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4일 (금)
(녹)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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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교회 공동체 일치의 중심 “그리스도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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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경 [forgod] 쪽지 캡슐

2025-07-03 ㅣ No.183194

2025.7.3.목요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에페2,19-22 요한20,24-29

 

 

교회 공동체 일치의 중심 “그리스도 예수님”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민족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모든 겨레들아."(시편117,1)

 

오늘 7월3일은 성 토마스 사도 축일입니다. 역시 우리 삶의 좌표가 되는 성 토마스입니다. 가톨릭교회를 명실공히 명품종교로 만드는 것은 이런 사도들을 비롯한 무수한 성인성녀들입니다. 우리 또한 명품신자 성인으로 불림받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자 자랑이요 의무요, 우리에게 성인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이래서 저는 감히 우리 삶의 여정은 늙어가는 ‘노화의 여정’이 날로 거룩해져가는 ‘성화의 여정’이라 부르곤 합니다. 

 

과연 여러분은 주님을 닮아 날로 거룩해지는 성화의 여정을 살고 계십니까? 주님 앞에 가면 주님은 당신을 닮았는지 우리 마음의 얼굴을 검사하실 것입니다.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저야 한다 하는데 하루 이틀에 완성되는 얼굴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인생 여정을 통해 이뤄지는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토마스는 주님께 불림받은 열두 사도중 한분입니다. 열두 사도의 면면히 참 다양합니다. 쌍둥이라 불리는 성 토마스 역시 독특한 개성의 소유자입니다. 굳은 신앙과 용기, 솔직한 성격에,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11,16) 외쳤던 분입니다. 최후만찬에서는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14,5) 물음으로 예수님으로부터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 천하명품진리 말씀을 이끌어낸 사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제자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부활을 인정하지 않다가 발현하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자 의심을 거두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20,28)이란 고백으로 최초로 예수님의 신성을 고백한 토마스 사도입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답인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말씀은 우리 믿음에 큰 격려가 됩니다. 이런 진리 말씀들, 성 토마스가 아녔더라면 듣지 못할뻔 했으니 성 토마스 사도의 별난 성격에 감사해야겠습니다.

 

위경인 <토마스 행전>의 전승에 따르면 성 토마스 사도는 52년 남부 인도를 방문해 복음을 전하고 7개 성당을 세웠고 72년 밀라포르(현재 마두라스)에서 순교합니다. 6세기부터 7월3일에 사도의 유해를 에데사로 옮긴 것을 기념하는 축제를 지냈고 오늘 축일의 유래가 됩니다. 인도 케랄라주의 밀라바르 전례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토마스 사도에 의해 복음화되었다는 이유로 자신들을 토마스 사도의 그리스도인이라 부릅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1972년 토마스 사도의 순교 1900주년을 맞아 사도를 인도교회 수호자로 선포합니다. 그 아득한 옛날, 그 먼곳 인도에까지 복음을 선포하다 순교하셨고 인도의 수호자가 되었으니 사도의 선교열정과 주님의 구원섭리의 역사가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여전히 살아계셔서 시공을 초월하여 여전히 오늘날도 교회의 선교활동에 함께 하십니다. 

 

교회 공동체의 일치의 중심은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한가지 묻고 싶습니다. 공동생활이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공동체를 떠나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공동체적 존재인 사람들이요, 공동생활에는 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부가정공동체는 함께 살았다는 자체로 구원이요 성인이라 말합니다. 

 

천국에 혼자 못갑니다. 개인입장이 아니라 단체입장이기 때문입니다. 한몸의 부부라면 둘의 점수 합해 나눠 평균 60점 넘어야 둘다 구원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여기 요셉수도가정공동체 식구는 13명의 대가족인데 다 다릅니다.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다른 이들이 다양성의 일치를 이루며 살게 하는 것은 바로 바라보는 중심 방향이 같기 때문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오늘 복음에서 제자공동체에 발현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평화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평화요 우리의 희망입니다. 모두가 공동체 일치의 중심인 평화와 희망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께 자기를 맞춰가기에 비로소 다양성의 일치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 일치의 중심에는 언제나 파스카의 예수님이 계십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에페소서가 우리의 신원과 교회의 특징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가족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의 한가족으로 만듭니다.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우리가 교회로 불림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않았다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 상상이 안될 것입니다. 그러니 새삼 부르심의 은총이 얼마나 놀랍고 고마운지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교회공동체의 설명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건물이 교회가 아니라 이런 공동체가 진짜 살아 있는 성전인 교회입니다.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는 공동체요,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는 살아 있는, 끊임없이 성장중인 현재진행형의 우리 교회공동체 성전입니다. 제 매일 강론은 물론 우리가 하는 공부 역시 궁극엔 교회 공동체를 부요하게 하기 위한 공부임을 깨닫습니다. 옛 현자 <다산>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배워서 쓸 수 없는 공부는 의미가 없다. 다른 사람을 키워주는 공부가 진정한 공부다.”

“군자의 학문은 수신이 반이요, 나머지 반은 백성을 섬기는 것이다.”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다’를 ‘섬기는 것이다’로 바꿔썼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찾아, 그리스도 예수님을 찾아 밖에 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당신의 거처이자 성전인 우리 교회공동체, 수도공동체, 가정공동체 안에 늘 현존하시는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공동기도와 공동식사는 필수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은총이 교회 공동체의 성장과 일치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시편117,2).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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