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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7일 수원교구 묵상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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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다시 보아라!
오늘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의 마지막 길, 예리코에 이르십니다. 앞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에 대하여 세 번에 걸쳐 예고를 하셨으나, 제자들은 아직 무슨 의미인지 깨닫지 못하는 상태, 눈이 먼 사람처럼 보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예리코 성문 가까이에서 구걸하던 걸인들, 그들 가운데 한 눈먼 이가, 파스카 축제를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순례자들을 기다리고 있던 터에, 다른 사람들보다 강렬한 느낌을 받아 무엇인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리라 느낍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줍니다. 군중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업적을 드러내시는 장면은 목격했으나, 그분의 진정한 신원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저 ‘나자렛 사람 예수님’ 정도입니다. 그러나 눈먼 사람은 좀 더 멀리 보고자 합니다. 하느님의 영이 이 사람의 마음속에 진리를 심어주자, 믿어 고백합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이 소경은 오셔야 할 분이 ‘다윗의 자손, 예수 메시아’이심을 선포하며 외칩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사람들은 이 사람을 잠자코 있게 하려 하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더욱 아름다운 소리로 외칩니다. 늘 성령의 움직임을 의식하고 있던 예수님은 군중의 함성 속에 묻힐 뻔했던 눈먼 이의 외침을 들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메시아로 지칭됨을 더는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이제 메시아로 처신하시며,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신앙을 점검하고자 질문을 던지십니다. 예수님은 늘 당신의 의지를 강요하지 않으시고, 당신께 무엇인가를 요구할 수 있는 자격과 권리를 사람에게 넘겨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눈먼 이는 망설임 없이 유일하며 간절한 바람인 치유를 소리 높입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눈먼 이는 이제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릅니다. 이 호칭은 초대교회 신자들이 찬미가를 부를 때 외치던 호칭,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신앙의 호칭입니다. 치유 요청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청하는 사람에게 주실 것이며, 눈먼 이들을 보게 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음을 여러 차례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보아라.” 눈먼 이는 육체적인 치유만을 요구했지만, 예수님은 영적인 치유까지 선사해주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로 즉시 보게 된 눈먼 이는 치유의 능력을 보여주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군중 또한 찬미가를 부르며 이 사람과 함께합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며 예수님의 뒤를 따라 걸어가는 모습, 곧 교회의 모습을 미리 내다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처럼 찬미하며 따라가는 공동체로 정의됩니다.
눈먼 이의 치유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의 육체적 치유를 넘어, 보지 않고 살거나 눈을 감고 보지 않으려 했던 예수님의 제자들, 초대교회 신자들, 그리고 우리의 부족한 신앙 삶을 치유해 주는 이야기로 다가옵니다. 부족을 느낄 때마다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시기를" 청하는 용기와, 치유의 은총과 함께 “찬양하며 따르는” 자세가 필요할 뿐입니다. 오늘 하루, 청하는 우리의 기도를 기꺼이 들어 주시고, 부족한 가운데서도 정성을 다하여 따를 수 있도록 늘 이끌어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임을 자랑스럽게 드러내는, 보람찬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18,35-43: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세상에서 안타까운 것 중 하나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신체적 장애가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고 관계를 맺는 길이 막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경은 육신의 눈먼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마음의 눈이 먼 것이라고 가르친다. 오늘 복음의 눈먼 거지는 단순히 시력을 되찾은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을 열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로 들어가실 때, 길가에 앉아 있던 눈먼 이가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38절) 하고 간절히 부르짖는다. 군중은 그를 꾸짖으며 조용히 하라고 하지만, 그는 더 크게 소리친다. 그의 끈질긴 부르짖음은 단순한 시력 회복을 향한 갈망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었다. 예수님은 그에게 물으신다. “네가 나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41절). 그는 단순히 말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41절) 예수님은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42절) 하고 응답하시며, 그의 눈을 열어 주신다. 그 결과 그는 단순히 눈을 뜬 것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다. 이는 육신의 눈과 영혼의 눈이 동시에 열린 사건이었다. 성 이레네오는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 있는 인간이며, 인간의 삶은 하느님을 보는 것”(Adversus Haereses, IV, 20,7)이라 했다. 오늘 복음의 눈먼 이가 바로 그 증거이다. 육신의 눈이 열리자,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삶, 곧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되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빛을 보기를 원했지만, 단순히 눈의 빛이 아니라 마음의 빛을 보았다. 그는 세상을 보는 눈보다 믿음을 보는 눈을 먼저 얻었다.”(Sermo 88) 교리서도 우리 신앙의 여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신앙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마음의 눈을 열어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다.”(2715항 참조) 오늘 눈먼 이가 군중의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38절) 하고 부르짖은 것처럼, 우리도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주님, 제가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41절) 이것은 단순히 문제 해결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믿음의 눈, 사랑의 눈, 감사의 눈을 달라는 청원이다. 또한 그는 눈을 뜬 뒤 곧바로 예수님을 따랐다. 우리의 기도도 단순한 청원에서 멈추지 않고, 응답을 받은 뒤에는 제자의 길로 이어져야 한다. 오늘 눈먼 이는 우리 신앙인의 모범이다. 그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부르짖었고, 응답을 받자,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우리도 같은 은총을 청해야 한다. “주님, 저희의 눈을 열어 주소서. 세상의 눈먼 삶에서 벗어나, 믿음의 눈으로 당신을 바라보고 따르게 하소서.” 아멘.
전삼용 신부님_불가능한 소망 하나쯤은 가지고 살아야! 찬미 예수님! 캐나다 몬트리올의 성 십자가 수도회에 '알프레드 베셋'이라는 청년이 입회했을 때, 수도원 장상은 그를 받아주며 추천서에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그는 오늘 몸이 아파 일은 거의 할 수 없지만, 기도는 열심히 하는 거룩한 영혼입니다." 그의 이름은 '안드레'가 되었고, 그가 맡은 소임은 노트르담 대학의 '문지기'였습니다. 그는 평생을 그 자리에서 문을 열고 닫고, 방문객을 안내했습니다. 글도 겨우 읽을 줄 알았고, 몸은 평생 병을 달고 살았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는 가장 연약하고 '쓸모없는 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보잘것없는 수사의 마음속에는 화산처럼 타오르는 '믿음의 불'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양아버지이신 '성 요셉'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졌습니다. 왜 하필 성 요셉이었을까요? 안드레 수사는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과 성모님을 맡기실 정도로 신뢰하신 분이라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청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관장하시는 분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병자들이 그를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감기 환자, 다친 아이들이었습니다. 안드레 수사는 자신이 고쳐준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똑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성 요셉께 가십시오. 그분께 기도하십시오!" 그는 성 요셉 성상 앞 램프의 기름을 조금 묻혀 환자에게 발라주며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의사들이 포기한 불치병 환자들이 낫고, 말기 암 환자들이 치유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몬트리올의 기적'이라 부르기 시작했지만, 그는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병을 고쳐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성 요셉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안드레 수사에게 몰려든 이유는, 그가 '불가능한 청'을 들어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안드레 수사를 단순한 문지기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느님의 대리자'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증거가 바로 지금 몬트리올 성 요셉 대성당의 한쪽 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수천 개의 목발과 보조기들, 바로 '성 요셉의 벽'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리코의 눈먼 이는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평생 청했던 것은 고작 "적선해 주십시오", "한 푼만 주십시오"라는 '가능한 청'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자, 그는 자신의 평생 기도 제목을 바꿉니다. 그는 자신의 병이 의사 수준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저분이라면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사람들이 그를 꾸짖으며 잠자코 있으라고 했습니다. "시끄럽다! 네 주제에 감히 무엇을 청하느냐?" 하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던 길을 멈추시고 그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예수님은 그에게 '불가능한 청'을 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는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는 돈(가능한 청)이 아니라 '다시 보는 것'(불가능한 청)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선포하십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의 '불가능한 청'이 그의 믿음을 증명한 것입니다. 신부인 저에게 안수를 청하는 분들도 다양합니다. 감기 환자부터 말기 암 환자까지 옵니다. 병원에 가면 나을 수 있는 것으로 안수를 청하는 분들은, 저를 신부님 말씀대로 '의사 수준'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기 암 환자가 눈물로 안수를 청할 때, 그분은 저를 '하느님의 대리자'로 보고 계신 것입니다. 제가 오산 성당에 있을 때였습니다. 한 어머니가 저에게 달려와, 막 숨을 거둔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곧 영안실로 들어가야 할, 이미 싸늘해진 아들의 시신이었습니다. 저는 그 어머니와 함께 영안실 문 앞에서, 이미 의학적으로는 끝난 그 아들의 몸에 손을 얹고 '불가능한 안수'를 했습니다. 물론, 아들은 다시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저는 기적보다 더 위대한 것을 보았습니다. 바로 그 '어머니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녀는 저를 '위로해 주는 사람' 수준으로 부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저를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느님의 대리자'로 불렀습니다. 그녀의 그 '불가능한 청'은, 비록 인간적인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 자체로 이미 가장 위대한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는지가 바로 우리가 하느님을 어떻게 믿고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우리는 불가능한 것 하나쯤은 꾸준히 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을 '나의 아버지'로, '전능하신 하느님'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 주일학교 교사할 때 제가 야단쳐서 도망간 아이가 되돌아오기를 청했습니다. 들어주셨습니다. 술내기에서 이기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들어주셨습니다. 이렇게 믿음이 쌓여갔습니다. 지금은 모든 불가능한 것들도 청합니다. 들어주시는 것은 주님 마음이지만, 그것을 청할 수 있는 믿음은 우리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불가능한 청'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오늘 복음의 눈먼 이처럼, 안드레 수사처럼, 그리고 오산 성당의 그 어머니처럼 당당하고 꾸준하게 기도하십시오. 그 '불가능한 청'을 통해, 여러분의 믿음이 여러분을 구원할 것입니다. 아멘.
이병우 신부님_"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18,41ㄴ) '죄의 뿌리로부터의 해방!' 오늘 복음(루카18,35-43)은 '예수님께서 예리코의 눈먼 이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예리코에 있는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예수님께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18,38) 사람들이 제지하자,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18,39ㄴ)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루카18,41ㄱ) 그러자 눈먼 이가 대답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18,41ㄴ)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18,42) 하고 이르시니,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는 치유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도 눈먼 이들이 아닌가? 눈에 보이는 것들을 볼 수 있는 육적인 눈은 가지고 있지만, 눈에 보이는 그 너머의 것을 보지 못하는,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을 보지 못하는 영적으로 눈이 멀어있는 이들이 아닌가? 예리코의 눈먼 거지가 다시 보게 된 치유기적은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도 일어날 기적입니다. 우리도 영적으로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죄의 뿌리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교만과 탐욕과 인색과 음욕과 시기(질투)와 분노와 게으름(나태)'이라는 '죄의 뿌리'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외칩시다! 더욱 큰 소리로 치유자이신 주님께 외칩시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11월17일인 오늘은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이자,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수호성인'이신,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입니다. 죄의 뿌리로부터 해방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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