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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님_<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큰 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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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비유 하나를 덧붙여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신 데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 그런데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사절을 뒤따라 보내어,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루카 19,11ㄴ-14)” “그런데 다른 종은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내가 냉혹한 사람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되찾았을 것이다.’(루카 19,20-23)”
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신 데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예수님을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당신을 메시아로 선언하시려고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 생각은 예루살렘 입성 때에도 이어졌습니다(루카 19,38).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런 일은 ‘재림’ 때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려고, 또 ‘지금’과 ‘재림’ 사이에는 어느 정도 시간 간격이 있다는 것과 당신의 재림 때까지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려고 ‘미나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2) 12절과 14절은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한 구절입니다. 헤로데 왕이 죽은 뒤에 왕위를 물려받은 사람은 ‘아르켈라오스’입니다(마태 2,22). 당시 유대인들은 그를 몹시 싫어해서 그가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한다는 의견을 로마 황제에게 전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비유의 재료로 사용하셨는데, 승천과 재림 사이의 시간 간격은, 아르켈라오스가 왕권을 받으려고 로마 황제에게 가 있었던 시간으로 표현되었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를 거부한 자들의 불신은, 백성들이 아르켈라오스를 반대한 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은, 아르켈라오스가 왕이 된 다음에 반대자들을 처형한 일로 표현되었습니다(루카 19,27).
3) ‘미나의 비유’의 핵심은 ‘세 번째 종’입니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라는 말은, “주인님은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분이어서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원금만이라도 잘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세 번째 종은, 주는 것도 없이 빼앗아가기만 하는 주인이니, 원금을 잃으면 대단히 엄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생각했습니다.> 주인이 세 번째 종에게 한 말은, “무슨 일이든지 했어야 한다.” 라고 꾸짖는 말입니다. “원금을 잃는 것이 무서웠다면, 은행에 넣어 두었어야 했다. 그러면 돈벌이를 한 것보다는 적은 금액이 되겠지만 이자라도 붙여서 되찾았을 것이다.” 라는 주인의 말은, 그 당시의 은행 제도를 바탕으로 한 말일 뿐이고, 오늘날의 은행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든 세 번째 종의 죄는 ‘아무것도 안 한 죄’입니다. 주인이 그 종을 처벌한 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안 한 것이 왜 죄가 되느냐고 물을 수도 있는데, ‘좋은 일’(선행)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남을 해치는 일’(악한 일)을 하는 것과 같고,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죽이는 일’을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마르 3,4). 대표적인 예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입니다(루카 10,31-32).
4) 만일에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이 돈벌이를 하다가 실패해서 원금까지 잃었다면? 그래도 주인은 그들을 칭찬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결과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노력’을 보시는 분, 즉 어떤 업적을 남겼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를 보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실패를 겪을 수도 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고, 그래서 사도들이 배척당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마태 10,14). 사도들에게 주어진 책임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것은 사도들의 책임이 아닙니다. <만일에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지 않아서, 복음을 모르는 채로 살다가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것은 복음을 전하지 않은 우리의 책임이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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