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3일 (일)
(녹) 연중 제12주일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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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1주일 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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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corenelia] 쪽지 캡슐

2024-06-16 ㅣ No.173366

[연중 제11주일 나해] 마르 4,26-34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많은 부모님들이 '자식 키우기 참 힘들다'고 하십니다. 좋은 것들을 해주고 싶어도 싫다며 밀어내고, 덜 고생하며 성공할 수 있는 길을 추천해줘도 제 뜻대로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며 굳이 고생길을 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식과의 관계에서 생긴 갈등과 상처로 마음 아파 하시는 경우가 많지요. 그런데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처럼, 자식은 원래 부모 뜻대로 되지 않는게 정상입니다. 애들은 누가 키우는게 아니라, 이런저런 경험을 바탕으로 스스로가 원하는대로 성장해나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비단 자식을 키우는 일 뿐만 아니라 살면서 겪는 많은 일에서 우리는 자기 뜻대로 무언가를 이룬다고 생각하기에 그 결과에 연연하고 집착하게 됩니다. 무슨 일이 잘 되면 '내가 잘 해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그렇지 못하면 '내 책임이다'라고 생각하며 그 결과에 얽매이는 겁니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의 능력과 힘으로 어떤 결과를 이뤄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의 삶을 주관하시고 이끌어 주셔서 그런 결과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결과에 집착하며 일희일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의 삶을 이끄시어 가장 좋은 결과를 내시도록 그분께 자기 자신을 의탁한 채, 내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내 삶 속에서,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 이를 신앙의 언어로 ‘하느님 나라’라고 부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우연’이라고 여기지만, 하느님을 믿고 사는 우리들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그분의 ‘섭리’로 여기고, 그 섭리가 완전하게 실현된 상태를 ‘하느님 나라’라고 부르며 희망하는 겁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그런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지요.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이며 푸른 나무는 시들게 하고 시든 나무는 무성하게 하는 이가 나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 높은 나무가 더 높아지고 푸르른 나무가 더 푸르러지는 ‘강자의 논리’가 세상의 이치라면, 높은 나무는 겸손을 알도록 낮추시고, 낮은 나무는 높게 만드시어 당신 공정을 드러내시는게 하느님의 뜻입니다. 또한 잎이 푸르른 나무는 욕심과 집착에 휘둘리지 않도록 지나치게 무성해진 잎을 떨구시고, 시든 나무는 무성하게 하시어 당신의 크신 자비를 보여주시는 것 또한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결과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과 의지입니다. 하느님은 당신께서 원하시고 말씀하신 것들을 그대로 이루신다는 겁니다. 믿음이 약한 우리가 미처 알아보지 못할 뿐, 그분 섭리는 우리의 오해와 무지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한결같이 우리를 참된 완성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그런 하느님의 섭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될까요?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는 구체적인 양상을 두 가지 비유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입니다. 여기서 씨는 하느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참된 행복으로, 구원으로 이끄시는 진리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말씀의 씨에는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그분 뜻을 따르기만 하면 그분의 능력에 힘 입어 놀라운 일들을 이뤄낼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담겨 있지요. 그렇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굳게 믿으며 그것을 내 마음 안에 심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 하느님 말씀은 내 안에 받아들이고 믿으며 따르려는 의지와 노력이 더해져야 내 안에서 싹을 틔우고 자라는 겁니다.

 

일단 내 마음 안에 심고 인내로 품으며 기다리면 말씀의 씨앗은 하느님의 뜻과 섭리에 따라 ‘저절로’ 자라 열매를 맺게 됩니다. 즉, 내가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느님의 힘이 내 삶에 작용하여 그분 뜻이 실현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부족한 우리는 ‘어떻게 그리 되는지 모릅니다’.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시기에, 그분 뜻에 따라 아무 문제 없이 착착 진행중이기에 우리가 미처 못느끼는 겁니다. 이는 ‘공기’나 ‘어머니의 사랑’과도 비슷하지요. 우리는 평상시에는, 그것이 부족함 없이 채워지고 있을 때에는 그 존재를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다 어떤 문제가 생겨 그 부족함이 느껴질 때에야 비로소 그 존재가 언제나 나와 함께 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고마움을 느끼게 됩니다. 하느님 사랑의 섭리 또한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가운데에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우리 삶 속에서 실현되고 있는 하느님 섭리를 알아보는 눈입니다.

 

둘째는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겨자씨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 작지만 성장하면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를 뻗는 것처럼, 하느님의 섭리는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아서, 당장 나에게 큰 이득을 가져다 주지 않아서 그 존재와 고마움을 모르고 살 때가 많지만, 힘들고 괴로울 때, 깊은 슬픔과 절망에 빠져 방황할 때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자 희망이 되어 줍니다. 그러니 나에게 당장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세상에서 성공하는데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하느님 말씀을 소홀히 여기서는 안됩니다. 언젠가 그 말씀이, 그 말씀 안에 담겨진 하느님의 선한 뜻과 의지가 나를 일으키고 되살릴 것을 굳게 믿으며, 그 말씀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그 믿음과 순명 안에서 예수님을, 나를 이끌고 살리시기 위해 가장 작고 약한 모습으로 오신 그분의 크신 사랑을 만나고 깨닫게 될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렇게 좋은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 오게 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좋은 하느님 섭리가 내 삶에서 이루어지게 할 수 있을까요?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 마음 속에 굳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즉 이 세상에 살며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보다, 하느님 나라에서 그분과 함께 참된 행복을 누리는 것이 훨씬 낫다는 분명한 확신을 지녀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의 마음에 들기 위해 쓸 데 없는 것들을 하느라 헛심을 쓰지 않게 됩니다. 나를 구원과 참된 행복으로 이끄시는 주님 마음에 들기 위해,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그런 우리 노력을 어여삐 보시고 갚아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부족한 노력을 당신 사랑과 은총으로 꽉꽉 채워 충만한 기쁨과 행복으로 돌려주실 것입니다.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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