장 자기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 같지도 않으니,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겁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통해 변화되는게 이만큼이나 힘들지요. 사탄이 우리의 나태함과 게으름을 자꾸 걸고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고 고된 광야생활에 지쳐 ‘차라리 이집트에서 노예생활하던 때가 좋았다’며 불평 불만을 늘어놓았던 것처럼, ‘차라리 예수님을 하느님의 뜻을 모르는 채로 속 편하게 살던 옛날이 더 좋았다’고 생각하게 하여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무지와 죄악의 어둠 속에 머무르며 그것이 주는 달콤함에 취하게 만들지요. 그러나 죄악이 주는 달콤함은 마치 마약과도 같습니다. 당장은 우리에게 즐거움과 이익을 주는 것 같지만, 그것에 빠져 있으면 불신과 절망이라는 좀벌레가 우리 영혼을 갉아먹어 결국 파멸에 이르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려는 안일하고 나태한 마음을 먹은 제자들로하여금 처절한 실패를 경험하게 만드십니다. 다른 건 몰라도 고기잡이라면 자신 있었는데, 다시 어부의 삶으로 돌아가면 예수님 없이도 자기 혼자 힘으로 잘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제자들은 밤새도록 애를 썼음에도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쓰라린 실패 체험을 통해 비로소 깨닫습니다. 자신들은 예수님 없이는 그 무엇도 제대로 할 수 없는, 한 없이 부족하고 약한 존재임을… 그렇게 그들의 마음이 한껏 겸허해져 있을 때 주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지라’고 명령하십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힘이 빠지기 전에, 그들이 자기 고집과 뜻을 내려놓기 전에 그런 명령을 하셨다면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제자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가 자신들을 실패와 절망의 수렁에서 구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자기들에게 그런 명령을 하는 이가 누군지도 몰랐지만, 그것을 즉시 받아들이고 실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명의 결과 놀라운 기적을 목격하게 되었지요. 그들이 주목해야 할 기적은 갑자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는 ‘결과’가 아닙니다. 겸손하고 열린 마음으로 주님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그분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깨닫게 된 것이 진짜 기적인 겁니다.
그러나 주님 말씀에 순명하여 그분의 모습을 한 두 번 알아보는 정도로는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기에 한 없이 부족합니다. 그렇게 변화되려면 주님 말씀에 순명하고 따르는 실천이 꾸준히 계속되어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힘은 오직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부터 나오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답변이 조금 이상합니다. 대답하는 사람인 ‘나’를 중심으로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답하지 않고, 대답을 들으시는 주님을 중심으로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알고 계십니다’라고 답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부족함과 약함에 대한 철저한 성찰에서 비롯된 답변이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자신있게 말했지만, 정작 주님께 위험과 고난이 닥치자 자신도 피해를 입게될까 두려워 세 번이나 주님을 배신했던 부끄러운 과거가 떠올랐던 겁니다. 그 ‘배신 체험’을 통해 베드로는 부족하고 약한 존재인 자기 자신을 삶의 중심에 두는 것이 얼마나 부질 없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주님을 자기 삶의 중심에 모시고 철저히 그분 뜻에 따르기로 결심합니다. 그런 깨달음과 결심이 “주님께서 알고 계십니다”라는 답변 안에 들어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베드로에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사랑을 너무 ‘머리’로만 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주님을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부족함과 약함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노력도 필요하지요. 하지만 주님은 베드로가 지금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크기나 정도를 물으시는 게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고 불이익을 당해도, 고통과 시련을 겪고 더 나아가 죽임을 당해도 끝까지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겠는지 그 ‘의지’를 물으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에 걸쳐 당신을 사랑하는지를 물으신 뒤에 비로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께서 미리 닦아놓으신 “꽃길”을 걸으며 좋은 것만 누리는 게 아닙니다. 참된 사랑을 한다고 해서 기쁘고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지요. 때로는 짜증나고 상처받으며 후회할 때도 있습니다. 사랑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가 무겁게 나를 짓눌러 힘겨울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과 고통보다 참된 사랑이 주는 기쁨과 행복이 훨씬 크기에 우리는 사랑의 힘으로 그 모든 걸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겨내는 겁니다. 바로 그 사랑이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생활의 본질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은 이성과 논리로 재고 따지는 일은 그만해야겠습니다. 그런 건 주님 뒤를 따르는 이 길을 더 힘들고 지치게 만들 뿐이니까요. 대신, 주님 말씀에 순명하여 그분 사랑 안에 깊이 머무름으로써 그 사랑의 힘으로 매일을 기쁘게 살아야겠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0 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