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4일 (금)
(녹)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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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님_<믿음은 논리가 아니라 ‘깨달음’이고, ‘신앙인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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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5-07-03 ㅣ No.18320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 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4-29)”

1)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다는 신앙고백을

최초로 한 신앙인으로서 우리 교회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도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요한복음의 머리글에서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라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로 오신

하느님의 말씀이신 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증언합니다(콜로 1,15).

이 말은,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2) 복음서 저자가 토마스 사도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을 기록하기 전에 먼저

그가 다른 사도들의 증언을 믿지 못했다는 것부터 기록한

것은, 그만큼 예수님의 부활은 믿기 힘든 일, 또 그만큼

놀랍고 위대한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사도들의 증언을 믿지 못했던 토마스 사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곧바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을 하게 된 것은,

“믿음은 곧 깨달음”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깨달음은 인간의 이성적인 논리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처럼 ‘이미 이루어진 일’은

그 일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서 믿게 됩니다.

종말, 재림, 심판처럼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은

‘주님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해서 믿게 됩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믿으니까 그 일들이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이미 이루어진 일들과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을 모두 믿는 사람입니다.

<천지창조처럼 이미 이루어졌지만 직접 목격한 증인이 없는

일들도 ‘주님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해서 믿게 됩니다.

하느님을 전지전능하신 조물주라고 믿으니까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물리학이나 천문학 같은 인간의 과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신앙의 진리’는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라는 말 외에는

다른 말을 더 할 수도 없고, 더 할 필요도 없는 진리입니다.>

4) 토마스 사도가 처음에 믿지 못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

자체가 아니라, 다른 사도들이 만났다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바로 그분’이라는 것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직접 확인해야겠다는

말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그 예수님과 부활하신

예수님이 같은 분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믿었지만,

그가 생각한 부활은 좀 달랐던 것 같습니다.>

다른 사도들의 증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도 직접 보았는데(요한 20,20),

그 일을 토마스 사도에게 전할 때에는 ‘확신’이 부족한

모습을 보였던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들의 증언은 적어도 그때까지는 다른 사람을 믿게 만들지

못하는, 즉 확신이 부족했던 증언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는, 즉 성령강림 후에는 다른 사람들을

믿게 만드는, ‘확신으로 가득 찬’ 증언을 하게 됩니다.>

5)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라는 말씀은, 토마스 사도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미 이루어진 일’은 우리가 직접 보지 않았어도

사도들의 증언을 믿기 때문에 믿고 있습니다.

종말, 재림, 심판과 같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은

‘모든 사람’이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 일들에 대한 믿음은 ‘희망’에 직결됩니다.

신앙인은 재림을 희망하면서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믿으니까 희망하고, 희망하니까 믿고 있고, 믿음과 희망이

있기 때문에 인내합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믿음이 없는 사람은 희망하지 않고, 희망하지 않는 사람은

믿으려는 마음 자체가 없고, 인내하지도 않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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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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