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최후의 심판 “심판의 잣대는 구체적 사랑의 실 |
|---|
|
2025.11.11.화요일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316-397) 축일
이사61,1-3ㄹ 마태25,31-40
최후의 심판 “심판의 잣대는 구체적 사랑의 실천”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내 입으로 그 진실하심을 대대에 전하리라."(시편89,2)
오늘 화답송 후렴입니다. 오늘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각별한 인연 때문에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의 기념일이 아닌 축일미사를 봉헌합니다. 성 베네딕도 이전 이미 서방의 수도승이자 주교였습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순교자가 아니면서 성인의 월계관을 쓴 최초의 인물이자 갈리아의 사도라 불릴만큼 특히 유럽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수도승 주교였습니다. 성인은 프랑스의 수호성인이자 군인, 재봉사, 가난한 이, 가축과 목동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성인의 삶을 엿볼수 있는 것은 그의 제자 술피치우스 세베루스가 쓴 <마르티노의 생애> 덕분입니다. 그 전에 성 아티나시우스는 <안토니오의 전기>를, 또 후에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베네딕도의 전기>를 썼습니다. 성 마르티노는 로마제국의 땅이었던 헝가리 사바리아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절인 316년에 태어납니다.
성 마르티노는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15세에 군인이 되었고 그가 프랑스의 아미앵 근처에 주둔하던중 어느 추운 겨울 밤, 전설적 일화같은 사건이 일어납니다. 말을 타고 가던 마르티노는 추위에 떠는 초라한 행색의 거지를 보았을 때 그는 지체없이 칼로 망토를 잘라 반을 거지에게 주고 반은 자기 몸에 걸칩니다. 그가 가진 것이라곤 긴 칼과 망토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날밤 꿈에 예수님께서 반쪽 망토를 입고 나타나 마르티노에게 말합니다.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예비신자인 마르티노가 이 망토로 나를 입혀줬다.”
이 주님과의 결정적 신비로운 만남 직후, 그는 “날아가듯 달려가” 세례를 받습니다. 이 전설같은 사건과 함께 그는 세상의 군인이 아닌 그리스도의 군인이 되는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세상의 군인이었다가 그리스도의 군인이 된 경우는 성 빠코미오, 성 프란치스코, 성 이냐시오 로욜라가 있습니다.
마르티노는 당시 프랑스 푸아티에 교구의 주교였던 높은 영성과 지성의 소유자인 성 힐라리오를 만나 사제품을 받고 수도생활을 시작하니 프랑스에서는 최초의 수도원이 됩니다. 스승인 힐라리오가 세상을 떠나자 투르의 주민들의 간청에 따라 마르티노는 투르의 주교가 됩니다. 거룩한 수도승이자 사목자로 지칠줄 모르는 열정으로 활약했기에 그의 명성은 프랑스를 넘어 갈리아까지 널리 알려집니다.
그는 주교관 밖에 마련한 골방에서 다른 80명 제자 수도승들과 함께 기도와 사목에 전념합니다. 생애 마지막 임종어도 감동적입니다. 나이가 들고 죽음이 다가와도 그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간청하자 기도하니 바로 임종어가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 당신의 백성이 여전히 저를 필요로 한다면. 저는 그 일을 거부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냥 놔두시오. 땅보다 하늘을 더 바라보고 싶습니다. 이제 여행을 떠나려는 순간, 이 내 영혼은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성인은 397년 11월8일 81세의 나이로 칸드에서 사망하였고, 11월11일 오늘 투르에 묻힙니다. 프랑스에서 그에 대한 숭배는 그에게 봉헌된 500개의 마을과 4000개의 교구교회에서 잘 드러나며 그의 무덤은 주요 순례지가 되었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순례자들의 유명한 기착지이기도 했습니다.
위령성월, 성 마르티노의 거룩한 죽음도 우리에게는 귀한 가르침이 됩니다. 문득 4세기 이집트 사망의 한 원로 수도승의 죽음에 대한 일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임종 순간 제자들이 울자 갑자기 눈을 뜨고 세 번 크게 웃습니다. 제자들이 그 이유를 묻자, “먼저 나는 그대들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기에 웃었소. 두 번째는 그대들 가운데 아무도 준비된 사람이 없기에 웃었소. 마지막으로 내가 세상의 노고를 벗고 영원한 안식을 얻을 것이기에 기뻐서 웃었소.” 이 말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간 이들에게 죽음은 불청객이 아니라 오히려 친구요 벗이었음을 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구원의 기쁜 소식은 왜 주님께 치유받고 해방되어 자유로워져야 하는 인간인지, 바로 인간의 실상을 잘 보여줍니다. 치유 해방되어 온전한 삶을 누리는 길은 주님과의 만남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이사야서는 예수님의 사명을 요약한 것으로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시 선포된 내용(루카4,18-19)입니다. 흡사 예수님께는 출사표出師表와 같고 오도송悟道頌과도 같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신선한 충격적 깨달음과 더불어 예수님 <삶의 지침>이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1.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2.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3.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4.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5.주님의 은혜의 때,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 6.시온에서 슬퍼하는 이들에게 재 대신 화관을 슬픔 대신 기쁨을 맥 풀린 넋 대신 축제의 옷을 주게 하셨다.”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 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비로소 치유, 해방,구원되어 온전한 참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최후의 심판 잣대도 온갖 종교적 행위나 신심활동이 아닌 바로 구체적 사랑의 실천임을 깨닫습니다. 종파와 국적, 인종, 문화, 언어를 초월하여 모든 인류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른쪽 구원된 사람들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1.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2.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3.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 들였다. 4.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5.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6.내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6개 항목중 몇이나 지켰는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 마르티노는 4번 항복에 합격했고, 바로 오늘 복음이 인용된 이유입니다. 바로 이런 구체적 사랑의 실천이 최후심판의 잣대가 됩니다. 궁극의 최후심판에 앞서 날마다 점검해야할 사랑의 실천 사항입니다. 예수님은 인류 모두가 종교와 무관하게 당신의 형제들임을 천명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바로 이 말씀안에 환대의 진리가, 환대의 사랑이 환히 드러납니다. 주님을 맞이하듯 형제들을 맞이하는 환대는 바로 이 말씀에 근거합니다. 모두가 주님의 형제들이자 나의 형제들이요 주님의 현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주님의 형제답게 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의 최후심판에 앞서 주님의 축복을 앞당겨 받는 복된 시간입니다. 늘 깨어 주님 앞에서 주님을 만나는 구체적 사랑의 실천에 충실한 이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축복선언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내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25,34).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게시판 운영원칙
Help Des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