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9일 (수)
(녹)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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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하늘 나라가 왔다가 아니라 '다가왔다'고 선포하라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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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봉7 [gloria7] 쪽지 캡슐

07:55 ㅣ No.183334

 

 

 

 

 

 

 

2025년 다해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하늘 나라가 왔다가 아니라 '다가왔다'고 선포하라는 의미>

 

 

 

복음: 마태오 10,1-7

 






하느님의 아들이며 말씀이신 그리스도

(1540-1550), 모스크바 크레믈린 Cathedral of the Sleeper

 

 

 

  

 

    찬미 예수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7)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하늘 나라가 여기에 있다’가 아니라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라고 하셨을까요? 이는 하늘 나라가 단순히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이미 우리 현실의 문턱을 넘어섰고, 그 도래하는 힘 앞에서 모든 이가 자신의 입장을 선택해야만 하는 ‘결단의 순간’이 왔음을 알리는 가장 긴급한 외침이기 때문입니다.

 

 

    이 선포는 마치 C.S. 루이스의 소설 《나니아 연대기》에서, 마녀의 저주로 영원한 겨울 속에 갇혔던 나니아에 “위대한 왕 아슬란이 오신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과 같습니다. 왕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겨울은 여전히 매섭습니다. 그러나 왕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소식만으로 얼었던 강이 녹고, 눈 속에서 꽃이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 미세한 변화 앞에서 나니아의 모든 존재는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다가오는 봄의 소식을 기뻐하며 왕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이들과, 오히려 녹아내리는 눈과 얼음을 보며 불안해하고 어떻게든 겨울의 질서에 집착하려는 이들로 갈라집니다. 한쪽은 생명을, 다른 한쪽은 익숙한 죽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은 이 갈림길의 본질을 이렇게 꿰뚫어 봅니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요한 3,19)

 

 

    이 선택의 드라마는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의 종살이에 신음하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 위해 모세를 보내십니다. 그리고 10가지 재앙을 통해 이집트의 신들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주십니다. 나일강의 신, 태양신 라, 생명의 주관자 파라오의 권능이 하느님의 힘 앞에서 차례로 무너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억압하던 파라오의 힘이 약해지는 것을 보며 진정으로 기뻐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파라오의 권세가 무너지는 것을 보며 자유의 희망에 가슴 벅차했던 이들만이, 눈앞의 홍해를 건널 용기를 내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서도 이집트의 고기 가마를 그리워하며 불평하던 이들은, 결국 자유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노예 생활의 고통 속에서도, 그 고통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더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한 사람의 내면에서도 이 영적 전쟁은 동일하게 벌어집니다.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C.S. 루이스는 ‘신은 없다’는 지성의 성채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그 차가운 어둠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친구 J.R.R. 톨킨은 끈질긴 우정 속에서 참된 신화이신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루이스는 훗날 자신의 회심을, 오랫동안 지켜온 자기 생각의 성벽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 무너짐을 패배가 아니라, 오히려 감옥에서 풀려나는 ‘기쁨’과 ‘안도’로 느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어둠의 차가운 안정감보다, 자신을 무너뜨리러 오신 빛의 따뜻함을 더 갈망했던 사람입니다. 바로 이 갈망이 있는 사람만이 하늘 나라를 자신의 것으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은 우리 모두를 이 선택 앞에 세웁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도 믿지 않는 이유는 우리 논리가 약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어둠을 선택했는데, 자꾸 빛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선택을 강요할 필요는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그 미세한 행복을 누리며 빛을 선택하지 않으면 생명은 없다고. 이것에 우리가 선포해야 할 하느님 나라의 다가오심입니다. 신명기는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보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신명 30,19)

 

 

    슬프게도, 오늘날 우리의 교육은 이 생명을 선택하는 법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돈과 성공이라는 우상의 힘이 약해지는 것을 불안해하고, 자존심의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도록 우리를 교육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참된 행복은 소유의 겨울이 아니라 자유의 봄에 있습니다. 세.육.마.를 행복이 아니라 고통이요 종살이임을 알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행복을 선택하도록 가르치는 환경에서는 주님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훨씬 많아질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맛만 느끼게 하는 존재들이고 그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는 사람들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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