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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음대신에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 / 연중 제33주간 목요일(루카 19,41-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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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웃음대신에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 / 연중 제33주간 목요일(루카 19,41-44)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를 의미한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계약의 궤를 이곳에 모셔 온 뒤,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평화의 중심지였다. 이렇게 그 이름의 의미가 무색하게도 하느님에 대한 배반과 무관심마저 반복되는 그 죄를 예언자들이 거듭 경고했지만, 기원전 6세기에 결국 이스라엘은 바빌론에 의해 함락되고 유배를 경험했다. 도성에 서신 예수님께서 우신다. 그분께서 웃으셨다는 말은 없고 다만 몇 번 눈물을 흘리셨단다. 당신께서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메시아로 오셨건만 구세주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한 채 회개는커녕, 반목과 불신으로 서로를 감시하는 아버지 뜻에 반하는 오만을 보시고는 끝내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셨다. 더구나 당신이 지금 서 계신 그 성전이 곧 무너져 파괴될 것을 생각하니 참담하면서도 억울하기까지 여기신 것 같다. 그만큼 예수님 눈물은 큰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 눈물’이기에. 그러기에 다시 이 도시에 영원한 평화와 구원을 가져오시려고 예수님께서 입성하시건만, 정작 예루살렘은 메시아이신 당신을 완강히 거부하기에 안타까움에 눈물을 쏟아 내시는 거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이스라엘의 멸망을 미리 내다보셨다. 파멸의 원인은 유다인만이 구원받는 율법만 지키면, 어떤 간섭도 필요가 없는 독선이요 자만심이었다. 이는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의 보속임을 아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비극적 운명이 그들이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나. 그리하여 기원후 66년 로마 총독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큰돈을 강탈한다. 이에 유다인들이 반발하자 총독은 군인들을 성전 안에 배치하였고, 유다의 저항 세력들은 주둔해 있던 로마 군인들을 몰아낸다. 그리고는 황제에게 바쳐진 제단을 없애고, 이를 말리던 대제사장마저 살해한다. 제1차 유다 독립 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소식을 접한 네로 황제는 진압군을 파견하여 북쪽 갈릴래아부터 공격을 개시한다. 그래서 67년 이스라엘 북부는 장악되었고, 69년에는 사령관 티투스(Titus)의 지휘 아래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했다. 드디어 그 성벽은 무너졌고 이스라엘은 멸망했다. 기원후 70년경이었다. 이처럼 고인 물은 의당 썩게 마련일 게다. 비록 그들이 하느님께 선택된 민족일지라도 선민답게 살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고통을 겪는다. 위대한 민족이라는 무늬만 믿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기에 이스라엘은 로마인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우리는 세 종교의 성지를 품고 있는 거룩한 곳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이 도시의 현실을 자주 떠올린다. 오늘날 지독한 반목과 폭력의 상징이 되는 현실이 우리 마음을 정녕 무겁게 한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일 게다. 내 신앙은 옳고 남의 믿음은 별 볼 일 없는 것으로 여기는지 돌아봐야 하리라. 자신만 구원된다는 생각만큼 옹졸한 것은 없다. 하느님께서는 만민의 주님이시지, 어떤 특정인의 주님은 아니시기에. 이 단순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유다인들은 시련을 겪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월감에 점점 악해지는 이스라엘에게 충격 요법을 쓰신 것이다. 성전의 멸망이라는 ‘히든카드’를 꺼내신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가 이기심, 믿음의 부족, 이웃에 대한 무관심과 혐오로 사로잡혀 자신을 스스로 파괴되지 않기를 바라신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언제 이런 엄벌을 내리실지 자신의 지금의 삶의 모습을 꼼꼼하게 묵상해 봐야만 할 게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우시지 않고 웃으시도록 우리의 삶을 고쳐 살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