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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악(惡)에 대한 유일한 처방 “하느님 중심의 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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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4.4.사순 제4주간 금요일 지혜2,1ㄱ.12-22 요한7,1-2.10.25-30
악(惡)에 대한 유일한 처방 “하느님 중심의 삶”
“하느님, 당신 이름으로 저를 구하시고, 당신 권능으로 제 자유를 찾아 주소서.”(시편54,3)
악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바로 오늘 강론 제목부터 확인해 놓고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참나의 실현이자 완성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나타내는 참 좋은 말씀들을 열거해 봅니다.
1.믿음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큰 일도 작은에서 시작한다.
2.사람과의 신의를 지키는 일은 먼 이상이 아니라, 일상에서 실천해야 할 덕목이다.<다산>
3.‘이익을 보면 의로운가를 생각하고’(견리사의;見利思義), 위기를 보면 목숨을 바치며, 희미해진 약속이라도 잊지 않는다면, 완성된 인간이라 할 수 있다.<논어>
4.도시의 공원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에 <공원의 위로>라는 책을 구입해 읽고 있습니다. 일부 내용을 인용합니다.
‘공원은 도시의 괄호다. 도시의 소란에서 탈주해 자발적으로 표류할 수 있는 장소다. 도시는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담아내며 일상의 미학적 문해력을 길러준다. 공원은 지역사회와 공동체를 건강하게 지탱해주는 사회적 인프라다. 공원은 도시의 여백이다. 미래세대를 위한 숨통이다. 공원은 인간뿐 아니라 다양한 비인간 생명체와 사물이 함께 거주하는 혼종의 경관이다. 무엇보다도 공원은 누구에게나 자리를 내어주는 위로의 장소이자 모두를 환대하는 공간이다.’
진정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하느님을 닮은 넓고 그윽하고 편안한 ‘위로와 환대의 공원’같은 존재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런면에서 여기 요셉수도원은 전체가 공원인 축복받은 장소라 할 수 있습니다.
5.은총의 사순시기, 요즘에 적절하다 싶어 오래전 배밭을 보며 써놓은 하느님 중심의 파스카의 기쁨을 노래한 ‘봄햇살 붓으로’라는 시를 나눕니다. 바야흐로 시작된 봄의 축제, 파스카 축제, 은총의 사순시기입니다.
“오, 하느님 바야흐로 그림 그리기 시작하셨다
생명의 화판 대지에 부드러운 봄 햇살 붓으로
연한 초록색 물감 슬며시 칠하니 조용히 솟아나는 무수한 생명의 싹들
오, 하느님 당신의 화판 봄의 대지에 바야흐로 그림 그리기 시작하셨다”<2007.4.4.>
6.예전 10대 중학교 시절, 60년대 풍미했던 <하숙생>이란 최희준 노래를 참 좋아했으며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도 가끔 부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며 떠오른 하숙생 가사가 좋아 2절 전부를 소개합니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없이 흘러서 간다.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려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없이 흘러서 간다.”
허무감이 물씬 배어 있는 정처없는 인생입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가 부재한 허무주의의 삶은 악마의 밥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분명코 단언하건데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여정은 방향과 목적지가 분명한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향歸鄕의 여정’입니다.
오늘 복음 장면은 흡사 예수님이 당신을 죽이려는 악의 세력에 포위되어 있는 사면초가의 상황을 연상케 합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반복되는 악의 현실입니다. 암세포가 증식되어 온몸에 퍼지듯 ‘죄악의 암세포’가 사회전반에 확산되는 총체적 위기의 오늘입니다. 바로 어제 제주도에서의 <4.3 사건> 77주년을 지낸 다음, 오늘 2025년 4월4일은 대한민국 대통령의 탄핵선고가 있는 역사적인 날! 악에 대한 선의 승리를 믿고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합니다.
오늘 제1독서 지혜서는 악인들의 삶과 생각, 그리고 악인들의 의인에 대한 그릇된 생각이 적나라하게 묘사되는데 흡사 예수님 수난을 연상케 합니다. 그 일부만 나눕니다.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를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 정녕 그의 삶은 다른 이들과 다르고 그의 길은 유별나기만 하다.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두고 보자.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려보자.”
이런 악인들의 그릇된 생각을 환히 밝히며 단호히 바로잡는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이런 지혜의 선물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무지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상실했을 때 악에 대한 통제는 불가능합니다. 증식하여 퍼져나가는 죄악의 암세포를 막을 길이 없습니다. 이래서 사순시기중 기도와 회개의 수행이 참으로 절실합니다. 지혜서 다음 말씀이 인간에 대한 궁극의 유일한 답은 하느님이심을 결론짓습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바로 인간에 대한 정의입니다.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이래서 평생 필수 공부가 하느님 공부, 하느님 지혜 공부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떠나니 정신병도 많고, 괴물도, 악마도, 야수가 되어 버리고, 급기야는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폐인도 됩니다. 정말 세상 죄악에 오염되니 제대로 된 제정신의 무공해 사람들을 만나기가 참 어려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악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하느님 중심의 삶뿐입니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파스카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중 다음 핵심 구절이 예수님의 신원 고백이 그대로 답이 됩니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신원은 그대로 우리의 신원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으니, 우리는 결코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 섭리의 필연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 누구나 하느님께로 왔다가 하느님께로 가는 ‘귀향의 여정’중이라는 자각이 더욱 하느님 중심의 삶에 박차를 가하게 하며, 이보다 악에 대한 좋은 처방은 없습니다. 역시 하느님 중심의 삶을 견고히 해주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보다 더 좋은 악에 대한 처방은 없습니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 하시고, 영혼이 짓밟힌 이를 구원해 주신다.”(시편34,19).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