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3일 (수)
(백)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나는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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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2주일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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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corenelia] 쪽지 캡슐

2025-08-31 ㅣ No.184543

[연중 제22주일 다해] 루카 14,1.7-14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천동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모든 천체가 지구 주위를 돈다는 천문학 이론입니다. 이 이론은 논리와 철학이 발달했던 고대 그리스 시대에 정립되었고, 세상과 삶을 ‘인간 중심’으로 이해하는 르네상스 시대를 거쳐오면서 강화되어, 중세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정설’로 인정받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16세기에 이르러 코페르니쿠스가 새로운 이론인 ‘지동설’을 주장합니다.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며, 지구를 비롯한 행성들이 그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이 이론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중 이성을 지닌 존재는 인간 뿐이라고 여겼던 당시 기독교 교리에 위배되는 것이었기에 강한 반대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런데 이처럼 천동설과 지동설이 서로 대립하는 모습은 주님을 따르는 우리 신앙생활의 중요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내 삶이 누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가?’라고 자문하게 되는 겁니다. 천동설을 따르는 이들은 스스로가 자기 삶을 이끌어가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즉, 살면서 마주하는 모든 선택과 결정을 자기 뜻과 주관에 따라 하려고 드는 것이지요. 반면 지동설을 따르는 이들은 주님께서 당신 뜻에 따라 자기 삶을 이끌어가시도록 그분께 순명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느님이 ‘나’에 대해 가장 잘 아시며 가장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신다고 믿기에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며 따르는 것이지요. 그런 이들에게서 드러나는 덕목이 바로 ‘겸손’이며 오늘 복음의 핵심주제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을 이끄는 지도자 중 한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아 식사를 하십니다. 그런데 그 집에 초대를 받은 바리사이들은 저마다, 어떻게 하면 자기가 더 ‘윗자리’에 앉을 수 있을지 기회만 엿보고 있었지요. 당시 유다사회에서 식사 예절은 참으로 엄격하고 복잡했습니다. 식탁의 어느 자리에, 누구부터 앉을지는 잔치에 참여한 손님들의 지위나 신분에 따라 정해졌지요. 그래서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그 자리에 누구누구가 참석했는지를 잘 살펴보고서 자신이 앉을 위치를 스스로 결정했습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자기 객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사회에서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닌다는 이들은 자신을 실제보다 더 대단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기에, 많은 이들이 자기가 더 높은 자리에 앉고자 기싸움을 벌인 겁니다. 윗자리에 앉을수록 사람들 눈에 더 잘 보이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이들이 자신에게 와서 인사를 하고 가기에 그만큼 더 대단해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써 갖는 품위와 존엄성이 스스로가 애쓰고 집착한다고 높아지는 게 아님을, 하느님께서 당신 뜻과 기준에 따라 결정하시면 우리는 그분의 결정에 따라야 함을 분명히 알려주십니다.

 

그러면서 첫번째로 강조하시는 말씀이 ‘끝자리에 가서 앉으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주인공’이 되고 싶어합니다. 세상과 삶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자신을 ‘과대(過大)포장’하려고 애를 씁니다. 비싼 브랜드가 박힌 옷으로, 명문대라는 이름값이 부각된 학력으로, 남들보다 높은 지위로, 남들보다 많이 가진 재물로 자신을 포장함으로써, 자신이 그만큼 대단하고 고귀한 존재라는 점을 과시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세속의 기준들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일 뿐입니다. 나보다 비싼 옷을 입고, 더 높은 지위에 있으며, 더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 앞에 서면 나는 한 없이 작아지고 초라해지는 겁니다. 또한 내가 집착하는 세속적인 조건들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정한 기준일 뿐입니다. 그러나 내가 인간으로써 갖는 품위와 존엄성은 오직 나를 창조하시어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으로부터 나오지요. 그러니 우리는 ‘나’가 아니라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한 첫걸음이 바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 ‘끝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며 비굴해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분 뜻에 비추어 자신을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에 비추어 스스로가 얼마나 부족하고 약한 존재인지를 깨달은 이는 교만하게 자신을 높이지 않습니다.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를 체험한 이는 한치 앞도 모르는 자기 머리에서 나온 뜻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며 그분 뜻에 철저히 따를 뿐이지요.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런 겸손한 꼴찌들을 당신 나라에서 ‘첫째’로 들어높여 주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는 말씀에는 그런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보통 ‘자리’에 집착하는 이들은 자존감이 낮을 때가 많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앉지 못하면, 다른 이들과의 경쟁에서 밀려나 기대했던 것보다 낮은 자리에 앉게 되면, 인생에서 실패했다는 생각에 좌절하고 심한 경우 자존감이 완전히 무너지게 되는 겁니다. ‘나’라는 존재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튼튼하게 정립되지 못했기에, 나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직접 바라보지 못하고 다른 이들과의 상대적 비교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바라보기에, 자신이 앉아있는 자리가 곧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스스로가 하느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는 특별하고 귀한 존재임을 자각하는 이들은 자리의 높고 낮음에 별로 신경쓰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일등과 꼴등의 구분이 의미없음을, 그 나라에서 누리는 행복의 크기는 자신이 하느님과 얼마나 깊은 사랑의 친교를 맺는가에 따라 결정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끝자리’에 가서 앉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기쁨을 곧 자신의 기쁨으로 여기는 그 마음이 하느님께서 누리시는 기쁨과 행복을 그분과 함께 누리게 만들어 줍니다.

 

예수님께서 두번째로 강조하시는 말씀은 보답을 바라지 말고 순수한 선의로 잔치를, 즉 자비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어떤 이들과 어울리는가’는 ‘내가 어느 자리에 앉아있는가’만큼 중요한 이슈이지요. 잔치에 참여하는 손님들의 수준이 곧 잔치를 베푼 이의 수준이라 여겨지고,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이 와서 잔치를 빛내주는가 하는 것이 잔치를 베푼 주인의 명성과도 직결되니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에서 소위 잘나가는 이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명성과 인기에 기대어 자기 품위와 존엄성을 높여보려는 시도가 무의미함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거짓 품위는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 무너져내릴 ‘모래성’과 같기 때문입니다. 내가 인간으로써 지니는 품위와 존엄성은 누구와 어울리느냐가 아니라, 어떤 덕행을 실천하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최고의 덕행은 그분께서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시는 작고 약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그들은 나에게 보답을 해주지 못하겠지만, 하느님께서 직접 그들을 보증해주시며 세상 종말의 순간 나에게 ‘하느님 나라’라는 큰 상급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강론 말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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