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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공동체 상호내주(相互內住)의 일치 “나는 참 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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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5.21.부활 제5주간 수요일
사도15,1-6 요한15,1-8
공동체 상호내주(相互內住)의 일치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
존재는 관계입니다. 공동체내 관계를 떠나서 혼자서는 살 수도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삶의 여정 역시 더불어의 여정이지 혼자의 여정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라”, “서로 섬기라” 했습니다. 혼자서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섬깁니까? 혼인식 주례시 “서로를 구원하니 서로 감사해야 한다”고 많이 강조합니다. 살아갈수록 공동체로부터 끊임없이 배우고 깨닫는 “겸손과 감사”입니다. 서로 상호보완하기에 살아갈 수 있는 부족하고 약한 공동체 성원들입니다.
그러나 공동체 생활의 어려움은 만만치 않습니다. 누구나 이구동성의 공통적 대답은 공동생활이 어렵다는, 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수도생활의 어려움도 공동생활의 어려움이요 함께 살아간다는 자체가 최고의 수도요 수행입니다. 많이들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고, “건들이지 않고 그냥 놔두고” 살아갑니다. 이건 방치나 무관심이 아니라 그윽히 바라보며 지켜보는 인내와 사랑의 눈길입니다. 결국은 내 문제요 바꿔져야 할 것은 상대방이 아니라 나입니다. 내가 계속 내적으로 넓어지고 깊어져야 합니다.
수도공동체 생활뿐 아니라 부부 가정 공동체 생활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부부들에게 “잘 살고 못 살고를 떠나 함께 살았다는 자체로 구원이요 성인이다”라고 격려하곤 합니다. “함께하는 교육”이라는 주제로 1면을 가득 채운 한겨레 일간지 내용도 공동체 삶에 좋은 참고가 됩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의 속담도 공동체 안에서의 교육이 절대적임을 보여줍니다. 김민지 소장은 강조합니다.
“아이를 잘 키우는 방법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기준은 있다. ‘아이를 내가 바라는 모습으로 바꾸려하기보다,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지혜로운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은 아이가 스스로 잘 자랄 수 있도록 돕는 것이며, 지금 우리 사회가 필요한 부모 모습이다.”
비단 아이의 교육뿐 아니라 공동체 형제들에 대한 경우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 복음적 공동체 일치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단락별로 공부하는 마음으로 나눕니다.
1.“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직업중 하느님과 동종의 직업인 농부가 가장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농부 수사님의 “농사중 80%가 하느님이 하신다”는 고백도 잊지 못합니다. 제가 가장 부러워하는 직업이 농부입니다. 우리는 절대 혼자가 아닙니다. 고립단절이 지옥입니다.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라면 우리는 다 거기에 붙어 있는 가지들이요 가지들을 전지하며 돌보고 가꾸는 분은 농부인 아버지입니다. 배밭의 전지처럼 “삶의 전지”도 아버지와 협조하면서 끊임없이 실천해야 함을 배웁니다. 주님 말씀의 은총으로 깨끗해진 우리들이요 좋은 열매를 위한 “삶의 전지”에 말씀공부와 실천이 절대적임을 깨닫습니다.
2.“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너무나 자명한 이치입니다. 스스로 혼자서의 삶이나 구원은 착각이요 환상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 머물고 주님은 우리 안에 머무는’ 주님과 상호내주의 일치안에 날로 깊이 뿌리를 내릴 때 영육의 온전한 건강이요 풍요로운 내외적 수확의 열매들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음은, 또 앞으로 살 수 있음은 주님과 보이지 않는 상호내주 일치의 은혜입니다.
주님없이는 애당초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립니다. 묵주끈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간 묵주알 같은 인생이라면 존재이유의 상실입니다. 공동체로부터 고립단절이 바로 죽음이자 지옥입니다. 날로 깊어가는 상호내주의 일치의 여정이 우리의 핵심적 관심사입니다.
3.“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주님과 사랑과 신뢰의 상호내주의 일치가 깊어질 때 우리의 소원은 그대로 주님의 뜻과 일치될 것이요 청하는 것은 그대로 이루어질수 뿐이 없습니다. 사실 눈만 열리면 온통 선물로 가득한 세상이니 청할 것은 거의 없어지고 찬미와 감사만 가득할 뿐입니다. 오늘 복음의 결론이 깊은 가르침과 깨우침이 됩니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상호내주의 일치로 많은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은 우리 삶의 궁극의 의미이자 목표이고 존재이유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제자가 되고 바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합니다. 베네딕도회 모토이기도 한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은 우리 믿는 이들 삶의 궁극 목표이기도 합니다.
오늘 사도행전 15장은 예루살렘에서의 사도회의를 다룹니다. 안티오키아 교회의 지엽적인 문제가,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문제로 분쟁과 논란이 격렬해지자 사도회의의 사도들과 원로들의 지혜로운 판단을 받고자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파견된 바오로와 바르나바입니다.
물론 사도회의의 현명한 답을 주겠지만 문제의 원인은 히브리계 신자들의 눈먼 본말전도, 주객전도의 어리석은 처사에 있고 그 답은 오늘 복음이 줍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바 공동체의 일치는 관습과 관례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상호내주의 일치” 안에 있음을 까맣게 잊음으로 인해 지엽적인 문제들이 크게 부각됨으로 단순한 공동체 삶이 참으로 복잡스럽고 혼란해진 것입니다. 주님과 상호내주의 일치를 깊게 해주는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복음적 일치의 공동체 형성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