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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존엄한 품위의 인간 “하느님의 모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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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11.연중 제5주간 화요일 (세계병자의 날)
창세1,20-2,4ㄱ 마르7,1-13
존엄한 품위의 인간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 내 주시여, 온 땅에 당신 이름 어이 이리 묘하신고 하늘 위 높다랗게 엄위를 떨치셨나이다.”(시편8.2)
자식자랑은 팔불출에 속한다는데 제자들 자랑은 괜찮겠지요. 지난 토요일에는 3명의 옛 초등학교 6학년때 여제자들이 저를 찾아와 함께 했습니다. 각자 삶의 제자리에서 얼마나 반듯하고 똑똑하게 치열하게 산 제자들인지 감탄했습니다. 1977년때 6학년때 제자들이니 48년전 13살 때 아이들이 지금은 61세 환갑을 넘긴 제자들입니다. 당시 저는 29세 청년교사였습니다.
이중 한 제자는 5-6학년 2년동안 가르쳤던 제자로 유난히 고마워하며 시종일관 제 시중을 들었습니다. 지금도 보관중인 그 제자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남긴글입니다. 쌍둥이 아들을 둔 제자로 다음주 결혼하는 친구처럼 지내는 큰 아들은 고등학교 영어교사입니다.
“일기장을 펴보니 나의 고민, 선생님의 격려 말씀뿐이었다. 이제 고민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나는 선생님께 지금도 고마움을 느낀다. 선생님의 말씀 끝에 보람을 찾게 되다니. 이제 밑바닥 신세는 면하게 되었다. 기쁘다. 아버지같이 정답게 느껴지는 선생님께 어떻게 보답해 드려야 할까?”
이 제자가 이번 만남때 편지글도 줬습니다.
“까마득한 어린시절, 진정 우리 시대의 참 선생님이였던 이수철 선생님! 선생님의 사랑과 겸손, 온유함을 보면서 또 그 사랑을 받은 제자로서 어떻게 부족한 이에게 사랑을 주어야 할 지를 배웠습니다. 영원히 제 가슴 속에 제 인생의 참선생님으로서 기억됨을 감사합니다.”<2025.2.8. 제자 이정민 올림>
무엇보다 이 제자는 파워우먼으로 영원한 현역의 직장인이자 평생 한결같이 신앙생활을 하는 모범적 개신교 신자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인 ‘존엄한 품위의 사람’으로 잘 성장, 성숙한 참으로 자랑스런 제자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선명한 39년전 1986년 신학대학원 1학년때 문세화 외방선교회 출신 교수 신부님의 강의 내용입니다.
“‘사람답게’ 너무 추상적입니다. 구체적으로 분명히 하여 ‘자녀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한결같이 평생 날마다 어느 삶의 자리에서든 존엄한 품위의 인간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이 사람으로 태어난 본분이자 행복이요 보람일 것입니다. 미사전례중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전 늘 감격하는 “하느님의 자녀 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 라는 사제의 권고 대목입니다. 하느님의 자녀, 바로 우리의 고귀하고 존엄한 신원을 말해 줍니다.
제가 수도생활하면서 많은 시를 썼는데 대표적 짧은 시는 작년 후반부 탄생했습니다. 평생 좌우명으로 삼고 싶은 짧은 고백시로 참 자주 나눴어도 늘 새로운 두 시를 다시 또 나눕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젊음은 나이에 있는게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 열정에 있습니다. 평생 죽을 때까지 날마다 새롭게 폈다지는 영원한 현역, 영원한 청춘의 ‘파스카의 꽃’같은 봉헌의 삶,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입니다. 제 교대시절 학장의 호가 ‘다운’이었습니다. 이어지는 또 하나의 고백시입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집무실 문을 열 때 마다 한 눈 가득, 가슴 가득 안겨 오는 불암산을 볼 때 마다 저절로 솟아나는 시입니다. 물론 당신이 지칭하는 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앞에서의 삶, 바로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이겠습니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오늘 독서와 복음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제1독서는 창세기 천지창조 마지막 부분으로 매 창조시 후렴처럼 반복되는 세 말마디가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천지창조의 절정은 사람 창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1,27)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삶’, ‘하느님을 참으로 기쁘시게 하는 삶’, 베네딕도회의 또 하나의 모토, ‘참으로 모든 일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에 유일한 답은 사랑뿐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답이 없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이웃을, 자연을, 삶을, 모든 삶의 수행을 사랑할수록 주님을 닮아가면서 명실공히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이겠습니다.
그러니 사랑은 분별의 잣대이자, 율법의 완성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무지했습니다. 하느님의 근본 법인 사랑이 아니라 조상들의 전통에 바탕한 일반 관행을 분별의 잣대로 삼습니다. 참마음, 참사랑을 도외시한 본질직시가 아닌 우선순위를 잊은 본말전도의 삶입니다. 주님은 이사야 예언을 근거로 자신 불편한 심정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그대로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는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면서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관행이나 율법은 참고사항일뿐 절대적 법은 하느님의 사랑의 계명 하나뿐입니다. 오늘 말씀 주석을 읽으면서 공감한 부분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열왕기 상권에서 솔로몬은 ‘하느님은 실로 지상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묻는다. 창세기가 주는 답은 ‘그렇다!(YES!)’이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사람들이기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사신다(God dwells with us, within us). 솔로몬의 성전처럼 거룩한 장소들도, 바리사이들의 손씻는 것 같은 거룩한 수행들도 하느님의 법이 선포하고 보호하는 인간의 거룩한 존엄에 비하면 모두 빛을 잃는다(all pale in).”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존엄한 품위의 사람들, 바로 우리의 자랑스런 신원입니다. 답은 사랑뿐입니다. 한결같은, 끊임없는 사랑의 실천이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합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따뜻이 돌보시나이까 천사들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시편8,5-6).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