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다해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성체성사 때 내가 만나는 예수님은 부활 전인가, 후인가?> 복음: 요한 16,20-23ㄱ 
LORENZETTI, Pietro 작, (1325) |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부활 제6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의 이별이 가까이 왔음을 아시고, 그들이 겪게 될 슬픔과 혼란을 넘어서는 희망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치 해산할 여인이 출산의 고통 중에는 근심에 싸이지만, 아이를 낳으면 그 기쁨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고통을 기억하지 않는 것처럼, 제자들 역시 지금은 근심하겠지만 부활하신 당신을 다시 만날 때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 16,21-22 참조)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요한 16,23) 이 말씀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면 더 많은 것을 묻고 대화하고 싶지 않을까요?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단순히 질문이 사라지는 것을 넘어, 의심과 불안이 해소되고 충만한 신뢰와 사랑 안에서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의 깊은 의미를 묵상하며,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의심의 단계를 지나 하느님 현존에 대한 확신으로 나아가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체성사와 성령께서 어떤 역할을 하시는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의 주인공 브루스 놀란은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행과 어려움을 하느님 탓으로 돌리며 끊임없이 불평하는 지역 방송국 기자입니다. 그는 중요한 뉴스 진행자 자리를 놓치자 길거리에서 하느님을 향해 "당신은 도대체 내 기도를 듣고 있기는 한 겁니까? 나를 제대로 보고 있기는 한 거냐고요!"라며 소리치고, 심지어 하느님을 향해 조롱과 시험의 말을 쏟아냅니다. 마치 오늘 강론의 주제처럼, 하느님의 존재와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정말 당신이 전능하다면 내 삶을 이렇게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하느님을 시험하는 우리들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로 하느님께서 브루스 앞에 나타나십니다. 하느님은 브루스의 불평에 지쳤다며, 그에게 당신의 모든 권능을 일주일간 맡겨볼 테니 한번 세상을 다스려보라고 제안합니다. 신이 난 브루스는 처음에는 이 엄청난 능력을 자신을 괴롭혔던 동료에게 복수하고, 직장에서 성공하며, 애인의 사랑을 얻는 등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는 데 사용합니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가 강력한 장난감을 얻은 것처럼 신기해하며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려 합니다. 그러나 곧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자, 그는 모든 기도에 "예스"라고 답해버려 세상은 순식간에 대혼란에 빠집니다. 복권 당첨자가 수만 명씩 나오고, 소행성이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등 걷잡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가 아무리 전능한 힘을 사용해도 진정한 사랑, 특히 연인 그레이스의 마음을 강제로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의 이기적인 행동과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그레이스는 그를 떠나버립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오히려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사랑하는 사람마저 잃게 된 브루스는 절망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어리석음과 교만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는 길거리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쓰러진 채, 다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진정한 기적은 세상을 뒤흔드는 거창한 능력이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작은 친절을 베풀며,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는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는 더 이상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고 묻거나 하느님을 시험하는 대신,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작은 일부터 사랑을 실천하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권능을 내려놓고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온 브루스는 비로소 내면의 평화를 찾고, 떠나갔던 그레이스와도 진정한 사랑으로 다시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을 의심하고 있을 때는 자신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에 관해 묻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 문득 지금의 어머니가 친어머니가 아니실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강하게 들었던 때, 저는 직접 “어머니, 정말 제 어머니 맞으세요?”라고 묻지는 못했지만, 마음속 질문은 늘 그것 하나였습니다. 어머니께서 제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실 때는 ‘그래, 역시 우리 엄마가 맞아’ 하며 안도하다가도, 제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역시 친어머니가 아니어서 그런 거야!’라는 엉뚱한 결론을 내리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당신이 아침참으로 드시려고 아껴두셨던 따뜻한 단팥빵과 흰 우유를 제게 건네주셨을 때, 저는 그 사랑 앞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는 다른 어떤 증거나 설명도 필요 없었습니다. 그저 기쁨에 차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는 아들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는 하느님의 존재와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때로는 그분을 시험하려 들기도 합니다. "정말 저를 사랑하신다면, 이번 일은 꼭 이루어지십시오!" 와 같은 조건부 기도를 바치기도 합니다. 이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준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이집트를 탈출하는 엄청난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광야의 여정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을 시험했습니다. 물이 없을 때, 먹을 것이 없을 때마다 모세와 하느님께 불평하며 "주님께서 과연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 (탈출 17,7) 하고 시험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만나를 내려주시고(탈출 16장 참조), 바위에서 물을 내시어(탈출 17,1-7; 민수 20,2-13 참조) 당신의 현존과 사랑을 끊임없이 보여주셨습니다. 심지어 백성이 불뱀에 물려 죽어갈 때, 장대 위에 구리 뱀을 만들어 매달게 하시고 그것을 보는 이마다 살아나게 하시는 놀라운 치유의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민수 21,4-9 참조) 이보다 더 확실한 하느님 사랑의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 가운데는 여전히 믿지 못하고 하느님을 시험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의심 없이 믿고, 당신과 온전히 하나 되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으며,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사랑의 증표로 우리에게 성체성사를 남겨주셨습니다. 성체성사는 단순한 기념 예식이 아니라,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어 그분과 하나 되고, 그분의 생명에 동참하는 거룩한 성사입니다. (1코린 10,16-17 참조) 우리가 성체를 영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제가 신학교 시절, 성체를 영하고 조용히 기도하는 중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래, 너는 나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었느냐? 나는 너에게 내 전부를 주었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저는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의심하거나 여쭐 수가 없었습니다. 제 삶 전체를 뒤흔드는 엄청난 사랑의 확신 앞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 이 크신 은혜에 제가 어찌 보답해야 합니까?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라는 응답의 질문뿐이었습니다. 주님의 현존과 사랑이 너무나 명확했기에, 그분을 증명해달라고 다른 어떤 것을 청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처럼 흔들리거나 의심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분과 깊은 인격적 관계 안으로 들어갑니다. 마치 제가 어머니의 단팥빵에서 그분의 사랑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듯이,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전부를 내어주시는 사랑을 체험할 때, 그리고 성령께서 그 체험을 우리 존재 깊이 새겨주실 때, 우리는 더 이상 "당신은 누구십니까?", "정말 저를 사랑하십니까?"와 같은 시험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게 됩니다. 그분의 사랑 자체가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되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그분의 상처를 만져보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던 토마스가, 예수님을 뵙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며 모든 의심을 떨쳐버립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그분과의 깊은 일치입니다. 이때 "이 은혜에 어찌 보답할까?" 하는 사랑의 응답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