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9일 (수)
(녹)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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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소원성취를 원하면 버튼을 찾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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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봉7 [gloria7] 쪽지 캡슐

07:46 ㅣ No.183331

 

 

  

 

 

2025년 다해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소원성취를 원하면 버튼을 찾아야!>

 

 

 

복음: 마태오 9,18-26

 

 

 


LORENZETTI, Pietro 작, (1325)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은 우리를 두 개의 다급한 장면으로 초대합니다. 하나는 회당장 야이로의 절박한 외침이고, 다른 하나는 12년 동안 하혈하며 고통받던 여인의 소리 없는 절규입니다. 죽어가는 딸을 살리려는 아버지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지만 절망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한 여인. 이 두 사람의 간절함이 예수님의 발길을 붙잡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깊이 묵상하다 보면 몇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전능하신 예수님께서는 어차피 살리실 아이라면, 왜 그 자리에서 바로 “네 딸이 나았다.” 하고 선포하지 않으시고, 굳이 회당장의 집까지 그 먼 길을 함께 가셨을까요? 또한 하혈하던 여인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구원을 받겠지.”(마르 5,28)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주술적인 믿음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그 여인의 믿음의 공식을 그대로 인정하고 치유해 주셨을까요?

 

 

    한 노병사에게서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는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진 ‘원숭이 손’을 얻게 된 가족. 병사는 이 물건이 소원을 들어주기는 하지만 그 결과는 언제나 운명을 거스르는 끔찍한 대가를 치르게 한다며 불 속에 던져버리려 하지만, 가족은 호기심과 욕망에 사로잡혀 그것을 빼앗듯 가져옵니다.

 

 

    그날 밤, 가족은 반신반의하며 첫 번째 소원을 빕니다. “집 대출금을 갚을 수 있도록 200파운드를 달라.” 바로 그 순간, 원숭이 손이 손안에서 꿈틀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음 날, 아들이 다니던 공장에서 사람이 찾아옵니다. 아들이 공장 기계에 끼어 끔찍하게 사망했고, 회사는 위로금 명목으로 정확히 200파운드를 건넵니다. 첫 번째 소원은 아들의 목숨값과 맞바꾸는,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 이성을 잃은 아내는 남편을 다그쳐 두 번째 소원을 빌게 합니다. “내 아들을 다시 살려내라!” 남편은 훼손된 아들의 시신이 돌아올 것을 두려워하며 말렸지만, 아내의 절규에 못 이겨 결국 소원을 빌고 맙니다. 시간이 흐른 뒤, 한밤중에 누군가 현관문을 둔중하게 두드리기 시작합니다. 아들은 돌아온 것입니다. 아내와 남편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립니다. 아내는 아들을 볼 수 있다는 기쁨에 문을 열어주려 하고, 남편은 문밖에 서 있는 것이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라 끔찍한 훼손된 시신임을 직감하고 공포에 떱니다. 

 

 

    아내가 빗장을 풀려는 찰나, 남편은 미친 듯이 원숭이 손을 찾아 마지막 세 번째 소원을 외칩니다. “그것이 사라지게 해달라!” 문 두드리는 소리가 멎고, 아내가 문을 열었을 때 밖에는 텅 빈 어둠과 바람만이 불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소원은 모두 이루어졌지만, 그 결과는 아들을 잃고, 그 아들이 끔찍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가 영원히 사라지는, 파멸뿐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명확히 보여줍니다. 봉헌의 과정을 건너뛴 인간의 날것 그대로의 욕망이 성취될 때, 그 결과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바로 들어주시지 않고 믿음의 행위를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를 이처럼 끔찍한 파멸에서 지키시려는 사랑의 배려입니다. 

 

 

    성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생명나무는 은총입니다. 이 은총을 위해 주님은 선악과를 봉헌하는 의지적 행위를 요구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봉헌 없이 탐욕으로 메추라기기를 먹다가 멸망하고 맙니다(민수 11,33 참조).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왜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까지 ‘굳이’ 가셨는지를 말입니다. 그것은 고통 속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한 아버지의 ‘의지’라는 봉헌에 동행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왜 하혈하던 여인의 믿음을 인정해 주셨는지를 말입니다. 군중 속에 숨어서라도 그분의 옷자락을 만지려는 그 겸손한 ‘행위’를 통해, 그녀가 자신의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온전히 봉헌했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불 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 버튼은 장대 위의 구리 뱀을 쳐다보는 행위(민수 21,9)였습니다. 아람의 군대 장수 나아만의 믿음 버튼은 자신의 지위와 상식을 봉헌하고, 요르단 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는 순명의 행위(2열왕 5,14)였습니다. 태생 소경의 믿음 버튼은 자신의 체면을 봉헌하고, 실로암 못까지 걸어가서 씻는 순종의 행위(요한 9,7)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인간의 전략을 봉헌하고, 병사들의 방패에 십자가를 그리게 하는 행위로 믿음을 증명했습니다. 

이 모든 행위의 공통점은 ‘봉헌’입니다. 나의 생각, 나의 자존심, 나의 시간을 하느님께 바치는 겸손의 행위이자, 그분만이 왕이심을 인정하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혹시 지금 하느님께 간절히 청하는 소원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나만의 ‘믿음 버튼’을 만들어 보시길 권합니다. 나를 왕이 되지 않게 하고 그분의 자녀로 머물게 만드는 나만의 선악과, 나만의 봉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54일 기도처럼 오랜 시간 자신을 봉헌하는 인내일 수 있습니다. 매일 아침 가장 먼저 무릎을 꿇는 겸손일 수도 있고, 가장 좋아하는 무언가를 끊어내는 작은 단식일 수도 있으며, 가장 용서하기 힘든 그 사람을 위해 나의 분노를 봉헌하며 자비의 기도를 바치는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그분께 봉헌하며 ‘믿음 버튼’을 누를 때, 우리의 기도는 “제 뜻대로 해주소서!”라는 명령에서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는 사랑의 고백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옷자락을 스치는 믿음만으로도 영원한 생명나무의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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