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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 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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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식 [goodactor] 쪽지 캡슐

2025-02-18 ㅣ No.232679

*데우스 마키나


데우스 마키나는 시나리오(영화대본)상의 결말을 내는 성격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결말의 기법은 아니다
보통 영화의 히어로 캐릭터는 스스로의 성격과 능력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자신이 겪게 된 사건을 해결하거나 그 종지부를 찍는다
그런 극적 과정을 재미있게나 감동적으로 엮어내면 영화는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들 보고 거의 비슷하게 재미있다고 하거나 감동적이라고 할 때는 사람들의 보편적 인간성에 와 닿은 그런 부분들이 있다는 말과도 같기 때문이다
영화를 본다는 것, 그것에 굳이 자기 의식과 감정을 왜곡시킬 이유도, 사적 이해관계에 근거시킬 사유도 없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그 비평이나 소감이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데우스 마키나는 그런 바탕에서 다들 잘된 결말이나 납득할 만한 대미의 장식으로 보지는 않는 것이다
어째서 그럴까
먼저는 극적으로 너무 쉽게 끝을 내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좀 더 과감하게 신랄하게 직설하자면 너무 성의가 없거나 수준이 형편없거나 하는(영화를 만든 사람들, 곧 스태프들의 무능이나 무성의한 태도로 보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영화가 뭔가 그럴듯하게, 캐릭터들의 성격이 볼만하게 드러나고 그런 성격들이 극 속에서 흥미진진하게 사건이나 배경들과 맞물려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다가 당연히 그 모든 극적 과정 속에서 극적인(드라마틱한, 서스펜스한, 등등의 영화적 결말) 장면이 연출될 것이라 기대하는 그 대단원에 마치 맥없이, 찬물을 끼얹 듯 끝내는 게 바로 그런 데우스 마키나적 종결인 것이다

성경을 보면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복잡하게 구시는 것처럼 하느님의 신성(본질과 성격)을 드러내는 이야기들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삶의 이야기들을 꼬고 꼬아서 누군가 그 삶들을 보는 이들의 흥미를 채워주려고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의도를 부리지는 않는다는 것이 성경 저술의 입장과 관점인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이 계명을 때론 자신들의 삶이나(생존과 의의) 세상을 살면서 겪게 될 일들에 대한 그 어떤 해결이나 처리가 있게 만들 수 있는 조건의 수용이나 전제의 수렴으로 보기도 하는데 성경을 보면 그렇게 이해하게 만들만한 표현들이나 화법들도 적지 않다
구원이라는 일도? 역사도? 그렇게 그 어떤 전제나 조건의 수렴이나 수용으로 보게 되는 관점이 당연히 만들어지고 마땅한 입장으로 성립되게 되는데 그러할 때 진리는 다소 그 살아있는 신성과 생생한 진실이 잘 와 닿지 않는 거리감이나 소외감에 묻힐 수 있고, 다소 동떨어진 선상으로 멀어질 수도 있게 된다
그런 불합리와 불일치, 그런 부동의와 부조리가 삶에 괴리로 들어설 수도 있고 모순되고 상반된 입장으로 비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너무 효과적인 것으로, 너무 기대적인 것으로 기우는 그런 진리에 대한 감응은 인간들의 맹목과 그런 류의 맹신을 조장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진리의 참된 본질과 성격이 그렇게 있는 그대로 발현되거나 발화되어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한 처음에 하느님이 첫 인간들인 아담과 하와에게 너무 단호하게 하셨다(구셨다)라고 말할 수 있는 카톨릭 신자는 이 지구상에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있는 그대로 하느님의 진리가 사실이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가 겪게 될 진리의 진실성과 사실성 있는 노선과 도상이 너무 참혹하고 암담해서 하느님의 변심과 변덕이 일어나(그 혹독한 삶의 무게와 짐을 지고 살 게 뻔히 보이므로) 그런 일을 없게도, 다른 방향으로, 다른 방식으로 틀 수도, 틀어 버릴 수 있음에도 하느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그러면 아담과 하와를 진심으로,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하느님은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성경을 바람직하게 보려면 그런 이야기들이 드러내는 하느님의 신성(본질과 성격)을 반드시 보아야 하는, 알아야 하는 경지에 이르러 가야 한다
인간들의 자기식의 이해와 설명은 언제나 그 주장들과 만행들로 도가 넘을 때도 많다
때론 거짓을 꾸며서도, 사기를 치면서도, 왜곡에 왜곡을 덧대면서도 인간들은 자기 욕망과 의도를 관철하려고 안달을 내기도, 사단을 내기도 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그런 인간들의 주장들과 만행들이 통하지 않는 하느님이 버티고 계신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행복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카톨릭 신자라 해도 예수님의 말씀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사람들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군가들은 삶의 행복에 대해 감이라도 잡지만, 누군가들은 스스로들의 행복이 무언지도 모르기도 한다
어째서 그런지 누가 알겠는가
그리고 행복같은 상태?나 현상?은, 실체로도, 현실로도 다소 추상적이기에 자칫 의식 속에서만, 정서 속에서만 맴돌기도 하는 것이다
행복이 불멸의 확신으로, 불변의 진실로 삶에 살아있으려면 언제나 어디에서나 많은 일들을 겪고 삶의 지평 속에서 자기 삶에 머물러야 하는 사람들의 입장과 형편에서는 늘 머나 먼 정글을 지나는 것처럼 나날의 세상이 펼쳐져 가기만 하는 데에서도 어떻게들 살아야 하는지 늘 그 과제와 과업으로만 그 현존의 실현가능성을 찾을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삶의 국면과 나쁘게는 삶의 굴레 속에서 최선은 분명 행복으로의 방향과 지향에서 벗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모든 차이와 간극, 모든 격차와 차별 속에서도 최선은 살아있을 수 있다
단지 그 차이와 간극에, 그 격차와 차별에, 넘을 수 없다는 돌의 장벽을 두거나, 벗어날 수 없다는 철의 장막을 쳐 놓는 어리석음과 소심함에 빠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사람들이 구원을 그런 식으로 본다면 늘 그렇듯 하느님의 자비도 불합리한 구석으로 몰리고 부조리한 처사로 돌려질 수도 있다
언제나 마땅함을 바라는 인간들을 우리 모두는 보고 산다
조금도 틀리지 않는 거의 완벽하고 완전한 마땅함, 그 합리를, 그 공리를, 그 공명정대함을, 그 정당함을 우리 모두는 바라고 살지만, 정작 우리들이 그 문제에 서고, 그 문제의 당사자가 되면 우리 모두는 우리의 입장과 형편을 내세워 우리 일에 대한, 우리 잘못에 대한 하느님의 변심과 변덕?이 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쪼그라든대로 하느님도 우리 입장에 맞게, 우리 눈높이에 맞춰 그에 합당한? 작동을 달리? 따로? 만들어서라도, 뭔가의 수를 내서라도 하느님에게 더 마땅한 대응을 해 주기를 주장하고 요구하며 우리 뜻대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나선다
실제로 하느님과 우리 모두를 갈라 놓는 선은 그런 우리의 본성과 성격이다
파스카는 그 선을 넘는 실제의 일인 것이다

그게 쉬워 보이는가?

하느님이 한 자비로, 한 은총으로, 무한한 사랑으로 마음만 내키면, 하기만 하면 되는 일인가

우리 모두가 하느님이 만들어 놓은 AI나 인공지능자동화자율 로봇의 입장에서 벗어나고 그런 존재 최악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본질과 성격을 알고 우리 생명에 심어진 그런 우리의 실체적 진실과 성격, 곧 그런 생명이 되고 그런 생명으로 살아있어야 한다

이제 진리를 알고 살려면 진리를 단지 우리가 살기 위해, 살아 남기 위해 받아들여야 하는 그 어떤 전제나 조건으로만 보는 이해에서 벗어나야 한다
진리가 곧 우리 생명의 본질임을 우리의 참된 성격을 이루는 진실임을 알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할 때, 우리 자유로도, 우리의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최선으로도 우리가 진정 하느님과 함께 살아있을 수 있는, 살 만한 우리의 참된 생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의 창조주이시고, 우리 생명의 부모이시다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가 있고 우리가 사는 우리의 생명을 지니고 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고 영원히라도 그럴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못마땅하고 불만인가
무엇이 그렇게 못살겠고 불행한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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