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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자비하신 하느님 닮기 “언제나, 사랑으로 스스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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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23.연중 제7주일
1사무26,2.7=9.12-13.22-23 1코린15,45-49 루카6,27-38
자비하신 하느님 닮기 “언제나, 사랑으로 스스로 존엄을 지킵시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시편103,8ㄱ;103,1)
가톨릭평화신문, 가톨릭신문등 교회의 양대신문 1면 기사가 동일했습니다. “이성효 주교가 마산교구에 선물한 세가지 보물”이란 제하에 다음과 같은 강론 내용이었습니다.
“이곳에 오면서 마산교구 발전을 위한 세가지 보물을 가지고 왔는데, 그것은 감사의 보화, 겸손의 보화, 기도의 보화다. 이 보화는 제것이 아닌 교구의 것으로,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 모두 어려움이 있을 때 꺼내 볼 수 있다. 이 보화는 퍼내면 퍼낼수록 더 샘솟는다. 우리 모두에게 위로와 격려의 은총을 주시기를 성모님께 전구하자.”
멋지고 아름다운 강론의 요지였습니다. 사랑의 감사, 사랑의 겸손, 사랑의 기도이니 결국은 사랑의 보물을 가지고 왔다는 말씀입니다. 참 신기하고 은혜로운 것이 퍼내면 퍼낼수록 끊임없이 샘솟는 사랑이라는 것이요, 이런면에서는 누구나 부자입니다. 또 양대신문 한면을 차지하고 있는 박승찬 엘리야 교수의 기사였습니다.
“종교의 본래 역할, 가톨릭 정신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신학용어로는 케노시스 즉 자기비움이죠, 교회가 자기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순간 가치를 잃어요. 육화, 자기를 비워 우리에게 다가와 주신 하느님,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처럼 교회는 스스로 비우고 녹아들어 사는 역할을 해야 해요.- 또 하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격개념입니다. “인격은 교환불가능하다. 아무리 돈많은 부자도 타인의 인격을 살 수 없다.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고유하고 대체불가능하게 창조된 ‘인격체’는 무엇으로도 손상될 수 없는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
케노시스는 바로 자발적 자기비움의 사랑입니다. 사랑의 케노시스입니다. 살아 있는 사랑의 보화가 바로 인격체입니다. 사랑이 있어서 비로소 인격체를 지닌 사람이니, 사랑-삶-사람이 하나의 인격체로 드러남을 봅니다. 얼마전 써놓고 자주 되뇌는, 정주의 사랑을 노래한 “당신은” 이란 좌우명 고백시가 생각납니다. 한 번 인용했지만 하느님 사랑이 되고 싶은 소망에 다시 나눕니다.
“산이 산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늘 깊은 산이예요
강이 강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늘 맑게 흐르는 강이예요
바다가 바다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늘 깊고 넓은 바다예요
하늘이 하늘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늘 높고 푸른 하늘이예요”<2025.2.12.>
하느님 사랑이, 자비가 되고 싶은 욕망의 청정욕(淸淨慾)은 언제나 좋습니다. 하느님 자비가, 사랑이 됩시다. 최고의 행복입니다. 사랑이 답이요 사랑이 길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평생공부가 사랑공부입니다. 인생은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사랑의 학교요 아무리 공부해도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일뿐이요 이런 자각이 겸손한 마음으로 사랑의 전사가 되어 분투의 노력을 다하게 합니다.
사랑은 정의롭고 당당합니다. 스스로 존엄을 지킵니다. 비겁하거나 비열하거나 비루하거나 야비하지 않습니다. 바로 제1독서의 다윗이 그 빛나는 사랑의 모범이요 감동이고 참 좋은 교훈이 됩니다. 유혹에 빠져 사울을 죽일 절호의 기회를 포기함으로 자신의 존엄을 지켰으니 그대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모범입니다. 다윗과 사울이 주고 받은 대화가 아름답습니다.
“주님은 누구에게나 그 의로움과 진실을 되갚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주셨지만, 저는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려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제가 오늘 임금님의 목숨을 귀중하게 보아 드렸으니, 주님께서도 제 목숨을 귀중하게 보아 주시어 온갖 재앙에서 건져 주시길 바랍니다.” “내 아들 다윗아, 복을 받아라. 너는 하고자 하는 일을 반드시 해 낼 것이다.”
다윗의 인품이 참 훌륭합니다. 서로의 존엄을 지켜주는 사랑이, 복을 빌어주는 사울의 사랑이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바로 이런 고귀한 보화같은 사랑이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바,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을 지니게 합니다. 사람이라 다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을, 예수님의 모습을 지닐 때 비로소 참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첫 인간은 땅에서 나와 흙으로 된 사람입니다.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예수님의 사랑을, 자비를 닮을수록 우리도 하늘에 속한 예수님 그분처럼 될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계신 예수님이요 그대로 예수님 사랑의 체험담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대로 예수님 자신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런 사랑공부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결코 값싼 사랑은 없습니다. 살아 있는 그날까지 부단한 사랑의 선택, 사랑의 훈련, 사랑의 습관을 요구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사랑 강론이 참 기막히게 좋습니다.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시공을 초월한 명강론입니다. 이런 사랑 실천이 서로의 존엄성을 지켜줍니다. 상호존중과 배려의 순수한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이 서로 존엄한 품위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무지와 허무의 악에 대한 처방도 이런 사랑뿐입니다.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됩니다. 자기 존엄성이 파괴되면 얻는 것보다 잃는 손실이 막대합니다. 이런 사랑이야 말로 보복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버립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남을 심판하지 않을 때, 악마도 더 이상 유혹하지 못하고 포기하고 떠납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악마들에게 최고의 방어이자 공격은 이런 밑빠진 독에 물붓듯 하는 일방적 무사한 사랑, 아가페적 사랑뿐입니다. 결코 유유상종(類類相從)의 이해관계의 사랑이 아닙니다.
이런 사랑이 악(惡)을 무장해제시켜 무력화(無力化)시키고 서로의 존엄을 지켜주며 참으로 서로 부요하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합니다. 아무리 퍼내 주어도 결코 마르지 않는 하느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샘솟는 사랑이요, 바로 이 사랑이 영적승리로 이끄는 천하무적(天下無敵), 인자무적(仁者無敵)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명강론 다음 절정 부분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 해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부여하신 평생과제요 이런 사랑의 영원한 롤모델이 예수님입니다.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기대수준은 이렇듯 높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신망애(信望愛) 수준 못지 않게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신망애 수준도 높습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우리도 “하느님 나의 자랑이듯이, 나 역시 하느님의 자랑이어라” 고백했으면 좋겠습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사랑 은총이 우리 모두 하닮의 여정, 예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2).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