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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십자가 현양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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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십자가 현양축일] 요한 3,13-17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찰스 코우먼”(Charles Kouman)이라는 여성 곤충학자가 나비의 생태를 연구하던 중, 나비가 고치 사이의 좁은 틈을 뚫고 밖으로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보게되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가련하고 안타까워 그녀는 가위로 고치의 벌어진 틈을 잘라서 더 벌려 주었지요. 그러자 나비는 쉽게 고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그녀는 나비에게 도움을 준 것 같아서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그런데 고치를 빠져나온 나비의 상태가 좀 이상했습니다.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지 비틀거렸고 날개를 전혀 움직이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게 한 번 날아보지도 못한 채 버둥거리며 땅바닥을 기어다니던 나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말았습니다. 나비처럼 날아다니는 곤충들은 원래 세상에 나오기 전 오랜 시간 동안 힘을 쓰면서 날개에 있는 혈관들에 충분한 양의 혈액을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날개가 튼튼해지고 힘이 생겨서 평생을 날아다닐 준비가 되는 겁니다. 그런 점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 단련되고 강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힘으로 세상의 거센 풍파를 뚫고 하늘나라까지 날아가게 되지요. 그것이 ‘십자가’가 우리 삶에서 갖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광야를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점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약속된 땅 가나안에 들어가 잘 살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 백성’답게 변화되어야 함을, 거칠고 메마른 땅 광야에서 보내는 시간이 그렇게 변화되는 과정임을 알지 못했던 겁니다. 그렇기에 이집트에서 노예생활하는 동안 누렸던 상대적이고 물질적인 풍요를 그리워하며 자꾸만 하느님께 불평 불만을 늘어 놓았습니다. 척박한 땅 광야에서 자신들을 먹이시고 살리시는 하느님 사랑에 감사할 줄은 모르고, 툭하면 ‘왜 자기들을 죽게 만드느냐’며 볼멘 소리를 했습니다. 이에 하느님은 그들에게 불뱀을 보내시어 그들이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보살핌 없이는 한순간에 죽음이라는 나락에 빠질 수 밖에 없는 비천하고 약한 자기 모습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그제서야 제 잘못을 깨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 ‘불뱀’을 치워주시기를 청하자, 구리로 뱀을 만들어 높은 기둥 위에 달아놓으라고, 뱀에 물린 자들이 믿음으로 그 뱀을 바라보며 당신께 의탁하면 살게 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실행한 이들은 생명을 구하게 되지요. 하느님께서 그들이 청한대로 불뱀을 없애주시지 않은 것은, 고통과 시련이 당신께서 베푸신 은총을 돌아보고 감사의 마음을 회복하는데에, 더 나아가 당신께 대한 믿음을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드는데에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시련이라는 뱀에 물려 의식이 흐려지는 순간, 당장의 세속적인 도움을 찾지 않고 하느님께 매달리며 그분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는 굳건한 믿음이 필요하지요. 그 믿음을 간직하기란 결코 녹록지 않지만,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께서 모세의 구리뱀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하십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구리뱀을 바라봄으로써 목숨을 건진 것처럼, 우리가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 받으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면 우리를 위해 순명하시고 희생하신 그분 사랑에 힘 입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높이 들어 올려지신다’는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분께서 당신을 배척하고 핍박하는 반대자들에 의해 벌거벗긴 채 십자가에 못 박혀 수치와 모욕을 당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 모습이 ‘고통의 신비’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그분께서 주님이시라고 믿는 걸 주저하게 만드는 ‘걸림돌’이 되지요. 그러나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고,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십자가 죽음까지 기꺼이 받아들이신 그 완전한 순명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당신 오른쪽 자리로 들어높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두번째 ‘들어높임’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드러나고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으로 사형도구에 불과했던 십자가가 거룩해지고, 이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의지가 분명하게 드러난 사건을 우리는 ‘성 십자가 현양’이라고 부르며 기념하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은 아직도 제각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작은 십자가만 주어져도 자신이 세상의 온갖 고통을 다 짊어진 것처럼 난리를 치며 불평 불만을 늘어 놓습니다. 그런가하면 또 다른 사람은 옆에서 보기에도 감당하기 버거울 듯한 크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도 밝은 미소와 감사의 기도를 잊지 않지요. 그런 극단적인 차이를 만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가 지고가는 십자가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내가 느끼는 의미와 가치에 따라 십자가를 지는 내 마음자세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괴롭히시려고 억지로 지우신 ‘족쇄’가 아닙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로 건너가게 만드는 ‘구원의 다리’이자,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거센 풍랑에 휩쓸려 가지 않도록 단단히 붙들어주는 ‘누름돌’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 겁니다. 주님을 굳게 믿으며 그 말씀대로 따른 이들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며,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나의 십자가를 끌어안고 주님의 뒤를 따라 한 발 한 발 걸어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하나뿐인 아들마저 기꺼이 내어주실 정도로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우리가 꽃길만 걸어야 한다는, 고통과 시련이 우리 삶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혜로운 부모는 사랑하는 자녀를 ‘온실 속 화초’처럼 키우지 않지요. 고통과 시련을 담대하게 마주하여 이겨내라고,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 안에서 그럴 힘을 얻으라고 가르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훈육하시는 방식도 비슷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고난으로부터 구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구해주시고, 고통으로부터 보호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보호해주십니다. 십자가로부터 구원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하십니다. 그것이 ‘성 십자가 현양축일’을 지내는 우리가 마음 깊이 새겨야 할 구원의 진리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강론 말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