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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7주일 다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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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7주일 다해] 루카 6,27-38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계명들은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지만, 그 중 가장 실천하기 버겁고 난감한 것을 고르자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오늘 복음 말씀일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를 괴롭히시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고 완성으로 이끄시기 위함이지요. 오늘의 제1독서인 사무엘기에 그 대표적인 ‘모범사례’가 등장합니다. 바로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다윗’입니다. 다윗은 충성을 맹세한 신하로써 사울 왕을 성심성의껏 섬기고 보필했지요. 이스라엘을 이끄는 장군으로써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공도 세웠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백성들 사이에서 자기보다 인기가 더 높다는 사실에 질투심을 느낀 사울 왕은 다윗을 핍박하고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듭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사울 왕에게 복수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의 목숨을 빼앗을, 그래서 도망자 신세에서 벗어나 권력을 차지할 절호의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음에도 사울 왕에게 자비를 베풀지요. 사울 왕이 자신에게 저지른 악행을 보지 않고 그를 이스라엘의 첫 임금으로 세우신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지켜야 할 ‘선’을 넘지 않은 겁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던’ 당신 피조물 하나 하나를 얼마나 귀하고 소중히 여기시는지를 깨달은 이는 ‘좋고 싫음’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이를 나 또한 사랑하는 법이지요. 그런 마음으로 원수를 사랑하고 하느님의 뜻인 자비를 실천한 다윗은 이스라엘 민족의 최전성기를 이끈 ‘성왕’으로써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하신 ‘원수’는 멀리에 있지 않습니다. 다윗 일생 최대의 원수가 되었던 사울 왕은 그 누구보다 친밀하고 신뢰가 두터웠던 ‘주군-신하’ 관계였지요. 이렇듯 ‘원수’는 그 누구보다 신뢰하고 사랑했다가 어떤 이유로 인해 갈등이 생겨 미워하게 되는, 사랑이 컸던 만큼 실망과 배신감의 반작용이 커서 죽을만큼 미워하게 되는 ‘애증’(愛憎) 관계에 놓인 이들입니다. 가족이 친구가 동료가 내 원수가 되는 겁니다. 차라리 다시는 얼굴 안 볼 ‘남남’이라면 눈 딱 감고 용서한 뒤 관계를 끊어버리면 되는데, 그럴 수 없는 사람이기에 자주 마주치고 자꾸 엮이면서 마음이 불편해지고 그를 향한 증오도 점점 더 커지게 됩니다. 그게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예수님 말씀대로 용서를 하고 싶어도 잔뜩 엉키고 꼬인 관계의 실타래가 당최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답답한 노릇입니다. 그런 자기 모습이 너무 속 좁고 한심해 보여서 날이 갈수록 자괴감은 더 깊어져 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지금 당장, 한 방에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분명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마음 속에서 그를 향한 미움이 다시 솟아나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화해를 향해 계속해서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것입니다. 힘들고 괴로워도 포기하지 않고, 내 마음에 증오의 불길을 일으키는 부정적 감정들을 사랑과 자비로 조금씩 덮어가다보면 언젠가 그 불길은 사그라들고 내 마음에 시원한 평화의 바람이 불어올 겁니다. 아픈만큼 성장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들을 해야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크게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남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나도 남에게 해주는 것’입니다. ‘내로남불’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자기 잘못은 관대하게 덮으면서 남의 잘못은 엄격하게 심판하고 단죄하려드는 옹졸함에서 벗어나라는 뜻입니다. 내가 연락도 자주 하지 않고 무심해도, 바쁘다는 핑계로 살뜰히 못챙겨도 그가 나를 사랑해주기만 바라지 말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나에게 잘해주지 않는 사람을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사랑을 함에 있어서도 내가 상대로부터 먼저 받아야만, 내가 받은 그만큼만 내어주겠다는 계산적인 태도를 버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사랑을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데에 대가를 바라지 말고 사랑 그 자체에서 기쁨과 보람을 찾으라는 뜻입니다. 참된 사랑을 실천한 보상은 하느님께서 직접 해주실 것입니다. 그 보상은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과 사랑으로 완전히 일치되어 그분께서 누리시는 기쁨과 행복을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 즉 온전하고 균형 잡힌 하느님의 자비를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네 가지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심판하지 마라’, ‘단죄하지 마라’, ‘용서하라’, ‘주어라’. 앞의 두가지 동사는 나쁜 것을 행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행동지침이고, 뒤의 두가지 동사는 좋은 것을 행하라는 적극적인 행동지침입니다. 심판과 단죄처럼 우리 권한에 속하지 않는 것을, 하면 할수록 서로를 점점 더 깊은 죄의 수렁으로 끌고 들어갈 뿐인 부정적인 일들을 하지 않으면 상황이 더 이상 악화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나아지지도 않은 채 위태로운 상태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러나 용서와 자선처럼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소명을, 서로에게 하면 할수록 함께 발전하여 마침내 완성에 이르게 해주는 긍정적인 것들을 열심히 실천하면 날마다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어 조금씩 하느님을 닮아가다가 언젠가 그분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되지요. 그러니 지켜야 할 선을 넘지만 않으면 된다는 안일함에서 벗어나 계명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며 그 안에서 의미와 보람을 찾아야 합니다.
셋째는 내가 되질하는 그 되로 나 또한 되받으리라는 ‘인과응보’의 원칙을 마음에 새기고 사는 것입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만연한 요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요. 하느님은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가 넘치시는’ 자비로운 분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행한대로 갚으시는’ 공정한 분이시기도 합니다. 또한 당신께 내민 우리 손에 차고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주시는 너그러운 분이시기도 하지요. 즉 내가 이웃에게 자비와 선을 행하면 하느님께서 거기에 은총과 축복을 덤으로 듬뿍 담아 나에게 돌려주실 것입니다. 반면 내가 이웃을 미워하고 배척하며 내 기준으로 판단하고 평가하면, 하느님께서 거기에 무시무시한 심판과 벌을 담아 나에게 돌려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내 안에서 증오와 원망을 비워내고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주어야겠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이들입니다.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 마음에 무거운 짐을 얹으시려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을 닮은 그분 자녀가 되어 은총과 축복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