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16일 (월)
(홍)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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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철 신부님_착한 목자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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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4-09-03 ㅣ No.175627

“종과 섬김의 영성”

 

 

오늘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은 각별한 인연의 중요성 때문에 ‘기념일’이 아닌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축일’로 지냅니다. 베네딕도 성인을 만난적은 없지만 동시대 분으로 성인을 참으로 흠모하여 ‘베네딕도 전기’도 썼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찾는 갈망, 배움에 대한 사랑, 하느님과 이웃을 섬김’에 있어 이분들을 능가할 분은 없을 것입니다. 말그대로 갈망의 사람, 배움의 사람, 섬김의 사람으로 한마디로 정의하면 하느님의 사람이요 하느님의 걸작품에 속하는 분들입니다. 두분이 바로 중세초 혼란기에 있던 유럽을 구했습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는 누구보다도 수도생활을 사랑하여 자기 집을 수도원으로 만들고 수도생활을 했으며, 평생 수도원에서 하느님만 섬기며 살려했던 분인데 교회에 순종하여 섬김의 교황직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느님 솜씨에 저절로 샘솟는 찬미와 감사의 마음입니다. 아름다운 두 분 축일 미사시 입당송도 흡사한 느낌입니다.

 

“복된 그레고리오는 베드로 좌에 올라, 언제나 주님의 얼굴을 찾고, 주님 사랑의 신비를 기리며 살았네.”<오늘 입당송>

“베네딕도는 그 이름대로 복을 받아 거룩하게 살았네. 그는 가족과 유산을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고 거룩한 수도생활을 추구하였네”<성 베네딕도 아빠스 대축일 입당송>

 

교황님이 참으로 얼마나 다양한 분야에 천재인지 그 업적 역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교황직만해도 벅찼을텐데 영국에 선교사들 파견, 야만족들의 침입으로부터 로마 수호, 그리고 방대한 저술활동을 보면 도대체 어느 시간에 저렇게 많은 일을 하셨는지 정말 불가사의의 신비입니다. 

 

전례개혁도 독보적입니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물론 미사중 빵 나눔후에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도 교황님의 창안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정말 질그릇 속에 엄청난 하느님의 보물을 지니신 분입니다. 이 성인 교황뿐 아니라 우리 역시 질그릇들 속에 엄청난 보물을 지니고 있음을 한시도 잊어선 안됩니다. 

 

성 예로니모, 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와 더불어 서방의 4대 교부에 속하는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입니다. 큰 대(大)자가 붙는 교황은 대 레오 교황과 더불어 둘뿐입니다. 교황 재위 14년 동안이지만, 교회 발전과 중세 교황직의 발전에 영향은 멀리멀리 미치기에 대 교황이라 불립니다. 

 

그 옛날 분이 흡사 현대인처럼 느껴지는, 시공을 초월하여 늘 현존하는 분처럼 느껴지는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교황님입니다.  성녀 모니카의 아들이 성 아우구스티노 였듯이, 성녀 실비아의 아들이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이요, 또 생각나는 성녀 헬레나의 아들, 위대한 황제 콘스탄티누스입니다. 모전자전, 그 어머니에 그 아들들입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이 얼마나 하느님을 잘 섬기며 돌봐드렸는지, 선종하자 얼마 안되어 신자들의 쇄도하는 요구에 시성되었고, 묘비명도 “하느님의 집정관(Consul Dei)”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그대로 일치되는 참으로 ‘종과 섬김의 영성’의 표본이 되는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이 직분을 맡고 있으므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우리 자신은 예수님을 위한 여러분의 종으로 선포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이 흡사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고백처럼 느껴집니다.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공식문서에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분입니다. 교황권을 ‘지배하는 특권’이 아니라, ‘봉사하는 특전’으로 이해한 참 멋진 교황이며, 후임 교황들 역시 이 칭호를 즐겨 사용하게 됩니다.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은 같은 어원입니다. 오늘 복음은 섬김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결코 군림하는 자나 권세를 부리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

 

공동체의 중심에는 바로 섬김의 원조인 주님께서 계심을 깨닫습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를 섬기려고 오신 분이요, 이런 주님을 섬길 목적으로 생긴 것이 베네딕도 수도공동체이기에, “주님을 섬기는 학원”이라 정의합니다. 

 

비단 베네딕도회 수도자들뿐 아니라 종과 섬김의 영성은 그리스도교의 핵심적 복음적 영성이요, 직무가, 권위가, 여정이 있다면 섬김의 직무, 섬김의 권위, 섬김의 여정이 있을 뿐이겠습니다. 평생 죽을 때까지 섬김을 배워가며 살아가는, 종과 섬김의 영성을 살아가는 우리 신자들의 삶입니다. 

 

순교자 성월이 시작되자마자 9.2-9.13일까지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 제45차 해외 사목 순방길에 오른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섬김의 직무에 열정을 다하시는 충실하신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저보다 무려 13세 연상의 88세 고령이나 영성은 “영원한 청춘”이요 우리를 참으로 부끄럽게, 분발하게 합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님은 그의 생애 대부분 수도생활 초기 지나친 고행 생활로 통풍과 소화장애로 고통을 겪었지만 지적으로는 끝까지 활력넘치는 삶이었으나, 선종 몇 년 동안은 침대에 누워 극도의 병고중에 지냈습니다. 604년 선종전 교황님의 일기에 나와 있는 기록의 상황도 눈에 선합니다.

 

599년 일기에는 

“열 한달 동안 나는 거의 침대를 떠날 수 없게 되었다. 통풍과 고통과 근심들로 너무 괴로운 나머지 매일 죽음의 안식을 기다린다.” 라 썼고, 

600년에 일기에는 

“나는 근 2년 동안 침상 위에 매여 있었다. 통증이 너무 괴로워서 축일에서 조차 세시간 동안 일어나 미사를 봉헌하기가 버겁다. 나는 매일 죽음의 문턱에 서고, 매일 그 앞에서 내쳐진다.”고 적었으며, 

601년 일기에는 

“오랫동안 침상을 떠나지 못했다. 나는 애타게 죽음을 기다린다.” 썼습니다.

 

그대로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한 교황님의 마지막 고통의 생애가 순교자 성월 9월에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전구가 우리 모두 9월 순교자 성월, 순교적 삶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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