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18일 (화)
(녹)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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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개안(開眼)의 여정 “늘 새로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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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경 [forgod] 쪽지 캡슐

2025-11-17 ㅣ No.186341

2025.11.17.월요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1207-1231)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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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안(開眼)의 여정

“늘 새로운 시작”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어제 제9차 세계 가난의 날, 레오 교황의 귀한 말씀입니다.

“세계 지도자들은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정의없이는 평화도 없다.”

“박해받는 신자들은 진리와 정의와 희망의 증인들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모든 자녀들에게 평화를 갈망하신다.”

 

레오 교황은 어제 1300명 초대한 가난한 이들로 가득한 바오로6세 홀에서 함께 점심식사를 나눴습니다. 참석한 몇 사람의 고백입니다.

“나는 직업을 잃었으나, 나의 존엄을 잃지는 않았다(I lost my job, but my dignity).”

“믿음은 우리를 계속 나아가도록 돕는다(Faith helps us keep going).”

“공동체 안에서 지지를 발견하기(Finding support in community).”

신자들의 삶에 좋은 도움이 되는 말씀들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지혜입니다.

“분노는 독한 술과 같아서 내가 분노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가 나를 집어삼킨다.”<다산>

“한때의 분함을 참으면 백날의 근심을 면한다.”<명심보감>

그래서 저의 지론은 “미풍을 태풍으로 바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순간의 분노가 미풍을 태풍으로 바꾸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제가 가난에 대해 많이 말했습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모두가 가난한 사람들이요 가난은 인간의 본질이라고 말입니다. 죽음앞에서 환히 드러나는 가난한 인간입니다. 저는 평생 매일 강론을 쓸때마다 한계와 부족의 가난을 체험합니다. 

 

이렇게 평생 매일 수시간을 투입했는데도 이정도뿐이 안돼나? 참 많이 좌절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으면서 가난과 겸손을 배웠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가난 체험은 계속될 것입니다. 아마 강론을 쓰면서 체험하는 가난은 사제의 보편적 체험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주제로한 강론 제목은 “개안의 여정”입니다. 참 자주 사용해도 늘 마음에 드는 주제입니다. 오늘 복음은 작은 복음서라 할 만큼 상징적 가르침으로 가득합니다. 위에 예로 들었던 여러 예화와 말씀들, 개안의 여정에 좋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개안하면 떠오르는 다음 대목의 고백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꽃자리 천국이옵니다.”

 

오늘은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입니다. 성녀는 왕족의 딸로 태어나 14세에 튀링겐 영주 헤르만 1세의 둘째 아들 루트비히 4세와 결혼합니다. 비록 정략적 성격을 지닌 혼인이었지만 두 사람은 6년 동안 세자녀를 두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루트비히 4세가 십자군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염병으로 사망하자 성녀는 깊은 슬픔중에 자신의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작은형제회 제3회원이 됩니다. 세속을 떠나 독일 헤센 지역의 한 성에 살면서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헌신하며 살다가 24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납니다. 성녀의 가난한 겸손, 봉사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찬탄을 받았습니다.

 

성녀는 사후 4년, 1235년 그레고리오 9세 교황에 의해 시성됩니다. 성녀의 성화는 종종 망토 안에 장미꽃을 담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바로 왕비였던 그녀가 가난한 이들에게 주려고 몰래 빵을 감추고 나가다가 남편에게 들키자 그 빵이 장미꽃으로 변했다는 전설에 따른 것입니다. 이를 반영하듯 성녀는 빵제조업자와 빵집의 수호성인이 됩니다. 또 성녀는 자선사업의 수호성인이자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습니다.

 

2000년 가톨릭교회에는 참 다양하고 무수한 성인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흡사 교회 하늘에 무수히 빛을 발하는 별같은 성인들이요, 명실공히 이런 명품성인들이 명품종교 천주교를 만들고 이런 성인들은 우리 삶의 좌표가 됨으로 참 많이도 보고 배움으로 우리 모두 명품인생, 명품신자로 만들어 줌을 깨닫습니다.

 

성인들의 특징은 끊임없는 주님과 만남을 통해 개안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했다는 것입니다. 육신은 성장을 멈추고 쇠약해지더라도 영적 성장과 성숙은 죽는 순간까지 계속됐으면 좋겠습니다. 육신의 육안 시력은 약해져도 영혼의 영안 시력은 날로 좋아지면 좋겠고 아마도 성인들의 삶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 장면이 상징적으로 참 풍부합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어떤 눈먼 이는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한 가난한 인간의 실존을 상징합니다. 흡사 길목에서 길이신 주님을 애타게 기다리는, 갈망하는 가난한 인간의 보편적 모습입니다. 

 

눈은 멀었지만 영혼은 주님 갈망에 깨어있던 눈먼이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말하자 전광석화 반응합니다. 바로 우리가 미사가 시작하자마자 바친 자비송입니다. 새삼 미사시 자비송은 여기서 유래하며 우리의 자비송은 오늘 눈먼이처럼 간절한 갈망의 표현이어야 함을 배웁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앞서 가던 이들이 잠자코 있으라 꾸짖었지만, 구원의 순간을 놓칠수 없어 더욱 큰 소리로 자비송 기도를 바칩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셨고 주님과 눈먼이와 선문답禪門答같은 대화가 오갑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복음의 눈먼이뿐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물음입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간절하면 답도 짧고 순수합니다. 영적으로 눈먼 우리들에게 역시 간청할바는 이것 하나뿐이겠습니다. 탐욕과 어리석음의 무지에, 또 편견, 선입견에 눈먼, 눈뜬 맹인들인 우리들에게 정말 청할 것은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진상을 보게 해달라는 청만큼 절실한 청도 없습니다. 

 

어찌보면 무지에 눈먼 인간. 바로 인간의 정의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맹신, 광신 모두에 무지의 눈먼 인간을 지칭합니다. 그러고 보니 육신의 눈은 멀쩡해도 영적으로 눈먼이들 가득한 세상같습니다. 예수님의 지체없는 응답입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정말 보고자 하는 갈망의 믿음이 눈먼이를 치유하여 보게 되니 갈망의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습니다. 눈먼이가 이런 갈망의 믿음으로 자비송을 바치지 않았다면 주님은 그냥 지나쳤을 것입니다. 

 

눈먼이가 눈이 열리자 본 것은 주님이었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니 제대로의 삶의 목표와 방향을, 삶의 중심과 의미를 찾은 눈먼 이입니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니 군중 역시 주님을 만나 무지의 눈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새삼 주님을 보라고 있는 눈이요,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있는 귀요, 주님을 찬미하라 있는 입이요 주님을 따르라 있는 발임을 깨닫습니다. 저절로 나오는 감사의 고백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잠시 오늘 제1독서 마카베오 상권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그리스제국의 치하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처지가 진퇴유곡입니다. 유다인의 ,정체성을 지키자니 순교의 죽음이요 그리스제국의 문물을 따르자니 동화와 속화로 인한 정체성의 상실이니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흡사 박해시대 신자들의 처지나 일제 치하에서 조선민족의 처지와 같습니다.

 

지금은 이런 위기는 아니지만 자본주의하에서 세속화의 피해가 날로 우리 신자들의 정체성을 위태롭게 합니다. 속화의 여정이 아니라 성화의 여정과 더불어 개안의 여정이 정체성의 부패와 변질을 막아주며 우리를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이 되어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게합니다.

 

새삼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 수행이 개안의 여정, 성화의 여정에 얼마나 결정적 도움이 되는지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을 만난 우리의 무지의 눈을 활짝 열어주시고 날로 개안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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