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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7일 수원 교구청 묵상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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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주님의 날
신명기에 의하면, 안식일은 주님의 날처럼 이집트 종살이로부터의 해방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안식일은 본디 하느님 백성을 위한 자유의 표지로 설정된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안식일은 다른 날보다 더 많은 계명과 금령을 준수하도록 규정된 날로 변해버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의 실질적인 의미를 되돌려 놓고자 하십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품위를 유지하고 자유를 누리며, 이로써 주님께 영광을 드리는 날로 복원하고자 하십니다. 해방의 날! 오늘 예수님은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린” 여인 하나를 통하여 안식일이 해방의 날임을 선포하십니다. 이 여인은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던” 여인입니다. 사탄은 이 여인이 하늘을 향하여, 다시 말해서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향하여 눈을 들어 청을 올리지 못하게 했을 것이며, 병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어떤 인간적 방법과 노력도 효험이 없었던 터라 이미 오래전에 치유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도록 이끌었을 것입니다. 치유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감지하신 예수님은 여인을 부르시고 말씀으로 사탄을 쫓아내시며 손을 얹어 치유의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안식일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고자 하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나며, 여인은 이제 묶여 있던 상태에서 해방됩니다. 회당장은 예수님이 행하신 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으나, 안식일의 왜곡된 의미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분개하여 이의를 제기합니다. 예수님의 권위에 압도되어 직접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군중을 향하여 이의를 제기하나,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직접 응답하십니다. 안식일이라 하더라도 집짐승에게는 마실 물을 주거든, 하물며 하느님의 자녀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씀입니다. 이 여인은 하느님이 그 옛날 원대한 약속을 내리신 아브라함의 딸, 그의 후손입니다. 이 여인은 해방에 대한 희망 없이 사탄에 의해 오랫동안 묶여 있었기에, 당신의 구원 능력과 신실성을 드러내기에는 오히려 주님의 날인 안식일이 가장 적합하다는 말씀입니다. 이 여인을 병마의 사슬에서 풀어주고 신앙의 물을 주기에 안식일보다 더 좋은 날이 어디 있겠는가 하는 역설적 가르침으로 다가옵니다. 감사의 날! 안식일은 또한 하느님을 흠숭하는 날, 창조주의 능력에 순응하는 날, 그분의 업적 앞에 찬미와 감탄을 높이는 날입니다. 그러기에 치유로 해방된 이 여인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군중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는” 반응을 보입니다. 찬양과 기쁨은 하느님이 내리시는 은총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며 결과입니다. 이처럼 찬양하며 감사드리고, 기뻐하며 감사의 마음을 높이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이며, 위대한 신앙행위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오랜 시간 병마에 시달리던 여인을 치유하시며 해방을 선사하고, 그 여인과 이 자리에 함께한 군중의 마음속에 감사의 마음을 불러일으키시며, 안식일을 제 자리에 돌려놓으십니다. 인간의 아집과 편협으로 빚어진 속박의 날을 해방의 날로 돌려놓으십니다.
오늘 하루,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나의 말과 행동이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지향하도록 정성껏 살피는, 그리하여 이웃의 생명에도 큰 관심을 쏟는, 멋진 신앙인의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안식일의 치유로 인한 논쟁
오늘 복음은 18년 동안 굽어 있던 여인을 치유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전한다. 주님께서 하신 이 치유는 단순한 육체의 회복을 넘어, 인간을 속박에서 해방시키시는 하느님의 구원 활동을 보여 준다. 그러나 회당장은 안식일 규정만 붙잡고 예수님을 비난한다. 이 장면은 신앙의 본질과 껍데기를 구분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깊은 성찰을 요청한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드러내신다. 짐승도 안식일에 먹을 것을 주면서, 아브라함의 딸을 해방시키는 것이 왜 잘못이냐고 반문하신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안식일의 참된 의미이다. 안식일은 억압이 아니라 생명과 자비, 자유와 회복의 날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12절) 하시고, 손을 얹으셨다. 곧 여인은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었다. 여인의 굽은 모습은 단지 육체의 질병이 아니라, 세상에 묶여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는 영혼의 상태를 상징한다. 인간은 세속적인 것에 사로잡힐 때, 굽은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과 은총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 하느님을 바라보고 찬미하도록 이끌어 준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안식일의 의미를 이렇게 풀이한다: “안식일은 단순히 노동을 쉬는 날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며 사랑을 실천하는 날이다. 사랑 없는 안식일은 텅 빈 휴식일에 불과하다.”(Sermo 25,7) 또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주님의 치유 행위를 이렇게 해석한다: “주님은 안식일에 여인을 치유하시며, 율법의 정신이 사람을 위한 것임을 보여 주셨다. 안식일은 인간을 억누르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으로 들어가게 하려는 하느님의 배려이다.”(Homiliae in Matthaeum 40) 즉, 안식일의 참된 정신은 자비이며, 그 자비가 율법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우리도 때로는 회당장처럼 형식에 매여 본질을 잃을 위험이 있다. 기도와 전례, 규범을 지키면서도 정작 자비와 사랑을 소홀히 할 수 있다. 주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삶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또한 18년 동안 굽어 있던 여인처럼 우리 안에도 하늘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무거운 짐과 집착이 있다.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총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길 때, 우리 역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세워 주시는 은총을 믿고, 형식보다는 사랑을, 규정보다는 자비를 선택하는 삶을 살아가자. 그럴 때 우리는 진정 안식일의 의미를 살며,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증인이 될 것이다. 아멘. 전삼용 신부님_남의 눈치 보지 않고 사는 법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아주 당당하고 자유로운 한 분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그것도 모두가 지켜보는 회당 한가운데서, 18년 동안 허리가 굽은 여인을 고쳐주십니다. 이 행동은 당대의 종교적 규범과 공동체의 암묵적인 룰을 정면으로 깨트리는, 그야말로 '눈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회당장이 분개하며 나섭니다. 그는 예수님께 직접 대들지는 못하고 군중을 향해 소리칩니다. "일할 날이 엿새나 있으니, 그런 날에 와서 병을 고치시오!" 이 말은 사실 예수님을 향한 비난이었습니다. 공동체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며 "이 위선자들아!" 하고 호통치십니다. "너희는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풀어 물을 먹이러 가면서, 18년이나 묶여 있던 이 '아브라함의 딸'을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이 당당함, 이 자유로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우리는 왜 예수님처럼 살지 못할까요? 우리는 왜 늘 다른 사람의 시선에 갇혀, 그들의 말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눈치' 보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처럼, 나의 생존을 그들에게 맡겨야만 하는 상황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없다면 형제들이 부모가 됩니다. 우리가 남의 눈치를 보는 이유는 단 하나, '생존'하기 위해서입니다. 공동체에서 쫓겨나지 않아야, 미움받지 않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1950년대, 심리학자 솔로몬 애쉬(Asch)는 이것을 증명하는 유명한 '동조 실험'을 했습니다. 실험은 간단합니다. 한 사람의 피실험자를 7명의 연기자 사이에 앉히고, 명백히 답이 보이는 선의 길이를 맞추게 했습니다. 처음 몇 번은 모두가 정답을 말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7명의 연기자가 일제히 명백히 '틀린 답'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자신의 눈으로는 A가 정답인 것이 확실한데도, 공동체(다른 7명)가 모두 B라고 말하자, 피실험자는 괴로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상당수의 사람이 결국 자신의 눈(진실)을 버리고, 공동체의 '틀린 답'(거짓)을 따라 말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가 바보라서가 아닙니다. 이 공동체에서 '이상한 사람'으로 찍혀 배척당할지도 모른다는 '사회적 생존 본능'이, 진실을 보려는 이성보다 더 강하게 작동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눈치'의 메커니즘입니다.
그런데 이 '눈치' 보는 삶이 일상이 될 때, 우리는 '가스라이팅'에 빠져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헨리크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에 나오는 주인공 '노라'의 삶이 바로 그 비극을 보여줍니다.
19세기 말, 노라의 '사회적, 경제적 생존'은 전적으로 남편 '토르발'에게 의존되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사랑을 받기 위해, 남편이 원하는 대로 행동해야만 했습니다. 토르발이 자신을 "내 귀여운 종달새", "작은 다람쥐"라고 부를 때마다, 노라는 그 '인형'이 되어 재롱을 부렸습니다. 그것이 자신이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남편 토르발은 그런 아내의 의존적인 모습을 "여자는 남편에게 의지해야 아름답다"고 칭찬하며, 그녀의 독립적인 자아를 억압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무서운 '가스라이팅' 입니다. 노라는 '생존'을 남편에게 맡긴 대가로, '눈치' 보는 인형이 되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비극은 단지 문학 속에만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도 자신의 생존을 '하느님'이 아닌 '사람'에게 맡겼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을 보십시오. 그는 '하느님'께 선택받은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왕권 유지가 '백성들의 지지'에 달려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아말렉과의 전투 후, 그는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백성들이 탐내는 좋은 가축들을 살려둡니다. 사무엘이 그를 질책하자, 사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백성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의 말을 들었습니다."(1사무 15,24)
'백성의 눈치'를 보다가 '하느님의 말씀'을 버린 것입니다. 자신의 생존을 하느님이 아닌 공동체에게 맡겼을 때, 그는 왕이라는 정체성을 잃고 버림받게 됩니다.
본시오 빌라도는 어떻습니까? 그는 예수님이 무죄라는 '진실'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생존'은 유대 지방의 안정과 '황제의 신임'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는 군중의 눈치를 봅니다. 바로 그때, 군중은 그의 약점을 파고드는 가스라이팅을 시전합니다. "그 사람을 풀어주면, 총독님은 황제 폐하의 친구가 아닙니다!"(요한 19,12)
결국 빌라도는 '진리'가 아닌 '생존'을 택합니다. 그는 군중의 눈치를 보며 진리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자신은 손을 씻으며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노라, 사울, 빌라도... 이들 모두가 자신의 생존을 '공동체'에게 맡겼기에 눈치를 보았고, 결국 자신을 잃거나 진리를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어떻게 그토록 자유로우실 수 있었습니까? [인형의 집]의 노라처럼, 그냥 그 공동체를 박차고 떠나면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노라가 집을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이 '참된 보호자'가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어디로 가야 할지는 막막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돌아갈 곳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존은 회당 공동체나 율법학자들에게 의존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생존과 정체성은 오직 '아버지 하느님'께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공동체'가 '부모'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공동체는 '형제'들입니다. 그런데 '참된 부모'가 없으면, 우리는 '형제'들을 '부모'로 착각하고 그들에게 생존을 의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그들의 눈치를 보는 노예가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눈치 보지 않고 사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내 생존이 다른 누군가에게, 영원하고 절대적인 분에게 확실히 맡겨져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해리 포터] 이야기가 바로 이 과정을 보여줍니다. 고아인 해리는 이모인 더즐리 가족에게 얹혀삽니다. 그의 '생존'(음식, 잠자리)은 전적으로 이 '형제 같은' 공동체에 의존되어 있습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벽장 속에서 그들의 눈치를 봅니다. 더즐리 가족은 해리에게 끊임없이 가스라이팅을 합니다. "네 부모는 쓸모없는 인간들이었고, 너는 정상이 아니야." 해리는 이 공동체 안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갑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해그리드가 찾아와 폭탄선언을 합니다. "너는 마법사다."
이것은 단순히 새로운 기술을 가르쳐준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너의 '참된 부모'는 너를 위해 목숨을 바친 위대한 영웅들이었다."는, 그의 '참된 정체성'을 알려준 것입니다. 자신이 '짐'이 아니라 '사랑받은 존재'였음을, 자신의 생존이 '희생'이라는 값을 통해 이미 보장되었음을 깨닫는 순간,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입니다. 회당 공동체는 더즐리 가족처럼 예수님을 "안식일도 모르는 이상한 자"라고 가스라이팅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정체성과 생존은 이 땅의 공동체가 아니라 '하늘 아버지'께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미사를 봉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미사는 '해그리드'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너는 세상의 눈칫밥을 먹는 고아가 아니라, 내 아들 예수가 목숨을 바쳐 구해낸 나의 자녀다!"라는 '참된 정체성'을 확인받는 시간입니다. 이 미사를 통해 나의 생존이 세상이 아닌 '아버지 하느님'께 보장되어 있음을 깨달은 사람은, 성당 문을 나서는 순간 더 이상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됩니다. 이병우 신부님_"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루카13,16)
'예수님께로 향해 있자!'
오늘 복음(루카13,10-17)은 '등 굽은 여자를 안식일에 고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을 때, 그곳에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 없는 여자,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그런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루카13,12) 하시며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시니,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치유기적이 일어납니다.
이 모습을 보고 회당장은 분개하여 군중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루카13,1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회당장에게 이르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루카13,15-16)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안식일의 주인은 구세주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습니다. 소나 나귀보다 사람이 훨씬 더 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일지라도 등 굽은 여자를 고쳐주신 것입니다. 고쳐달라는 여자의 요청도 없이 고쳐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기쁨과 자유와 해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루카4,18-19 참조)
그러니 우리도 등 굽은 여자처럼, 이런 예수님께로 향해 있기만 하면 됩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 1열왕13,34)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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